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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7/06 01:42:50
Name 위버멘쉬
Subject [일반] 서점중독
최근에 서점에 중독된 것 같다. 책에 중독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책에 중독된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서점에 가는 것에 중독되었다. 이상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퇴근 시간이나 주말에 여가가 나면 너무 자연스럽게 서점을 찾게 된다. 종일 피곤함에 쩔어 있다가 서점 입구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 죽어있던 육신이 깨어나는 기분이 든다. 코를 찌르는 특유의 방향제 냄새도 너무 좋다. 오렌지빛이 섞인 은은한 조명 아래 오와 열을 맞춰 절도있게 정리된 책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막 정화된다.

입장과 동시에 신간 매대 위주로 빠르게 한 바퀴 휙 돌아본다. 정수기에서 물 한잔 시원하게 들이키고 빈자리 찾아 어슬렁거린다. 잠시 앉아 다리의 피로를 풀면서 사람 구경을 한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 비율이 생각보다 높다는 것, 남자보다 여성분들이 더 많다는 것. 최근에 느낀 점이다. 운이 좋은 날이면 예쁜 여자분들도 많이 본다. 미녀는 기분을 좋게 만드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 흰색과 분홍색이 잘 어울리고 다람쥐같이 생긴 여자분이라면 금상첨화다. 오늘 꼼데가르송 반소매 티에 핑크색 테니스 스커트를 입은 엄청 귀엽게 생긴 여자분을 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응?)

암튼…. 집 가까운 곳에 반디앤루니스라고 그리 크지 않은 서점이 하나 있어서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는데 며칠째 연속으로 갔더니 직원들이 내 존재를 눈치챈 모양이다. 마음이 엄청 불편하다. (이놈의 소심 병. ㅠㅠ) 하긴 주 5일을 눈도장 찍는데 사라는 책은 안 사고 책 구경만 실컷 하다가 어느새 쓱 사라지니 직원들 입장에서는 여간 얄미운 고객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공휴일에는 절대 나의 존재를 눈치챌 수 없는 교보로 향한다.

최근에 책과 관련해 기분 좋은 발견을 했다. 자기계발서에 대해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풀었다는 점이다. 난 자기계발서가 너무 싫었다. 왠지 노력은 하고 싶지 않은데 성과는 많이 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책 같아서 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데 '니가 바로 그런 인간이잖아' 하는 깊은 양심의 울림을 들었다. 그래 솔직해지자. 자기계발서는 뭔가 폼이 안 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전국책,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 로마제국쇠망사. 제목부터가 그냥 간지가 좔좔 흐른다. 읽는 맛보다 들고 다니는 맛이랄까. 문제는 아주 잠시 재미있다가 대부분 엄청 지루하고 눈이 침침해지고 책장이 철판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잘 안 넘어 간다는 점이다.

자기계발서는 정말 쉽게 읽힌다. 그게 가장 좋다. 고전과는 다르게 배운 즉시 써먹을 수 있다. 약간 뜬구름 잡듯 허황한 이야기가 아니라 즉시 실천해 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 방법이 실효성이 있는지 실험을 통해 증명해 볼 수 있다는 것. 이런 점들이 자기계발서의 매력인 것 같다. 주말에 말콤 글래드웰의 블링크라는 책을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다. 아예 쇼핑 바구니를 들고 이 사람이 쓴 책을 모조리 담아서 자리를 잡았다. 아웃라이어, 티핑포인트, 다윗과 골리앗 전부 빠져들듯이 단번에 읽어내렸다. 대담하고 독특한 발상과 나름의 정교한 논리를 가진 이런 훌륭한 책들을 외면했다니. 자기계발서=약 파는 책 이라는 공식이 끔찍한 편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조직 심리학계에서 말콤 글래드웰과 함께 뜨거운 감자로 소개된 애덤 그랜트의 기브앤 테이크라는 책도 읽었다. 한 권의 책이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책들은 삶의 태도나 습관에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애덤 그랜트는 사람을 기버(giver), 매처(matcher), 테이커(taker) 3종류로 나눈다. 기브앤 테이크라는 제목에서 결국 타인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기버가 최종 승자가 되리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다른 책에서 주로 다루는 정신없이 주기만 하다가 결국 탈진해 버리는 평범한 기버가 아니라 동기부여를 꾸준히 유지하면서 양보하고 성과를 내는 성공한 기버가 되는 법을 제시한다.

난 이 책을 읽고 기버가 되어보기로 결심했다. 최근에 겪은 몇 가지 사례들이다. 인터넷에서 신발을 2개 샀는데 2개 중 하나가 사이즈가 큰 게 왔다. 평소 같으면 쇼핑몰에 악플을 달고 택배비를 추가로 지불해야함에 땅을 치고 분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기버다. 지인들의 단톡방에 필요한 사람 가져가라고 신발을 올렸다. 마침 한 친구가 필요하다고 해서 가져갔는데 이 친구가 내 폰이 낡은 것을 알고(갤3) 자기가 쓰던 노트5를 공짜로 줬다. 엥? 개이득.

