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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5/13 23:43:13
Name par333k
Subject [일반] 그럼 상상이 많은걸 해결해 줄까?
아래의 글을 읽으신 분들은 이런 생각이 드실지도 모른다. '타인의 아픔을 공감해도, 내가 우선시 될 수 있고 그 아픔보다 내 편안함을 추구할 수 있는거지' 라고. 맞다. 실제로 인간은, 상상을 통한 공감을 한다 한들 진짜 내가 아픈것처럼 느끼지 못한다. 물론 소설이나 영화처럼 그 앞뒤에 수많은 이야기를 덧붙여 '몰입'하게 하는것은, 그것이 상상의 선을 지나 정말로 내가 감각은 느낄 수 없어도 그 감정만은 몇 배로 증폭해서 느낄 수 있게 만들기 때문에 감상의 순간에 느끼는 감동으로 상대를 더 생각하게 할 뿐이다. 실제 현실에서는 타인을 공감하면 조금 덜 할지는 몰라도, 선택지에는 대부분 '내'가 우선이 된다. 그것은 아마 생물체로서 자연스러운 영역일 것이라 추측한다.




결국 그렇다면, 우리는 나의 이득과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정한 기준, 그리고 서로 상생이 될 수 있는 기준을 요구해야한다. 그것이 아마 인류의 공통 규범으로 작용한 윤리일 것이다. 뿌리의 사상은 다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윤리는 진화되어 오면서도 기본적인 틀을 잃지 않으려 했다. '인류'로 정의되는 이상, 상대의 고통과 나의 이득의 저울추가 한쪽으로 과하게 기우는 것을 막는 것, 그리고 때때로 나를 위해 타인의 저울추를 아예 저울의 밖으로 내 던져버리지 않는것이 있을것이다. 물론, 이러한 윤리관은 시대에의해 계속해서 편의적으로 수정되어왔는데 신분제를 통해 '윤리'가 갖는 권리를 한정시키기도 했고, '명분'을 통해 윤리를 넘어서도 되는 영역을 만들어 전쟁을 벌이고, 그 뒤편에는 모두 무언가의 '이득'이 있었다. 실제로 이런 상생의 기준으로 쓸 만한 윤리관이 정립된 것은 시민사회 이후라고 볼 수 있을텐데 그렇다면 시민사회의 태동은 윤리관의 진화로 이뤄진걸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류사에 있어서 지금만큼 인간이 소중하게 다뤄진 적이 없다. 인류사에 있어서 지금만큼 인간이 높은 자리에 있던 적도 없다. 우리는 약 200년간 지난 반만년 이상의 '인류사'에 있어서 정말 급진적인- 인류사 전체로 보았을때 말도 안되는 속도로- 권리의 증진을 얻었다. 이 권리 증진을 위해 세계사적으로 수많은 일이 있었다. 아마 가장 대표적인걸로는 프랑스 시민혁명 등이 있을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이면에 있는 맥락을 보고자 한다. 세계가 시민사회로 넘어올 수 밖에 없었던, 그리고 '시민'의 권리를 증진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그것은 아마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태동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상공업자들의 진흥과 산업혁명은, 개인이 생산 가능한 부가가치의 양의 '단위'를 바꿔버렸다. 과거에 생산했던 부가가치의 양은 쥐꼬리만해 졌다. 그래서 과거의 적은 부가가치는 '왕정' '신' 등을 통해 철저하게 관리되고 소비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받쳐주는 것은 그 부가가치가 모두에게 절대 전해질 수 없음을 알기에 자신들의 권력구조를 따르는 자들에게 나눠줌으로서 얻은 '무력'과 '믿음'이었다. 근대는 바로 이러한 것들로부터의 탈피였다.



