대학교 2학년 새터에서 그 녀석을 처음 만났다.
다소 껄렁껄렁 하면서도, 재수 했음을 강조하며 1년 위 선배들이랑 은근히 맞먹으려 드는 모습.
첫인상이 썩 좋지는 않았다. 왠지 나랑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 녀석은 나를 좋게 본 것 같다.
나름 핵 인싸(!?)를 알아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축구도 개발인 녀석이 축구 팀에 들어오고, 학생회에도 들어오고 했으니 말이다.
애인도 아닌 녀석이 매일 저녁에 전화를 해서,
형 집에 가서 아쉽다, 어디서 술 먹고 있는데 나와라, 등등 학교에서 마주치지 않은 날은 매일 전화를 했다.
좋지 않았던 감정은 없어진지 오래고, 외동 아들인 나에게 정말 믿을 수 있는 인생의 첫 동생이 생겼다고 믿었다.
3학년이 되었고, 나름 핵 인싸(!?) 였던 나는 과 회장이 되었다.
그 녀석은 나를 보좌하겠다며, 학생회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나 또한 그런 그 녀석이 너무 좋았다.
새터 준비를 하면, 가장 중요한 절차가 신입생들 조 배정이다.
싸이월드 클럽에서 이미 자기소개를 대부분 마친 상황이기 때문에, 이쁜 신입생과 잘생긴 신입생은 언제나 조장의 타깃이 된다.
적절한 성비 구성에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에서 피터지는 쟁탈전과 트레이드가 일어난다.
과 회장은 전통적으로 해당 드래프트에 참여할 실익이 없지만,
신입생 중 가장 이쁘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 내 마음을 끄는 한 사람이 있어서 내 맘대로 드래프트에 참여 했다.
그 녀석의 조에 그녀를 배정하면, 아무래도 친하게 지내기도 편하고 주변에 남자들이 꼬이면 컨트롤 하기도 편하겠다 싶었다.
모든 것은 뜻대로 이루어졌다, 매일 같이 보던 사이였으니 조 모임을 어느 술집에서 하는지까지 모두 알 수 있었다.
괜히 한 번 들렀다고 하면서 방문해서 그녀를 보고, 조금씩 가까워졌다.
물론 그 녀석은 다른 과 여자애와 잘 되기 위해서 노력 중이라,
고백을 위한 꽃 다발도 케익도 그리고 그 당시 가장 잘나가는 레스토랑인 아웃백 상품권도 직접 챙겨 주며,
서로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바쁜 3월이 다 가고 4월 초가 될 때 즈음,
그녀와 나는 무척이나 가까워졌다, 아직 고백은 하지 않았지만 가벼운 터치 정도는 서스럼 없었고,
중간 고사가 끝이나면 같이 꽃을 보러 가자는 약속을 하며, 중간 고사 준비에 들어갔다.
그 날도 평소와는 마찬가지로, 시험이 끝이나면, 어떻게 고백을 할까 즐거운 상상을 하며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문자 한 통이 왔다.
" 형 오늘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저녁 같이 할래요? 드릴 말씀도 있고 "
그 녀석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친하게 지내던 다른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같이 간 식사 자리에서 나에게 말했다,
" 형 그 동안 너무 즐거워 보이셔서 말씀 드리지 못했는데, 그 녀석이랑 그 신입생이랑 사귀고 있어요.
아마 2주 쯤 된 것 같고, 아마 다들 알고 있을 거예요.."
아마 살면서,
어떤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 눈물을 쏟을 수 있는 건,
앞으로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밖에 없을 것 같다.
그 정도로 나는 눈물이 많이 났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보다, 동생이라 믿었던 그 녀석이 나를 배신한 것 그게 너무 슬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녀도 나보다는 그 녀석이 좋았던 것이고, 남녀 간의 사랑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하며 받아 들여야만 했다.
오히려 형의 여자, 사귀지는 않았으니 형의 썸녀 쯤 되려나,
그보다도 아니면 내가 잘 되고자 했던 여자? 를 채간 놈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도 있다는 생각에 걱정이 다소 앞섰다.
며칠 후 축구 팀 형들에게 전화를 받고, 학교 앞 술집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스무명 형들과 그 녀석이 함께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동생의 여자친구를 뺏으려고 하다가, 그게 잘 되지 않아서 그냥 판을 다 뒤엎고 날뛰는 개X끼가 되어있었다.
비로소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 녀석을 믿었기에 그녀를 그 조에 보내서 생활하게끔 했고,
그 녀석을 좋아했기에 비록 그녀와 사귄다는 사실을 들었어도 과 내의 그 녀석의 안위를 더 걱정했는데,
진심으로 그 놈을 저주하고 또 저주 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우리는 모두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복학생 어르신이 되어있었다.
겹치는 동선이 적지 않아, 학교에서 마주치는 일도 같은 술 자리에 동석하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 우리에게 대화는 없었다,
각자 미래를 그렸지, 같은 자격 시험을 준비했다.
같은 시험을 준비 했으니 누군가를 통해서든 그 녀석의 소식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녀석 또한 내 시험 결과를 언제나 들었을 것이다.
4년 반, 내가 합격하는데 걸린 시간이다.
그리고 그 녀석은 준비를 시작한지 9년이 되는 올해, 지난 주에 마지막 2차 시험을 봤다고 한다.
1차 시험 떨, 1차 시험 떨, 1차 시험 합, 2차 시험 부분 합, 2차 시험 최종 떨, 1차 시험 합, 2차 시험 부분 합, 2차 시험 최종떨,
1차 시험 합, 2차 시험 부분 합, 2차 시험 최종 응시,
오랜 만에 그 녀석의 부분 합격 과목을 알아 보고,
오랜 만에 시험 관련 까페에 들어가서, 과목 별 난이도를 확인 해 보니, 하필 제일 어려운 과목을 이번에 응시했다고 한다.
하. 불쌍한 녀석. 벌써 우리 나이는 30대 중반을 넘어섰는데,
나는 이번에 그 녀석이 합격했으면 좋겠다,
나는 너를 용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