주말에는 지인들 6명이서 스크린 야구를 하러 갔다. 내가 6할대 후반의 맹타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2판 내리 지고 말았다. 내 몫이 2만 원 이었는데 같은 팀이었던 친한 형이 일단 계산을 하고 돈을 계좌로 쏴주기로 했다. 계좌번호를 보내달라고 카톡을 쳤는데 그냥 안 줘도 된다고 했다. 평소 같으면 앗싸 개이득! 이러고 입을 싹 닦았을 텐데 이제는 아니다. 난 이제 기버로 살기로 했으니까. 형에게 제안했다. 내가 갚아야 할 2만 원을 토토에 베팅해서 당첨되면 나눠 먹고 꽝이 되면 없었던 일로 하자고. 6배짜리가 당첨되어서 각각 6만 원씩 나눠 먹었다. 삶의 태도를 약간 바꿨더니 -2만 원이 12만 원이 되는 매직이 일어났다. 형이 엄청 고마워해서 기분이 좋았다.

한번은 집 근처에 식당에 갔다. 요즘 드물게 계란 후라이를 주는 곳이다. 즐거운 저녁 식사를 기다리는데 웬일인지 계란후라이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이거 먹으려고 여기 오는 건데ㅠ 요즘 계란 값이 비싸서 없애버린 건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옆자리에 같은 메뉴를 시킨 분은 계란후라이가 나온 것이 아닌가!!!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으나... 아 이놈의 소심병. 울면서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그게 아니지. 포기한 것이 아니다. 난 이제 훌륭한 기버로 다시 태어나지 않았던가. 퇴각을 명하는 장군에게 한 부하 장수가 이대로 후퇴하면 군의 사기가 바닥을 칠 것이라고 진언하자 장군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린 퇴각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진군하는 것일뿐이다" 난 정당한 권리도 못 찾아 먹은 미련한 놈이 아니라 중소식당 경영정상화를 위해 원가를 절감 시켜드린 것이다. 그렇게 양보하고 베풀기로 했다. 나오는 길에 사장님이 맛있게 드셨냐고 물어보길래 "너무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계란후라이까지 먹었으면 배 터질 뻔 했어요." 이랬더니 사장님 얼굴이 사색이 되셔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다음부터 갈 때마다 내 얼굴을 기억하시고 계란후라이를 2개씩 주셨다. 앗싸 개이득.

내가 준 것보다 돌아오는 경제적 이익이 더 커서 기쁜 것과는 달랐다.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실행해보고, 그 결과가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고 있다는 느낌 그런 믿음이 삶의 행복감을 높여주는 것 같다. 몇년전에 사법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뜬금없이 운전면허 시험이나 컴활 같은 자격증 시험을 치는 형이 있었다. 공부할 시간도 부족할 텐데 왜 갑자기 그런 시험을 치느냐고 물었더니 작은 시험을 합격하는 연습을 해야 사법시험도 합격한다고 해서 별 신기한 사람도 다 있구나 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뭔가 이해가 간다. 작은 것이라도 실행에 옮기고, 사소한 성공을 쌓아가는 것. 그것이 큰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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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06 02:03
수정 아이콘
이래저래 피곤하고 귀찮다는 이유로 책을 멀리했었는데, 최근 책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글자가 눈에서 튀어나가는 느낌이 들더군요;;;;;; 책 보는 습관이 생기셨다니 부럽네요.
위버멘쉬
17/07/06 11:08
수정 아이콘
책 보는 습관이라기 보다 여자분들 보는 습관이...(응?)
17/07/06 02:41
수정 아이콘
계란 얘기는 기버의 예로는 뭔가 좀 이상한..?
위버멘쉬
17/07/06 11:08
수정 아이콘
뭔가 좀 이상한게 제 글의 포인트임다
로하스
17/07/06 09:44
수정 아이콘
여러가지 중독중에 가장 건전한 축에 속하는 중독이네요
스테비아
17/07/06 10:15
수정 아이콘
와 멋지네요 흐흐 뭔가 좋은생각 같은 잡지에 실려도 좋을 듯한 글입니다.
speechless
17/07/06 11:34
수정 아이콘
계란 이야기 너무 웃기네요 크크크
(넌 나에게 계란을 안줬으니 난 너에게 엿을 줄께)

예스맨 같기도 하구요
3막2장
17/07/06 21:07
수정 아이콘
좋네요 공감이 잘되는 글은 좋은 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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