우리나라의 생산가능 부가가치가 100이라고 치자. 그런데 우리나라의 소비가능 가치는 20이라고 치면, 실제 우리나라의 시장 내에서는 80이 버려진다. 인구에 따른 소비량은 분명히 한계가 있고, 잉여생산가치들은 소비되지 않으면 '잉여'일 뿐이다. 금본위제는 결국 이런 잉여생산가치들에 대해 '무의미한 잉여'를 '금'으로 따져주어, 그 가치에 대한 믿음을 잃게 하지 않는데에 있다. '금'이 가치가 없다고 모두가 믿게된다면, 금본위제는 어떠한 힘도 발휘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근대에는 단위가 바뀌어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부가가치들이 소비될 곳이 필요했다. 처음 그들은 이러한 것과 함께 근대의 비합리적 사고를 탈피하는 것이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시민사회의 시작을 알렸을 것이다. 시민이 많아지고, 그들이 소비에 자유로워질 수록 부가가치에 대한 소비력이 증가하고, 그것은 새로운 이윤율로 다시 부를 늘린다. 그것이 자본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였다. 어째서 자유 시장경제인가. 자유로운 사람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곧 자국 내의 시민화로는 한계를 발견한다. 물론 지금처럼 현대화된 시민의 권리를 가진건 아니었지만 당시 상황으로 본다면 적어도 과거 약 20세기에 비해, 예수보다도 많은 인간을 현실에서 구원한 것이 아마 '자본과 시장경제'일 것이다. 그 만큼의 비극이 있고 그 만큼의 고통이 있었지만, 가장 큰 차이는 '어쩔 수 없었던 시대' 와 '어쩔 수 있을지도 모르는 시대'의 차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이런 전제를 생각해 본다면, 당시 제국주의의 출현은 필연적이었다. 그들은 잉여생산가치가 잉여로 남지 않게 해야했고, 더 많이 팔릴 곳을 찾아야했다. 그리고 더 싸게 생산해 줄 곳도. 파는것과 만드는 것 사이에 벌어지는 가격차이. 그 가격이 곧 '가치'이자 '이윤율'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뭐 다들 잘 아는 세계사이다. 제국주의->세계대전->세계대전->냉전->화합의시대. 제국주의와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 화합의 시대는 근대 이전의 전쟁과는 완전히 달랐다. 근대 이전의 전쟁은 이윤보다 우선시 되던게 믿음과 사상, 민족 등이었다면. 근대 이후의 전쟁은 이윤 하나를 위한 전쟁들이었다. 명분은 각기 달랐으나, 그 이면의 동력은 오로지 '이윤'때문이었다. 혹자는 소련과 미국의 냉전은 사회주의-공산주의 라인과 자유주의-자본주의 라인의 사상대결이라고 할 지 모르나, 나는 그것이야말로 철저히 이윤으로 이뤄진 싸움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공산주의의 '이상'은, 자본주의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였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부의 격차를 가져오고,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간의 간극은 준 신분제처럼 작용했다. 그것의 간극을 메꾸는 것은, 시대가 정의로워져서가 아니라 그저 그렇게 해야 전체의 부와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의 부에 장기적인 이득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소비력이 늘어나야 이윤율이 늘어난다. 간단한 이야기이다. 소비력을 늘리기 위해서는 개인의 권리를 더 보장해주고 지금 당장의 생산비용을 조금 더 감당하면 된다. 그것은 한 바퀴 돌아 다시 내 손으로 더 큰 이윤을 가지고 올 테니까. 말하자면, 시민사회의 급진적 권리증진의 이면에는 급진적인 경제성장이 있었다. 더 많은 돈이 더 많은 사람에게 가야만, 더 많은 부의 집중이 가능했던 시대였다. 즉, 이러한 자본주의의 구조는 누가봐도 '비극적'이고 '역설적'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이상은 이것을 철저하게 부수는 것이었고, 만일 공산주의가 진짜 성공한다면 누구도 자본주의를 유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 그곳은 모두 평등하고 모두 잘 사는, 모든 사람이 진짜로 자유로워 지는 이상향이었으니까. 그러나 현실은 어떨까.




나는 공산주의-사회주의가 열등해서 무너진 체제라고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사회주의의 사상은 현대에 여전히 남아 자본주의의 단점을 메꿔주고 있다. 이 체제가 무너진 가장 큰 이유는, 자본주의의 단기적인 폭발력과 그것을 유지할 힘을 준 미국의 엄청난 군수산업, 그리고 그것과 경쟁해야했던 소련에 있다고 본다. 물론 소련은 실제로 건강한 사회주의-공산주의라기 보단 전체주의에 가까운 독재국가인 시절이 더 많은, 비정상적인 연방국가였다. 또한 공산주의는, 군수산업에 힘을 쏟는다고해서 그것이 자본주의처럼 또 다른 힘으로 순환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철저히 그들을 위한 산업을 했을 때 성공하는 구조다. 그러나, 군수물자는 시민에게 아무런 활력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다르다. 군수산업의 부는 다른 산업으로 이동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큰 힘이었고, 두 국가의 냉전은 서로의 생산여력을 소비시켰다. 그리고 구조적으로, 소련은 생산여력이 줄어들고 미국은 단기적으로 늘어나면서 결국 소련의 부실화로 인해 냉전이 붕괴된 것이다. 소련은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싸움에 필요한 생산동력이 그들에게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군수경쟁이 체제열등 이면에 숨겨진 큰 원인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 원인들에는 독재도 있을것이고 지리/환경적 요인도 있을테지만.




