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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02 13:59
글을 설득이 되게 써야하는데 그런게 부족해요 난민에 대한 편견도 없애고 해서 결국은 난민을 받는게 좋다 이런 글을 쓰고 싶은데 글재주가 미천해서 그런게 잘안되네요
19/07/02 14:55
아니 난민을 받는게 왜 좋나요? 난민을 받는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책임을 분담하기 위해서지, 난민을 받는다는 자체도 장기적으로 +일지 -일지는 모르고 단기간은 무조건 -입니다. 약자라고 무조건 선한게 아닌데...
19/07/02 14:30
100년전쟁을 국가간의 전쟁의 시점으로 보면 많은 혼돈이 있습니다.
그냥 프랑스 왕위계승권이 달린 전쟁이고, 이때의 전쟁 기점으로 살리카법을 따르는쪽과 아닌쪽이 나뉘었고, 최종적으로 샤를 7세가 잔다르크의 도움으로 조카인 잉글랜드 왕의 도전을 물리치고, 프랑스내 잉글랜드왕의 세력을 다 몰아내고 빼앗아, 이후 프랑스왕이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계기를 만든 것 이지요. 잉글랜드는 결국 프랑스 영지를 대부분 잃기도 했고, 바로 이어지는 장미전쟁이 터지면서.. 튜더왕조로 바뀌고 나름 잘 나가게됩니다.
19/07/02 14:44
그리고 성녀님은 화포를 애용하셨던걸로 보아
전쟁에서 신은 포병을 사랑하는걸 알 수 있습...읍읍 물론 그 당시 화포가 좀 성능이 그렇다 치더라도 말이죠...(성녀님의 머리를 맞췄는데 죽지 않...)
19/07/02 14:52
클레임과는 상관없이 '민족'은 사실 이전에 갈린 셈이라.
네덜란드가 스페인황제를 모시더라도 황제의 국적이 스페인인거지 자기를 스페인 국민이라 생각하지 않듯이 말이지요. 물론 백년전쟁이 확실히 그걸 가르는 계기가 되긴 했지만.
19/07/02 15:51
[임진왜란은 7년전쟁인데 프랑스와 영국전쟁은 백년전쟁이라서 프랑스 백성들은 조선의 백성보다도 더 긴시간을 정말로 고통스러운 삶을 100년동안 살았는데]
음.... 아니 꼭 그런 계산은.... 물론 힘든건 사실이었겠지만 음... 뭔가 설명하려니 애매하긴하네요. 비교대상이 임진년 전쟁인 것도 뭔가 애매하게 만들고. 전쟁의 고통(?)이 꼭 전쟁 기간에 비례하는 건 아닙니다. 백년전쟁은 기간대비로 따졌을 때 그렇게 어마어마한 전쟁은 아닌걸로.
19/07/02 17:11
민족 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각보다는 오래전 부터 있던 것이기는 한데 민족국가는 생각보다 오래된게 아니긴 합니다
다만 영주가 타국 사람이어도 자신들 민족한테만 잘해주면 상관 없다는 분위기는 있었고... 심지어는 귀천상혼이 안되는 문제때문에 왕족은 왕족끼리 결혼하다 보니 사실 왕족의 민족을 따지기도 애매했고요 민족국가 라는 개념이 본격화 된것은 백년전쟁도 있지만 계몽시기 이후 프랑스 혁명까지 넘어오면서 왕과 귀족이라는 개념이 필수가 아니게 되면서 대안을 찾은게 민족국가 라는 개념이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통일 독일과 통일 이탈리아(둘다 군주가 있지만)가 시작된거라서....
19/07/02 19:30
윗분들 말씀대로 백년전쟁은 영국의 플랜태저넷가문과 프랑스의 발루아가문 두 가문사이에서 프랑스왕위라는 작위를 놓고 다툰 계승전쟁입니다.
