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색 전투의 승리와 경포를 회유하면서, 유방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시간' 을 벌었습니다. 그 유명한 나폴레옹이 일찍이 말하기를,
"전략은 시간과 공간을 활용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공간보다 시간이 더욱 중요하다. 공간은 되찾을 수 있지만, 시간은 결코 그렇지 않다."
라고 한 바 있는데, 이때의 전쟁에서도 시간이란 중요한 의미를 가져, 항우와 유방의 전쟁 판도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BC 205년 5월부터 그 해가 끝날 무렵까지 시간을 얻은 유방은 전방 수비라인인 형양의 방어를 강화하고, 용도를 통한 오창으로의 보급로를 확보하고, 근처의 반란군을 진압하는 등 분주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일단 대략적인 일을 끝내며 겨우 운신의 폭을 마련한 유방은 이후의 전략적인 움직임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왼쪽 끝의 남정이 유방이 항우에 의해 분봉된 이후 처음 출발하기 시작한 곳. 동쪽 끝인 팽성이 항우의 본거지. 위왕 위표가 유방을 배신하고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 '안읍' 이고, 한군과 초군은 중간 부분인 형양, 성고 부근에서 대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최전방의 일을 지시해 놓은 유방은 짬을 내서 직접 후방으로 이동했습니다. 유방이 이동한 곳은 지도에 보이는 역양(櫟陽)이라는 곳으로, 이 곳은 장안과 지척 입니다. 말하자면 관중에서 동쪽으로 나오는 전방 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양과 성고의 최전선 기지라면, 역양은 후방 총사령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역양에 도착한 유방은 여섯 살 짜리 아들 유영(劉盈)을 태자로 삼고, 대사면령을 내려 죄수를 석방하면서 흔들린 세력의 위신과 민심을 수습했습니다. 기록에서는 언급이 없지만, 아마도 이 대사면령은 죄수를 병사로 징발하기 위한 의도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당시 관중의 상황은 일전에 언급했다시피 대기근으로 인해 백성들을 촉 땅으로 이주시켜 밥을 먹게 했을 정도였고, 형양으로 보내는 소하의 지원군도 어린이나 노약자가 잔뜩 포함 되었을 정도이니 인력난이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죄수를 사면해주는 대신 병사로 징발하면 부족하나마 병력을 충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전례가 없는것도 아니구요. 불과 몇년전, 진나라 최후의 희망이었던 장군 장한이 죄수를 징발해 병사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한 적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얄궃게도, 바로 그 장한이 유방의 다음 목표 였습니다. 유방은 옹왕 장한이 아직도 세력을 가지고 버티고 있는 폐구(废丘)로 진군했습니다.
맨 오른쪽의 괴리현이 폐구 입니다.
일찌기 유방이 한신을 얻은 뒤 고도를 통해 북벌했을때, 옹왕 장한은 진창에 나아가 한군과 야전을 펼쳤지만 대패했고, 이후 호치라는 곳에서 또다시 전투를 펼쳤는데 또 패배했습니다. 그러자 장한은 더 멀리 동쪽으로 도망쳐, 폐구라는 곳에 틀어박혀 농성전을 펼쳤습니다. 유방은 폐구에서 장한을 포위하긴 했지만, 폐구성의 방비가 상당했던지 쉽게 함락시키진 못했고, 당시 상황상 항우가 제나라에 있을때 최대한 빨리 동진해야 했기에 아예 장한을 내버려 두고 동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어차피 당시 유방의 세력은 대단히 강성했고, 두 번이나 대패하고 틀어박힌 장한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때가 BC 206년 8월이었고, 유방이 팽성에서 패배한 후 세력을 정비해 역양에 돌아왔을때 BC 205년 6월이었습니다. 즉 장한은 10개월 가까이 후방인 폐구에서 버티고 있었던 셈입니다.