어쨌거나 이렇게 길게 자본주의와 근현대에 대해 경제사적으로 이야기 한 이유는, 바로 현대의 윤리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윤리는 곧 시민권리의 기준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윤리가 가장 힘을 잃어가는 시대가 바로 포스트 모던시대다. 가장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시기이자 가장 시민이 큰 권리를 지닌 시대말이다. 나는 이것이 '노동의 부가가치'와 큰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냉전을 지나 거대한 힘을 발휘하며 독주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로 인해 얻었던 장점들은, '자유주의 무역'을 통해 되살아났다. 과거에는 일방적인 강요였다면, 지금은 부를 나눌 기회를 주며 만들어낸 강요와 비슷한 협업이었다. 자유주의 무역을 통해 앞서나간 자본주의 국가들은 더 많은 소비를 얻을 수 있었고 더 많은 생산의 기회를 동시에 얻었다. 세계가 부유해 질 수록, 그들의 노동과 기술은 더 큰 이윤을 가져오는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곧 한계에 봉착하게된다. 이윤율은 계속해서 둔화되기때문이다.


이윤율이 계속해서 둔화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생산의 속도를 소비가 못 따라 가는점.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가 한정적이라는 점. 더 큰 이윤을 얻을수록 소비동력이 둔화된다는 점. 인구는 한정적이라는 점. 새로운 시장에서 이윤을 얻을때까지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 점점 어려워 진다는 점 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이윤율은 둔화되고, 기술은 이 이윤율을 극복하기 위해 단위당 부가가치 생산을 늘리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자동화가 진행되고, 생산 비용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동자의 높은 임금이 재조명되기 시작한다.



과거 노동자의 대우가 계속 좋아졌던 이유에는 양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정말 돈이 많아지는게 선순환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함께 발달한 시민권리의 의식이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켰기 때문에. 그러나 현대에 와서 노동자들의 돈이 많아지는게 선순환인가 하는 것에 주장이 양립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을 표면으로 내세우는 자들은 없었으나, 이것은 곧 '더더욱 자유로운 거래를 통해 더 큰 이윤율 폭발로 시스템을 유지한다'와, '더 이상의 이윤율 폭발은 어려우니 지금까지 발달시킨 권리,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살아가는 시민들과 평등한 공존을 목표로한다'로 나뉘는 것이었다. 전자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우고, 후자는 수정자본주의 속에서 사회주의에 가까운 것을 말한다.



