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많이, 오래 봐오면, 넉넉잡아 2년에 한두번 정도는 '이거다' 하는 감이 오는 영화가 있다. 그 근거는 매번 다르다. 단순한 느낌일수도 있고, 감독과 각본가일수도, 배우일수도, 시나리오의 번뜩임일수도 있다. 때로는 어떻게 분석해도 그다지 대단한 견적이 나오진 않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느낌이 이 영화는 진짜라고 소리쳐올때도 있다.
그런 기대작들과의 만남을 그냥 짬날때 아무때나, 아무 영화관에서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고대하던 그녀와의 첫 데이트 약속을 '동네 영화관에서 대충 주말 3시쯤 만나자' 하고 잡지 않듯이, 내 심장을 바쁘게 뛰도록 만드는 기대작과의 만남도 최고의 장소에서, 최고의 시간에 하고 싶은게 나의 당연한 바람이니까.
가장 기본적인 몇가지 걸러야 할 요소부터 이야기해보자. 먼저, 여자친구와의 동반 관람
(1), 혹은 지인들, 가족들과의 단체 관람은 당연히 논외이다. 영화와 온전히 소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혼자여야 한다. 나는 영화를 사랑하고, 좋아하지만 나와 함께 영화관에 가준 사람과 비교할만큼은 절대 아니다. 내가 여자친구와 멜로 영화를 보러가면, 나는 영화 그 자체보다 당연히 '여자친구가 저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정' 쪽이 더 궁금하며, 중요하다. 가족과의 관람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부모님을 모시고 영화를 보러 가면 부모님이 재밌어 하실지가 궁금하며, 귀여운 후배들 영화 한편 보여줘도 애들이 재밌게 보길 바라는것이 사람 마음이니 결국 나는 영화 그 자체에 집중 할 수 없다.
(2)(1) 우연히 기대작과 흥행작이 겹치거나, 여자친구가 꼭 같이 보자고 한 영화가 기대작일경우 두번본다. 실제로 이런 경험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여태까지 살면서 내가 '꼭 혼자 보고 싶은 영화' 와 '가까운 사람이 꼭 같이 보고 싶다는 영화'가 겹친 케이스는 두번이었다.
아바타가 그랬고,
러브 액츄얼리가 그랬다.
(2)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화 관람이 주 목적일때의 이야기이다. 데이트가 주 목적이라면 오히려 역으로 영화를 이용하는것이 자연스럽고 편하다. 아래 설명한, 제목에 나와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점, 장소에서의 영화 관람은, 연애할때마다 항상 데이트 코스로 써먹어왔다. 내가 알고 있는 행복한 경험을 연인과 함께 하고 싶은게 당연한 사람의 마음이니까.
두번째로 시사회도 역시나 결격이다. 귀찮은 외부적 요소가 많고, 신경쓸게 많다는 점도 문제지만, 시사회의 문제는 영화를 관람하게 되는 시간을 온전히 내가 조절할 수 없어서 지나칠 정도로 끌려다닌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점이다. 생각해보자. 배급사측, 극장측에서 시사회를 열기 가장 적절한 시간이 언제일까? 어떤 요소를 고려해서 시사회 시간과 날짜를 잡을까? 기준은 명확하다. '한명이라도 많이, 한명이라도 편하게.' 그렇게 모두가 많이, 편하게 볼 수 있는 시간은 영화를 최대한 개인적으로 소비하고 싶은 나의 욕구와는 명백히 상충된다. '이 시점에 시사회를 여는게 최적이다' 라고 그치들이 내린 지극히 합리적인 결과는, 자연스럽게 나에게는 최악의 시점이 될 수 밖에 없다. 잣대 자체가 뒤집혀 있으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극장 자체를 이용하지 않고 VOD, DVD가 풀릴때까지 기다렸다 소비하는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것은 위의 두가지 케이스와 달리 상당한 장점이 존재한다. DVD가 발매된 이후엔 온전히 나 혼자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소비할 수 있다. 호텔방 하나 프로모션을 통해 잡고, 에어컨 틀어놓고 맥주 한캔 마시며 관람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기다림에는 위의 장점들을 무색하게 만들만한 단점도 많다. 아무래도 비주얼과 사운드적 만족감이 영화관에 비해 상당히 많이 떨어지고, 돈이 훨씬 더 많이 깨지는데다가, 결정적으로 최신 개봉작을 이렇게 소비하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인내해야한다. 이런 방법은 연인과의 데이트와 병행하거나, 혹은 이미 본 명작들을 한번 다시 리프레쉬하고 싶을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나는 욕구에 대한 인내가 강한 타입이지만, 시간의 소중함을 모르는 멍청이는 아니다.