한참 유방의 세력이 강성할때야 폐구의 장한은 별 대수로울 게 없는 패잔병 무리에 불과했지만, 상황이 동서전쟁 및 장기전 양상으로 변하면서 문제가 좀 달라지게 됩니다. 싸움이 장기전이 됨에 따라서 유방은 최후방인 파-촉의 물자까지 끌어오면서 싸움을 해야 했는데, 장한이 역양에 틀어박혀 있으면 대단히 신경쓰일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미 위표가 배신해 후방에 제2 전선이 형성된 상황에서, 장한까지 여기에 합세한다면 삼중전선의 가능성까지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 폐구 공성전에는 한왕 유방이 직접 총사령관으로 전두 지휘를 했고, 주발이나 번쾌 등의 장군들도 모두 합류해서 공격에 나섰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폐구를 함락 시키는 것이 쉬운 일이었다면 10개월 전에 이미 함락을 시켰을 겁니다. 장한군의 저력이 아직 남아 있었는지, 폐구가 그만큼 견고한 성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끈덕지게 버티는 장한을 쉽사리 물리칠 수 없을 듯하자 한나라 군은 기묘한 작전을 시행 합니다.
폐구 남쪽으로는 위수(渭水)가 흐르고 있습니다. 폐구는 현재의 싱핑(兴平) 시 인데, 당시의 폐구와 현재 싱핑시 중심지가 정확히 동일한 위치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아무튼 논밭을 지나 현재 싱핑시 도심 중심부까지의 위수에서의 거리는 5km 남짓에 불과합니다. 그 옛날이라면 강쪽으로 붙으면 붙었지, 더 멀리 갈 일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유방은 수공(水攻) 작전을 펼쳐, 병사를 시켜 위수의 물줄기를 끌고 와서 폐구를 아예 물바다로 만들어 수몰시켜 버렸습니다. 여러 장수들의 열전에서 폐구 전투에 참여한 기록이 나오긴 하지만, 딱히 이 작전을 입안했다는 기록이 있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창업자에 대한 공적 밀어주기라는 의심을 지운다면 폐구 수공 작전은 유방이 추진한 작전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총사령관이 유방이었으니 본인의 공적임에야 분명하고....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어버린 폐구 성 내의 사람은 전투를 포기하고 '항복' 했고, 이에 장한은 자결했습니다. 생각해보면 한신이 유방에게 지적한 바 있듯, 옛 진나라의 백성들이 신안대학살에서 20만 대군이 죽었음에도 자기들만 살아온 장한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기에, 이 항복은 어쩌면 장한의 의지와는 별개로 성 내 사람들이 알아서 성문을 열어주고 항복한 것이고, 수몰도 수몰이지만 본인의 통제력이 완전히 끊나버리게 된 것을 본 장한이 이때문에 자살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장한을 죽이고 폐구를 함락하면서 한숨을 덜었지만, 아직 처리해야할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어머니 병문안을 간다고 구라를 치고 도망가 오히려 이쪽을 적대하고 있는 위표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부터가, 그 유명한 전설의 사령관 한신이 별도로 한 전역을 맡아 담당하는 시발점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8월 무렵, 유방은 역이기를 보내 외교로 위표를 회유하는 동시에 상대의 정보를 수집했고, 외교가 파탄나자 한신과 조참에게 군사를 맡겨 위표의 본거지, '안읍' 을 향해 진군합니다. 이에 위표는 한나라군이 건너올 하수(河水) 강가 너머 포판이라는 곳에 수비를 잔뜩 강화해 우주방어 태세를 취하게 됩니다.
이에 한신은 하수를 넘어 포판으로 진군하려는 것처럼 기만적인 기동을 펼치고는, 실제로는 더 북방에 있는 하양(夏陽)으로 이동하여 강을 건너 비어있는 안읍으로 냅다 달려갔습니다. 이에 경악한 위표는 급히 회군했지만, 적의 기만책에 당한 만큼 아무래도 정신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위표가 뒤늦게서야 한신의 우회 기동을 눈치채 만큼 하수 강가 너머에는 아직 남아서 허장성세를 보이고 있던 한나라군이 있었을텐데, 명확하진 않으나 저의 추측으로는 이 부대는 '조참' 아 이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참은 포판의 위나라군 주력이 위표를 따라 빠져나가 적의 수비가 약화되고,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하고 있는 틈을 타 그대로 동진을 개시, 손속(孫遫), 왕양(王襄) 등의 위표의 부장들을 무찌르고 안읍으로 진군했던 것 같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고 치면, 위표는 적의 우회 기동에 놀랐는데 조참의 진군에 또 놀라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무너진 셈이 됩니다. 결국 위표는 어이없이 포로가 되었고, 유방은 무슨 생각이었는지 한번 배반한 위표를 용서하고 형양으로 보내 항우와 싸우는 장수 중 한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한신의 이 안읍 전투(安邑之戰)로 유방은 위표를 무찌를 수 있었는데, 이 전투는 한나라에 있어서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이 글의 맨 위쪽에 있는 지도를 다시 한번 올려서 보시면 알 수 있지만, 위표가 주둔하고 있는 '안읍' 이라는 지역의 위치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읍을 수도라 하는 위표의 국가 위나라는, 한군의 최전방 기지인 형양-성고와 한군의 후방 기지인 역양의 중간 부근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위표가 마음 먹으면 하수를 건너 관중을 칠 수도 있고, 형양 쪽으로 이동해 초나라와 더불어 한군을 샌드위치 신세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이미 전방의 항우라는 자연재해급 상대만으로도 벅찬 유방에게 있어선 정말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겁니다.
