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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토프를 공략하자마자 독일군 A집단군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바로 캅카스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는 꽤나 주효하긴 했지만, 이미 소련은 독일군이 필수로 점령했어야 할 마이코프 유전을 불태우고 난 이후였습니다. 옐브루스 산을 등정하는 성과 아닌 성과를 이루기는 했다지만 그건 전쟁과는 영 관련없는 일종의 상징적인 쇼케이스일 뿐이었고, 이를 잘 아는 히틀러 역시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은 어쨌든 북캅카스를 점령함으로써, 바르바로사 작전에 가려서 그렇지 상당히 빠른 공격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제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 독일군은 가장 가까운 유전인 그로즈니 유전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본론 들어가기 전에 지도 두 장 보시죠.
북서쪽의 로스토프나도누에서 수직으로 남하하면 마이코프가 나오죠. 그리고 그 마이코프에서 동쪽으로 달리면 그로즈니입니다. 회색 희미한 선이 도로이고 검은색이 철로인데, 보시다시피 그로즈니로 접근하려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던가, 북쪽에서 남하하던가죠. 근데 북쪽에 있다고 하는 그 도시가... Astrakhan. 아스트라한이죠? A-A 라인의 그 아스트라한입니다. 지금 그 라인 만들자고 진격하는 건데 독일군이 그 루트를 거쳐갈 리는 당연히 없죠. 요약하면, 독일군이 그로즈니를 먹기 위해서는 외길을 밟아야 하는 운명이었다는 거죠.
좀 더 확대한 지도입니다. 독일군은 서쪽의 피아티고르스크(Pyatigorsk)는 접수한 상태였고, 소련군은 날치크(Nalchik) 외곽에서 방어선을 치고 뻗딩기고 있었습니다. 결국 독일군으로서는 그로즈니를 접수하기 위해서는 날치크와 그로즈니 사이에 있는 큰 도시... 이쯤되면 다들 짐작하시겠죠. 바로 블라디캅카스(Vladikavkas)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점령해야 할 판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블라디캅카스로 진군했다가는 보시다시피 그로즈니 방면과 남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방면, 그리고 서쪽의 날치크에서 오는 방면 등 사방으로 공격받을 위험이 있어 일단 가장 가까운 날치크부터 정리하고 봐야 했죠.
그래서 시작은 항상 기갑 부대를 앞세워서 핀포인트로 찌르고 들어가는 공세였죠. 강을 따라 죽 방어선을 치던 소련군의 일점을 돌파하면서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소련군은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지금 지도상으로는 강이 잘 안 나와서 그런데, 독일군 3기갑군단(3 TK)에서 마주보는 소련군을 따라 남쪽으로 테레크 강(Terek)이 쭉 흐르고 있는 형편입니다. 바꿔 말하면 돌파당한 부분의 서쪽에 있는 소련군으로서는 지형으로 인한 포위 섬멸의 위험이 따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죠. 결국 죽기 싫으면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9월 말이 되자 대번에 날치크가 까닥거리기 시작했죠. 독일군이 밀어낸 가장 남쪽의 작은 마을이 옐호토보(Elkhotovo)인데, 하필 이 마을이 바로 날치크와 그로즈니를 잇는 가장 남쪽의 도로 위에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날치크에 있는 소련군은 후퇴하려면 그 험한 캅카스 산맥을 넘어야 할 형편이었다는 이야기가 되죠. 해발 5천 미터가 넘는 대(大)캅카스 산맥을... 저 산맥, 진짜, 개마고원 알기를 우습게 아는 산맥인지라, 사실상 소련군의 퇴로는 반쯤 막힌 셈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리고 적에 대한 물리적 섬멸을 놓치지 않을 독일군이 아니었죠. 그래서 날치크 공략을 시도합니다. 파란색 글씨로 쓰인 건 Korpus Gruppa Gen. Steinbauer. 게르하르트 슈타인바우어(Gerhard Steinbauer)가 지휘했다는 건데... 이게 정말 관련 자료가 찾기가 어려워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좀 의문이긴 합니다(아무리 러시아 국방부 사이트라지만). 하여간 확실한 건 날치크로의 공세가 개시되었다는 것이고, 등 뒤에 험준한 캅카스 산맥을 끼고 싸워야 했던 소련군으로서는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이었다는 거죠.
그렇게 날치크가 떨어지고 대충 배후의 적을 정리한 독일군은 블라디캅카스로 달려갑니다.
한편으로 서쪽 날개를 맡고 있던 제17군은 9월 25일에 소련군을 바다 쪽으로 몰아넣는 공세를 시작하죠. 남쪽에 조그맣게 쓰여진 독일군 측 글자는 Gruppa Lantza, 즉 후베르트 란츠(Hubert Lanz) 집단이라는 뜻인데... 오류로 보입니다. 란츠 분견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이탈리아 제8군이 박살난 이후에나 만들어지는 부대라서. 관련 지도를 찾아보니 그냥 사단 단위더군요. 다만 란츠가 이 지역에서 병사들을 지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지역 역시 대캅카스 산맥의 끝자락이라, 소련군을 밀어붙이고 나면 그런대로 소수의 병력으로 지키거나 적을 섬멸하는 것을 기대해 볼 만도 했었죠. 지금도 이 지역, 그러니까 독일군이 진격하는 그 길목은 아주 좁아터진 외길입니다.
그러나...