신자유주의는 제국주의와 크게 닮아있다. 그들은 결국 신자유주의를통해 자신들이 만드는 부가가치에 걸맞는 소비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구는 한정적이고, 더 이상 비용을 감당하는 것이 쉬운 시대가 아니게 되었다. 이윤율은 지속되어 둔화되었고 과거처럼 다음의 이윤율을 보장받는 시대가 아니게 되었다. 석유는 줄고, 경기는 경색되어간다. 위에서 말한 100의 생산과 20의 소비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자유주의 무역이 힘을 얻는 시대는, 100을 생산했을때 국내에서 20을 팔고 해외에서 80을 판 뒤 120을 생산하면 그 힘이 국내에서 30을 팔고 해외에서 90을 팔게 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그게 불가능해졌다. 국내에서는 1만을 생산하는데, 국내의 소비는 800쯤에서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다. 더 많은 무역시장이 필요했다. 그러나 앞서말했듯 원자재는 한계가 있고 산업화에는 초기비용이 크게 들어간다. 다행히 중국이 개발되면서, 새로운 시장을 얻은 셈이긴 하지만.. 중국은 완전한 자유주의 무역이 가능한 나라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되면서, 기존 부를 축적한 사람들 및 권력을 가진 '시대의 주류'가 옳은 방향쪽으로 자연스레 움직이게 했던 것. 그들의 이윤이 시민의 이익과 부합했던 시대는 사라졌다. 그들은 팔 곳이 줄었기에 더 작은 비용을 주목하고 더 큰 소비대신 '우리것만의 소비'를 노리기 시작했다. 시장의 전체적인 판을 키우기는 먼저들어가는 쪽의 리스크가 컸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빠른속도로 증진시켜나가는 권리에 제동을 걸게 되었다. '노동자에게 돈을 더 들인다면, 이윤율은 더 떨어진다.' 현대 시민권리의 가장 큰 핵심은 '노동자와 사유재산'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시민권리를 지탱하고 시민의 지위를 떠받치는 힘이 이것이다. 이것이 시민 개인의 자유로운 권리에서 태어난다면, 그리고 그들이 공정하고 평등에 가까운 곳에서 활력을 얻을 수 있기하기 위한 의식의 발효와, 그것이 이제는 더 이상 이해관계에 부합하지 않는 자본의 관계는 서로 엇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조에서부터, 우리는 자연스레 욕망의 긍정과 자본에 의해 윤리를 점점 대체하게 된다. 시스템의 주류에 있는 것은 의식,지식이 아니라 욕망과 믿음의 힘을 가진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윤리보다 우리의 이익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도록 시스템이 바뀌어가는 것을 알고 있을까?  결국 윤리는 경제발전에 의해 함께 권리를 증진시켰고, 경제발전의 주춤함과 함께 다시 욕망에게 밀려 뒤편으로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자본가의 입맛에 맞춰서, 혹은 시대의 주류의 입맛에 맞춰서. 즉, 윤리관은 기존 윤리관의 힘에 의해 발달한 것으로만 생각하기는 어렵다. 현대에 윤리관이 무너지는 이유는, 그것이 자본주의의 힘에 의해 빠르게 가속받아 발달한 가치관이며 자본주의의 주류를 이룬 사람들이 더 이상 공공의 선이 '이득'보다 '손해'쪽으로 기운다고 생각하는 지점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상상하는 것이 하나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고, 우리는 타인을 상상을 통해 공감하고,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서로를 완전한 남에서 가까운 우리로 만들었지만 정작 내 안에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통보다 조금 더 저울추가 내 이득으로 기울게 하는 것이 '당연한'것임을 생각한다. 즉, 기껏 급진적으로 발달시켜온 '상생의 기준'이 된 윤리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바로 '돈'의 힘이 있다.



그런데, 돈은 사실 무가치한 물질이다. 돈은 '믿음'으로 이뤄져있을 뿐이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결국 우리는 어떠한 믿음의 기류에 휩쓸리고 있다. 이것에 대해 어떤 근본적 해답을 내놓을 수는 없을것이다. 그것은 이미 믿음으로 절대로서 완성되어버렸기 때문에 흠집이 나지 않게 되어버렸다. 우리는 상대의 고통을 이해하고, 상대의 고통을 나와 동등하게 받아들이며 상대를 나와 동일하게 배려하는 것의 받침이 되는 기준이 '윤리'임을 안다. 그러나 '윤리'는 죽었다. 우리가 점점 더 '자연스러운 동물'에서 멀어지며 '의식적인 인간'으로 나아가게 한 윤리관은 이제 구시대의 것이 되었다. 우리는 다시 근대보다 발달한, 그러나 방향을 잃은 시민의 자리에 서있다. 우리는 과연 의식과 지식으로 무장하여 시대를 나아가는가, 아니면 욕망과 자본의 물결에 휩쓸려 각자의 위치를 받아들여가는가. '공감'으로도, '배려'로도, '제도'로도. 이 흐름과 흐름에 쌓인 수많은 욕망에 대해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정말로 시민사회의 발달과 더 나은 사회로의 상생은 '의식'의 발달인가 '욕망'과 의 이해관계의 타결인가.




상생의 기준이 되어줄 윤리가 죽었다고 했다. 제도는 불완전하다고 했다. 우리는 유사이래 '그래도' 가장 인간적으로 살고있다. 지구상에서 이정도의 숫자가 이 정도의 행복을 누린 시대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고작 200년동안 급진적으로 변했고 시대는 다시 그 급진성의 방향을 돌리고 있다. 우리는 또 다른 갈등과 변화의 중심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상생의 답은 우리가 내는 것일까, 자본이 내는 것일까? 모든 원인을 경제에 돌릴수는 없지만, 아주 강력한 동인으로써 작용한다는 이 가설이 맞다면. 언젠가 지구단위의 부가가치와 소비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시대는 어떤 흐름을 맞이할까? 그 때에는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상이 남겨져 있을까? 모르겠다. 그러나, 죽었다고 여겨진 구시대의 윤리를 작동시키는 사람이 많을 수록. 그리고 그것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상대를 이해하려 애쓰는 사람이 많아질 수록. 비극이 오는 시기를 늦출 수 있지는 않을까. 완벽한 상생도, 완벽한 자유의지도 얻지 못할 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원하는 대로 인도하는 욕망과 싸워볼 기회를 가질 수 있는게 아닐까?