살리카법으로 인해 혈연적으로 더 가까운 영국왕 에드워드 3세가 아닌 발루아가문에서 왕위를 가져가면서 에드워드 3세가 반발해서 벌어지는것이 백년전쟁이죠. 그리고 에드워드 3세가 죽고 영국왕이라는 작위도 다툼에 휩쌓여서 둘간은 전쟁은 휴지기를 맞이하죠. 그리고 이후 발루아 가문에서 샤를 6세가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이 샤를6세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던 왕이라서 섭정이 권력을 쥐게 되었고, 그 자리를 놓고 오를레앙공작과 부르고뉴공작의 두가문이 대립합니다. 두 가문은 프랑스내에서 극심한 대립을 하며 내전을 겪었고 양쪽다 영국을 끌어들이려고 하죠. 당시 헨리 5세가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었는데 영국내는 잘 정리했고 부르고뉴 쪽과 손을 잡고 이 내전에 개입합니다. 여기서 부르고뉴-영국연합이 승리하고 헨리 5세는 그 떡고물로 헨리5세의 프랑스내 왕위계승권을 인정받습니다. 당시 샤를6세에게는 아들이 있었으나, 그 아들의 왕위계승권을 박탈하고 (사통해서 낳은거라 진짜 핏줄아니다 이런 유언비어와 함께) 헨리5세는 샤를6세의 딸인 발루아의 캐서린과 결혼하고 그 자식들이 다음왕위를 계승하기로 한거죠. 당연히 그 아들과 오를레앙쪽에서는 받아들일수 없었지만, 힘에서 밀렸습니다. 그런데 헨리5세가 너무 일찍 죽어버린겁니다. 헨리5세가 죽고, 곧이어 샤를 6세가 죽어버리자 그 왕위를 헨리5세와 발루아의 캐서린의 아들이던 헨리6세가 이어야하는데 그는 당시 너무 어린 나이였습니다. 이때다 싶은 샤를 6세의 아들과 오를레앙쪽은 강하게 반발하고 다시 영국과 브루고뉴와 오를레앙 쪽은 한판 붙게된겁니다. 브루고뉴와 영국연합은 강력히 밀어붙혀서 오를레앙을 포위했구요. 오를레앙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있습니다. 반대파의 본거지였던거죠. 이때 나타난게 잔다르크! 오를레앙을 구원하고 다음으로 랭스를 탈환해서 샤를6세의 아들로 하여금 대관식을 치르게 해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본문에 황태자로 표현된 사람이며 샤를 7세입니다. 당시 살리카법을 발굴해낼때 랭스에서 일단 대관식을 치르고나서 내가 적법한 왕이라며 떼(?)를 쓰며 살리카법이라는 법적근거까지 만들어내었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샤를 7세가 착실히 그 코스를 밟고 자신이 적법한 왕임을 주장하고 나선거죠. 다만 샤를7세는 잔다르크의 공적 덕에 대관식을 올렸지만, 그가 바란 것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교전파인 잔다르크와 달리 샤를7세는 본인의 작위를 인정받고 화친하려는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대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왕 위에 있는 느낌의 성녀또한 본인에게 부담스러웠습니다. 그 와중에 잔다르크는 교전중에 부르고뉴 쪽에 포로가 되었고 잔다르크의 몸값을 요구하였는데 샤를7세는 포로몸값지불에 응하지 않고, 몸값 지불에 응한 영국으로 이송되어 처형되게 됩니다. 이후 브르고뉴가 영국과의 동맹을 파기하게 되면서 백년전쟁은 발루아 측의 승리로 끝나게됩니다. 여담이지만 샤를6세의 딸이었던 발루아의 캐서린은 본인의 아들인 헨리6세를 프랑스왕위에 앉히지는 못했으나 헨리5세 사후 웨일즈 귀족이던 오웬 튜더와 재혼하여 에드먼드 튜더를 낳았고, 헨리 6세는 본인의 이부동생인 에드먼드 튜더를 아껴서 랭커스터의 사생아 가문인 보퍼트 가문의 상속녀 마가릿 보퍼트와 결혼시켰고 에드먼트 튜더와 마가릿 보퍼트는 아들인 헨리 튜더를 낳았습니다. 나중에 그 아들인 헨리 튜더는 장미전쟁때 랭커스터가문의 직계계승자들이 요크가문에 무너진 뒤, 랭커스터가문을 사생아가문이었던 보퍼트가문이 계승했는데 그 계승자 역시 여자인 마가릿 보퍼트였고, 그녀의 아들이라는 위치로 랭커스터 잔당들을 규합할수 있었고 요크가문의 왕이던 리차드 3세에 반대하는,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해서 반 리차드3세 요크가문도 연합하여 장미전쟁을 종식시키고 튜더왕조를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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