블라디캅카스를 코 앞에 두고 독일군의 공세는 멈추고 맙니다. 역시 공세를 취할 여력이 고갈된 것이 가장 컸고, 소련군도 이 곳에서 격렬하게 저항했던 탓이죠. s를 뒤집어 쓴 글자에 B. Cbp.라고 되어 있는 것은 키릴 문자를 영문으로 옮기면 Gv. Sbr. 즉 근위소총여단. 소총군단이고 여단이고 하여간 근위군들 줄줄이 몰려오고 소련군은 삼면에서 반격하고 길은 외길이고...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의 소련군이었다면 모를까 산전수전 다 겪은 소련군을 상대로 독일군의 공세는 결국 이 곳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독일군은 블라디캅카스 문전에서 뒤로 약간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이 상태로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하루하루가 급한 독일군에게 있어서 이는 청색 작전의 사실상 실패를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치명적인 결과였죠. 물론 이유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공세의 여력도 다 떨어가던 판이었지만 무엇보다 A집단군과 B집단군 사이의 간격이 너무 넓어져서, 설령 그로즈니를 접수해도 북쪽에서 치고 내려오는 소련군의 병력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던 거죠.
반대쪽 상황도 엇비슷했습니다. 이 지역의 철도망을 보면 Y자로 만나는 지역이 딱 한 곳 있는데, 바로 그 지점으로 독일군이 내려오자 양쪽에서 소련군이 독일군의 선봉을 끊어먹기 위한 반격을 시도한 것입니다. 작전은 멋지게 들어맞은 모양입니다.
이 지역 역시 소련군이 독일군을 밀어내면서, 독일군의 바다로의 진군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 상태가 바로 제1기갑군이 이끌어낸 최대의 결과였습니다만, 결국 독일군은 이 캅카스의 유전을 차지하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얻은 땅은 많되 정작 가장 얻어야 할 것은 전혀 얻지 못했다는 아이러니한 결과였죠. 애초에 작전이 지나칠 정도로 무리였던 것입니다.
이제 제목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예전에 제가 그로즈니라는 지명을 어디서 들었는가 하며 곰곰히 되씹어봤더니, 바로 그로즈니가 체첸의 수도였습니다. 즉 독일군이 전투를 벌인 지역은 바로 최근 - 2000년대였나요 - 러시아군이 체첸 반군과 교전을 벌였던 바로 그 지역이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이 캅카스는 자원이 풍부한 땅이라,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많은 우크라이나 인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들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불과 10년 전에 기근으로 가족을 잃었더니 이번에는 독일군의 군홧발에 삶의 터전이 짓밟혀 버리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죠.
더 큰 비극은, 이 체첸 사람들이 5만 명이 넘도록 소련군에 가담했고, 체첸 인과 사촌지간이라 할 수 있는 인구시 족(Ingush, 주로 블라디캅카스 후방지역에 삽니다) 역시 1만 2천 명 가량이 독일군과 처절하게 싸웠고 위에서 보다시피 독일군의 진격을 결국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에서는 이들을 부역자로 규정한 것입니다.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죠. 그리하여 1944년에 무려 50만 명에 달하는 체첸 인들과 인구시 인들이 억울하게 고향을 등지고 카자흐스탄 등지에 옮겨가서 살아야 했고, 60%가 넘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 전쟁 및 이주 과정에서의 관리 소홀과 가혹행위 등등 - 죽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죠? 바로 고려인들을 옮겼던 것과 같은... 물론 이 정도 죄목을 날조하지 못할 NKVD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날조한 죄목은 독일군과 협력해서 소련에 반기를 들려고 했다는 것이었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증거로 강제 이주가 합리화된 겁니다. 심지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총에 맞아서 명을 다해야 하는 비극이 곳곳에서 벌어졌습니다.
이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1956년. 이주로부터 무려 12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바로 소련 전역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날 때였던 것이죠. 그러나 한 번 고향 땅을 강제로 떠나야 했던 이들이 쉽사리 다시 돌아올 수 있을 리 만무했고, 설상가상으로 소련은 의도적으로 체첸 및 인구시 지역의 러시아화를 꾀했습니다. 러시아로부터 반기를 든 체첸 전쟁이 벌어진 것은 어쩌면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여러 모로, 큰 비극입니다. 아마도 이런 장면에서 홍범도 장군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좀 계시겠네요. 마찬가지로 체첸에서도 무려 349명의 독일군을 저격한 아부하지 이드리소프(Abukhadzhi Idrisov)라는 영웅이 있었는데, 이 사람 역시 1944년에 체첸 인들이 이주할 때 강제로 제대당하고 이주해야만 했습니다. 소련의 소수 민족 탄압은 이처럼 냉혹한 것이었죠.
이는 그루지야(현 조지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사람들 - 물론 체첸 인, 인구시 인 등 소수 민족을 상대로 - 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사실이 두 가지 있는데, 첫째로는 그루지야 사회주의 공화국 사람들 중 70만 명이 전쟁에 나가서 그 절반이 죽었는데도 소련 당국으로부터 이들이 받은 대접은 이토록 형편없었다는 것과, 둘째로는 강철의 대원수의 고향이 바로 그루지야의 고리(Gori)였다는 것... 강철의 대원수는 이처럼 자기 고향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토록 냉혹한 인물이었죠.
고향 땅을 유린하는 적을 상대로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체첸 인이 받은 대가는 부역자라는 꼬리표와 강제 이주였던 것입니다.
A집단군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여기에서 스톱하고, 이제 이야기는 시계를 약간 되돌려서 8월쯤의 B집단군 측으로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