여기까지 기본적으로 배제해야 할 것들을 제외하고 나면 이제 결국 역시 영화는 내가 원하는 시간대에 영화관에서 혼자 보는것이 정답이라는 1차적 결론이 나온다. 이제는 어느 영화관에서, 어느 시간대에 볼 것인가만 정하면 되는데,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나는 제목에 쓰인대로 장소는 용산 CGV, 그리고 시간은 무조건 심야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왜 심야이고 왜 용산 CGV인가? 용산 CGV의 아이맥스 스크린이 왕십리와 함께 국내에서 훌륭한 편이고... 조명이 어쩌고... 사운드가 어쩌고... 이런건 사실 나에겐 부차적인 요소일뿐이다. 물론 화면이 선명하면 좋다. 밝으면 좋다. 빛 차단이 잘 되어 있으면 더더더 좋다. 사운드가 훌륭하면 금상첨화고, 의자의 안락함, 스크린의 위치, 각도, 좋은게 좋은거라고 이런것들이 잘 되어 있는 극장을 상대적으로 더 선호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 기준으로 보면 용산보다 왕십리가 명백히 더 훌륭하다. 아맥관 기준 스크린 크기도 더 크고, 좌석 위치도 훨씬 좋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위의 환경적 요소만을 고려시 왕십리와 용산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보통은 극장의 위치와 주차 환경이 왕십리가 꺼려지는 이유인데, 사실 나에겐 그 두가지도 사실 큰 문제가 되지 않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왕십리를 걷어차고 용산을 사랑하는 이유는, 심야영화를 선호하는 이유와 따로 설명할 수 없는 다음의 단 한가지 때문이다.
바로 용산에서 심야 영화를 보고 나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이곳의 밤 광경이 더 없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고작 이거 하나 때문에 일부러 피곤한 심야에, 일부러 먼 용산까지 가서 영화를 본다. 정말 이상한 사람 같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내 경험상 실제로 좋은 영화들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시간보다,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남는 여운이 훨씬 더 큰 임팩트를 주었다. 단 한번의 예외도 없었다. 그 여운의 정체가 아프게 현실에 대해 꼬집힌 찝찝함이건,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아련함이건, 너무나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얼얼함이건간에, 좋은 영화는 영화관 문을 나선 이후에도 내 머리속에 강한 향기로서 존재했다.
하지만 평일 낮에, 보통은 쇼핑몰안에 있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 그 여운을 소위 말하는 시장통에서 다 날려먹게 된다. 심지어 많이 이른 시간에 영화를 보면 그날치 일상을 또 마저 지내야만 비로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데, 그러는 동안 명작이 남긴 아련한 향기는 어느새 화장품 냄새, 음식 냄새에 가려져 덧없이 희미해지고 만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낭비 행위다.
첫 사랑과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을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듯이, 훌륭한 영화를 처음 본 순간의 경험은 백번, 천번을 더 봐도 결코 다시 얻을 수 없다. 그런 일생에 한번뿐인 소중한 경험을 백번이고 천번이고 겪어야 하는 일상으로 덮어버린다면, 그것은 한번 살다 가는 인간으로서는 보통 미련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항상 느즈막한 시간 영화를 보러 용산에 간다. 세련되게 꾸며놓은 CGV의 내부를 슬쩍 한번 둘러본뒤, 팝콘을 사서 영화관에 들어가 조용히 혼자서 영화를 감상한다. 그리고 영화가 다 끝나면 여운에 젖어 밖으로 나와, 건물 바깥길을 걸으며 벽이나 천장따위로 가리지 않은 온전한 밤하늘의 나신을 감상하며 천천히 영화에 대한 여운을 곱씹는다. 그렇게 미련해 보일만큼 느린 걸음으로 영화관을 나와서는 사색에 잠겨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채로 집에 들어가 영화가 남긴 향기를 그대로 간직한채 잠이 든다.
인정한다. 지지리 궁상같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원래부터 궁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행복이 숨어있다. 단지 그것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의 문제일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