*본문에서 사용된 윤리는 과거의 각종 악습 및 폐습을 포함한 사전적의미의 윤리가 아닌,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가장 현대화된 평등과 자유,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보장한 '선의'에 중심을 맞춘 윤리를 뜻합니다. 인종,성,불평등이 함께 공존하던 윤리가 아닙니다.

*본문은 경제발달과 산업화에 초점을 맞추어 시민권리와 윤리의 변화를 바라보고자 했습니다. 학문적 엄격함을 맞추지 않은 가설이기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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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kSide
13/05/13 23:45
수정 아이콘
그래도 인간은 발전하면서 나아가는 동물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먼 미래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나아질 거라는 예상을 해봅니다 .... 만 ...
일단 현재로서는 조금은 회의적이기는 합니다 ... ( 물론 제 자신이 염세주의자라는 사실도 고려해야 하는 사항이지만 ;; )

사실 진보라는 게 다른 게 아니라, 進 ( 나아갈 진 ) + 步 ( 걸음 보 ), 즉 걸음을 앞으로 걸어가면서 이전보다 나아지는 것이거든요 ...
이걸 사전적 정의로 조금 더 유식하게 표현하자면 "인류 역사의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서 사회 변화나 발전을 추구하는 것" 이겠지만 ...

이번 글도 추천 하나 드리고 갑니다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절름발이이리
13/05/13 23:55
수정 아이콘
아마 별 도움이 안될겁니다.
엘에스디
13/05/14 00:42
수정 아이콘
과거의 윤리가 상상력을 촉발하는 것도, 상상력이 이상적인 윤리를 만들어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욕망을 억제하는 기재가 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요.
개인의 윤리, 개인의 상상력은 그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덕목일 뿐입니다. 그것이 제도를 만들어내고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될 수 있을까요?
13/05/1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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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그것이 없었다면 제도,사회 자체의 성립이 없었겠지만.... 윤리와 상상력의 관계를 제가 쓴 것과는 다르게 쓰신 것 같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리그오브레전드
13/05/14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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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강줄기와 같아서 한번 흐름이 시작되면 쉽사리 돌려놓기가 쉽지 않죠.
윤리의 가치는 약해졌고 이를 다시 돌려놓기에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있습니다. 곧 기존의 윤리가 아닌 신 윤리가 탄생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전주가 시작되고 있는 중일수도 있고요.

첫 번째 글은 다 읽고 나서도 이게 무슨 말인가...했는데 시리즈였군요. 요새는 어지간하면 다 3부작으로 내놓던데 3편도 있나요?
13/05/1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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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은 아니지만 이런 글을 쓰게 된 책을 소개하는 글과는 관련이 조금 있습니다.
13/05/14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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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고민의 깊이가 느껴지는, 많은 영감을 주는 글이군요.
13/05/1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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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순환구조가 자본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본가들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근시안적 시야를 바탕으로 사고하며 개별적 의사를 가지고있기 때문의 역사의흐름을 만들어낼수는 없습니다. 산업화과정에서 일어난 노동자들 복지향상은 기업가들의 개별적 선택보다 정부에 의한 정치적선택이었으며 이에는 윤리학등의 동인이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글쓴분과는 달리 애초에 집단군중에 의한 윤리는 존재하지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혁명이던 자본주의의 선순환이던 그 이면에 철학적 사유가 뒷받침되있던게 사실이나 집단군중에게 직접 길을 제시하는게 아닌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흡수된 뒤 개인의 욕망을 자극하는 형식으로 바꾸어 제시되었습니다. 스스로의 체계를 허물고 무지의 탈을 쓴 이후에야 비로소 군중에게 녹아내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패배한 가장 큰이유 인간의 윤리적합리성을 가정했기때문이며 그 태생적 결함때문에 전제주의로 흐를수 밖에 없었던것같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측에서 인간은 한계를 보였습니다.