뒤통수가 서늘했던 유방은 장한에 이어 위표까지 날려버리며 이제서야 후방을 완전히 평온하게 정리할 수 있었고, 전쟁 내내 전방의 항우에게만 신경을 쓸 여력이 생겼습니다. 맞상대 였던 항우가 전쟁 내내 전방의 유방을 상대하다가도 후방에서 활개치는 팽월 때문에 괴로움을 겪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점이 양군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인 요소였다고 해도 좋을 정도 입니다.
여기까지가 본래 유방이 한신을 파견하며 생각했던 그림이라면, 이후의 상황은 계획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위표를 물리치고 위나라를 장악하여, 북방으로 가는 길을 연 한신은 사람을 보내 유방에게 이렇게 청했던 겁니다.
"원컨대 3만 병사를 더해주시면, 신이 북으로 연(燕)‧조를 잡고, 동으로 제를 치고, 남으로는 초의 보급로를 끊은 후, 서쪽에서 대왕과 형양에서 만나기를 청합니다."(願益兵三萬人,臣請以北舉燕、趙,東擊齊,南絕楚之糧道,西與大王會於滎陽.)
이후 한신이 보여준 눈부신 공적, 그리고 유방이 그 덕택을 봤다(특히 두차례에 걸쳐 한신의 군대를 빼왔다는) 인상 때문에 그다지 주의깊게 보지 않게 되는 부분이긴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때 한신의 제안은 유방으로서는 쉽사리 승낙하기 어려운 작전 안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팽성에서 56만 대군이 괴멸 당한 것이 몇개월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비록 항우의 주력군이 대대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지는 않다고 하지만, 전방의 형양 성에 있는 오창으로의 보급 용도는 끊임없이 노략질을 당하며 근근히 버티고 있었을 뿐입니다. 관중에는 대기근이 들어 백성을 이주시켜야만 했습니다. 전방으로 보낼 병사가 없어, 노약자와 어린이까지 전장에 보내며 죄를 지은 죄수을 사면해 병력을 충원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장한이나 위표 등 제2 전선을 형성하는 적과 싸우다, 이제야 겨우 이들을 모두 소탕하고 항우와의 일대일 구도를 만든 시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또다른 전선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전방의 상대인 항우만으로도, 유방이 가진 모든 전력을 총동원해 맞상대를 해도 이기기는 커녕 버티기조차 어려운 상대임에도 말입니다.
하지만 유방은 이 작전을 승낙했고, 3만 군사와 상산왕 장이를 부장으로 파견해 한신의 손에 맡겨 북방으로 이동케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이 전쟁의 향방을 완전히 바꾸게 됩니다. 한신의 북벌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대부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때뿐만이 아니라, 나중에 언급하게 되겠지만 유방은 항우라는 압도적인 적을 상대로, 모든 주력을 한 곳에 집중 시키는 대신 과감하게 분산하는 방식으로 대응 했습니다. 여러 곳에서 싸우는 다른 인물들의 도움을 받아 버텼다는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오히려 가장 최전선에서 적의 주력과 버티는 유방이 거기서 또 제 세력을 쪼개 다른 곳을 지원하는 식이었습니다. 유방의 이런 판단은 첫번째로 한신의 북벌을 낳았고, 두번째로는 이 전쟁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만든 기습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는 좀 더 이후에 언급할 일이 있을 겁니다.
아무튼 유방은 겨우 얻은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재빠르게 후방을 안정화 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없는 살림을 쪼개 3만 군사를 한신에게 쥐어주고 북방으로 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패왕이 동쪽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