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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5/13 15:11
의미있는 글이네요
제도주의 구조주의가 직면하게되는 한계에 대해 참신하게 상상하신듯 합니다 :) 제 전공쪽에서는 구조에 대한 회의로 신고전 블라블라 가 나왔지요 제도의 미완비 비포괄성 못지않게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의구심 또한 커지니 불확실성을 줄이고 상쇄하는 보완 정도로
13/05/13 15:31
한편으로는 '타인에 대해 상상할줄 알고, 스스로 변화하고, 비겁하지 않으려하고, 책임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주장하는 '제도의 개선'이야말로 다수의 공감을 얻을 수 있겠지요.
13/05/13 15:55
의외로 현실에서는 저런 사람이 외면당하는 경우가 더 많은거 같아요. 불편하거든요. 내가 피하고싶은 것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13/05/13 15:59
제도적 개선에 대해서 다시금 주의 깊게 심사 숙고하고 깊게 생각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좋은 글입니다. 추천 하나 드리고 갑니다.
13/05/13 18:11
저도 무슨말인지 모르겠다고 하고 싶은데,
살짝 애매하게 써놨음에도 감정이입이 팍팍 가는 글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한 때 그 상상을 의도적으로 제재하지 않으려 노력하다 꽤나 내면의 괴로움을 맛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본문과 같은 맥락은 아니었지만요. (본문은 '공감'에 치우쳐있다고 이해합니다) 상상을 피하는 일들은 어쩌면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둔 방어벽일 지도 모르죠.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이 어쩌면 그 개인으로써는 가장 행복한 사람일지도요..
13/05/13 20:32
공자나 예수님이나 돈키호테가 실제로 바꾼 건 거의 없지요. 저는 그 비겁한 사람들이 일상을 바꿔 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적고 나서 다시 댓글을 보니 왠지 비겁한 변명 같네요. 흐흐
13/05/13 21:30
바꿔나간 사람들은 비겁하지 않았어요. 비겁하지 않으려 한 사람들이 바꿨지. 비겁한사람들은 시대의 변화에 순응했고 역사의 과정이 변했을뿐이라고 생각해요. 조타의 방향을 바꾼건 그들이 아니라고봐요. 물론 비겁함이 용감함과 양분될수없고, 시대의 요구에따라 필요한 용기가 적어지고 리스크가 줄수록 많은사람들이 용기있는 대열에 합류했지만요.
13/05/13 21:50
물론 말씀하신 내용처럼 모든 사람이 그러하지는 않았겠지만 저는 각종 기술의 발전을 생각했습니다. 크게 보면 불, 바퀴, 화약, 종이, 인쇄기술, 상하수도, 증기 기관, 전기, 통신, 화학 비료, 백신, 비아그라 같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겠네요. 그러니까 이러한 것들이 기존의 제도와 어우러져 사람들의 일상을 서서히 바꿔나간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것을 보수로 본다면 par333k님이 말씀하신 내용이 진보가 될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모든 사람이 진보를 지향할 필요는 없지 않나 합니다.
13/05/13 22:47
기술의 발전은 비겁함의 여부와는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의 발전은 되려 끊임없이 더 나은것을 추구하려는 인간이 가진 의지가 크게 작용했을 뿐, 그것이 용기와 비겁함의 영역에서 다뤄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되려 그 기술이 시대가 원치 않았음에도 증명된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용기있게 발표하며 탄압을 견디어 낸 사람들이야 말로 용기있는 분들이었겠죠. 그런데, 이런 것들이 보수와 진보로 갈릴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건 인류 공통이 지닌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13/05/13 23:27
말씀하신 내용처럼 <비겁함 여부와는 상관없는, 그리고 끊임없이 더 나은것을 추구하려는 인간이 가진 의지>가 비겁한 사람에게도 있기에 그 안에서 일상을 바꿔 나가는데 조금이나마 일조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잠깐 숨을 고르면서 기다리는 순간도 있어야 한다고 보고요. 물론 par333k님이 생각하시는 기준에서 본다면 마음에 안들테지만, 그래서 위에서도 비겁한 변명 같다고 적었고, 소위 비겁한 사람도 인류로서의 역할은 나름대로 하고 있으니 그럭저럭 살아갈 가치는 있지 않은가 합니다.
13/05/13 23:59
비겁함의 여부와 상관이 없다는 뜻은, 그것이 '비겁한 사람에게는 없다 있다'의 지점 자체가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말씀하시는 내용의 중심의미는 이해했습니다만, '비겁함'에 대해 서로 의미를 다르게 두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비겁함'이란 방관자로써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 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지, 변화할 용기에 대한 비겁함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무감각한 방관자'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변하는 것 또한 변화의 용기이기는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이 기준은 '비겁하지 않은 지점'에서의 변화에 대한 태도(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아니라, 이미 있어서는 안되는 지점 (왕따, 제노사이드 부당해고 등등)에서의 방관자로서 남아있는 '비겁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설명으로 대화의 간극이 좁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말씀하신 부분은 본문의 주제와는 별개로 다시한번 잘 읽었습니다.
13/05/14 19:42
일단 저는 시스템에서 약자가 형성된 경우로 <노예, 노동자, 여성, 외국인, 장애인 등>을 떠올렸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직접 이를 해결하는 방안은 되지 못하겠지만, 차선으로 시스템 자체의 힘을 키워 간접적으로 이러한 사람을 도우는데 일조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개인의 힘에는 한계가 있기에 결국에는 (형평성에 문제가 있겠지만) 시스템의 힘이 발전하는 것에 기대는 방법외에 별다른 수가 딱히 있나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중간 단계는 개인이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기본적으로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초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한가지 방향이겠으나 여태까지 인류의 역사나 사람의 본성을 비추어 보건대 아무래도 힘들지 않나 싶고요. 개인적으로는 불가능이라 봅니다. 하지만 지엽적인 측면에서 본문의 견지는 저도 동의하며 그렇게 세상이 흘러갔으면 하는 마음은 언제나 있습니다. 다만, 저는 천성이 비겁한 사람이라서, 노력은 해야겠지요. 하여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13/05/14 01:31
결국 문제의 해결은 끊임없이 보완되는 제도와 상상(생각)하고 행동하는 개인, 두 요소가 공존할 때 가장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겠네요. 뜬금없지만 저는 학교에서 인문학 수업을 강조하는 것이 이런 개인의 상상력의 극대화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가령 영화 일포스티노에서는 마리오라는 주인공이 파를로 네루다를 통해 문학을 접하고 삶과 사랑에 대해 깨달아가게 되면서, 먹고 사는 것 외에 내가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많은 지점에 대해 알아가게 되지요. 단순히 물질적이고 나 자신에 국한된 삶의 문제에서 벗어나 타인을 느끼고, 감정이입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있어 문학수업이 많은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요즘은 그런 수업을 받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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