이제는 인간의 윤리적 불평등을 인정하고 민주주의를 모든가능성의 시작이 아닌 엘리트에 의해 발생될지 모르는 억압을 규제하는 족쇄정도로 여기는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윤리가 바로서길 기대하지말고 니체가 말했던것처럼 민주주의에 적합한 가면을 쓰고 윤리를 욕망으로 변주시켜 제공함으로써 정치에서의 보이지않는손이 작용하도록 힘쓰는게 윤리의 힘을 믿는사람들의 유일한 사회발전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절름발이이리
13/05/1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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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군요.
보고픈
13/05/14 15:42
수정 아이콘
전체적으로 공감합니다.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자본가의 선택으로 볼 수는 없고 정부의 정치적 선택과 노동자의 주체적 요구가 강제해 낸 결과라고 봐야겠죠.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패배한 이유는 너무 여러가지가 복합되어서...
인간의 윤리적 합리성을 가정한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잘못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이유였다라고 하기도 조금 애매합니다. 사회주의 이론의 주요한 결함이라고 보긴 합니다만 실재했던 사회주의 실험에서 가장 큰 오류는 경제체제로서의 사회주의와 정치체제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동일시 한 것이 가장 치명적인 오류가 아닌가 싶습니다.
13/05/14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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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실은... 아프리카에서 아이들이 15초마다 한명씩 죽어가건 말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사람은 자기 자신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개개인의 욕망을 자연 상태 그대로 놔뒀다가는 집단 자체가 위태로와진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기에,
고대사회에서는 계급과 종교로, 이후에는 철학과 도덕과 법으로 사람들의 욕망을 억제하고 있을 뿐이죠.
설탕가루인형형
13/05/14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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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쓰신건가요?
정독해보니 정말 훌륭한 글이네요.
하지만 제대로된 댓글을 쓸 만큼 머리가 돌아가지 않네요.OTL
잘 봤습니다~
13/05/1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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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이 담긴 글 잘 읽었습니다. 몇가지 이야기를 하자면 글쓴이가 서술하신 자본주의와 윤리를 바라본 관점은 마르크스의 그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생산기술의 발달로 인해 촉발 된 생산관계의 변화가 사회적 구조를 결정한다는 논리와 구조적으로 같아 보이거든요. 사실 저러한 유물사관으로 사회를 분석하는 것은 이제는 너무나 일반적인 역사 서술 방식 중 하나죠. 대부분의 시대 구분 방법부터 우선 그가 중시한 생산 관계의 변천을 중점적으로 보고 있으니까요. 문제는 이런 분석 방밥으로 접근하면 애초에 '윤리'라는 것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자본주의 이후 시기에만 국한 해서 윤리가 죽은게 아니라 애초에 윤리의 탄생 자체가 자본주의 이후의 윤리와 별반 차이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자본주의 이후의 인권을 비롯한 노동자의 권리 신장이 생산구조로 기인한 것이라면 그 이전의 사회가 그렇지 않으란 법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자본주의 이후의 윤리에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노예제를 옹호하고 공자의 사상이 신분제를 옹호했다는 시각으로 접근해야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글 자체의 논거가 생산구조를 바탕으로 윤리를 이끌어내고 있으니까요.


사실 데이비드 흄이 이원론으로 출발하는 서양의 인식론 철학을 한계까지 끌고 갔을 때 윤리는 철학적으로 해체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을 거치고 구조주의 후기 구조조의를 거치면서 그 작업은 완성되었고 이제는 누구도 절대불변의 가치로서의 윤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실 윤리를 가장 앞장서서 해체한것도 글쓴이가 써주신 부분을 폭로하고 싶었던 철학자들이죠. 위에 마르크스도 그 중 하나일 것이구요.


그리고 이건 작은 태클이지만 소비를 중심으로 경제를 바라보는 것은 케인즈 이후의 경제학자들이 시작입니다. 그 전에는 생산량이 절대적 기준이었죠. 만들면 다 팔린다는 세이의 법칙이 지켜지던 시대였으니까요. 물론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때문에 식민지를 개척한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엔 공급 = 소비가 맞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맞는 서술이지만 경제학 내에서 이 둘의 구분은 자신이 어떤 학파의 입장을 취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좀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요. 가령 신 자유주의가 사상적으로 기반하고 있는 새 고전학파의 경우 실물 경기변동이론을 쓰는데 이는 소비보다는 기술력과 요소공급을 바탕으로 경기변동을 설명하면서 총수요의 영향을 낮게 평가하니까요.
13/05/14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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