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8단지가 여기에 한 번 나가봅시다. 희태씨가 참가신청 좀 해줘요. 전기, 수도, 가스 하고 음식물쓰레기를 얼마나 절약했는지를 본다고 하니까 다들 한 번씩 읽어보도록 합시다. 아 그리고 주민들이 탄소포인트? 인가 뭔가에 얼마나 가입했는지도 평가한다니까 집집마다 가입신청 싸인도 좀 받아오세요."
가뜩이나 누진세 논란으로 불만이 많은 주민들에게 절약 경진대회는 좀 그렇지 않나 라고 생각했지만 희태는 "어우 정말 좋은 기회 같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3.
희태는 603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옆집 604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예- 관리사무소 입니다." 문이 빼곰히 열리고 의아하다는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 안녕하세요 다른건 아니고 뭐 좀 여쭈어 볼려구요. 옆에 603호 입주민 혹시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네? 603호요? 글쎄요 본적이 있나?" "사람 사는건 맞죠?" "아 네. 몇 번 인가 문 앞에 중국집 그릇이 나와있던 적이 있었어요." "그래요? 보신적은 없으시구요?" "네 잘 기억이 안나네요.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어떻게 한 번도 안 마주쳤지?"
중국집이라 중국집
4.
"이모~ 8단지에요. 아이 그럼요 잘있었죠. 아니 오늘은 시킬려는건 아니고. 아니 아니 내일 시켜 먹을게. 그게 혹시 장부같은거 있어요? 왜 요새는 주문 전화 걸면 먼저 몇동 몇호 맞냐고 묻잖아. 그렇지 그렇지. 혹시 801동 603호에서 뭐 시켜먹은적 있나해서. 경찰은 아니고 일하는데 필요해서 그래요. 도무지 만날 수가 없네. 아 그래요? 있어? 1주일 전? 자주 시켜먹어요? 알았어요 사장님 고마워요. 알았어 알았어 내일 꼭 시킬게. 아 혹시 603호에서 또 시켜먹으면 나한테 알려줄 수 있어요? 네 고마워요."
5.
"여기요 여기." 1층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희태가 손짓을 했다 오토바이를 탄 중국집 배달원이 희태 앞에서 멈췄다 한낮의 태양에 배달원은 시뻘겋게 익어있었다
희태는 귀찮게 해서 죄송하다고 뒤에 가만히 서있기만 하겠다고 날도 더운데 고생 많으시다고 시원한 음료수를 건넸다
딩동
"배달이요-"
603호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6.
창백하고 얇은 한 번도 햇빛을 받아본 적이 없었을 것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문 뒤로 보이는 실내는 대낮임에도 암막이라도 쳐놓은 것처럼 어두웠다 잘 보이지 않는 그의 뒤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두더지 본 적은 없지만 희태는 그가 두더지 같다고 생각했다
이상할 정도로 빳빳한 5만원짜리 지폐 한장을 그가 배달원에게 내밀었고 배달원은 음식을 내려놓기 위해 철가방을 열었다
이 때 밖에 없다고 생각한 희태는 말문을 열었다 "저.. 안녕하세요 관리사무솝.."
그는 화난 듯한 눈동자로 배달원과 희태를 번갈아 노려보더니 희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당겨 잠갔다
희태는 문을 두드리며 나는 분명히 전달했다고 동네방네 알리는 양 크게 외쳤다 "선생님. 전기사용량이 너무 많으신것 같아서 안전점검 좀 왔습니다 선생님. 탄소포인트도 가입하시면 혜택이 아주 많습니다."
배달원은 황당한 표정으로 한 손에 빳빳한 지폐를 든채 사장님께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7.
"전기를 끊자."
관리사무소장이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였다는 6단지 관리소장과 만나고 온 직후였다 6단지도 녹색아파트 경진대회에 참가한다고 했다
6단지가 8단지보다 넒은 평수 단지라서 그런지 옛날 친구가 관리소장으로 있어서 그런지 관리사무소장은 유독 6단지에게 지기 싫어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렇죠." "두시간만 끊어. 성주씨가 방송 좀 해봐."
지역 콜택시 회사에서 전화도 받고 무전도 하다 왔다는 성주는 스마트폰 콜택시들에게 밀려 자리를 잃었다고 했다 내가 무슨 힘이 있나요 라는 표정으로 성주는 희태를 쳐다보았다
딩동댕동 관리사무소에서 안내 말씀 드립니다. 금일 오후 세시부터 다섯시까지 전기시설 긴급점검으로 단지내 정전이 되오니 많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동댕동딩
8.
정전이 되었다 관리사무소장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불안감에 휩쌓인 희태는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어서 사무실에서 나왔다 에어콘 실외기들이 모두 멈춰버린 아파트가 조용히 8단지에 서있었다
위이잉-
801동을 지날 때 쯤 희태는 들려서는 안되는 소리를 들었다 단 한번도 돌아가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603호의 실외기가 정적과 정전을 깨고 보란듯이 돌아가고 있었다
9.
다음날 오전 사무실에 찾아온 사람들이 관리사무소장을 끌고 갔다 신분증을 내밀었지만 잘 보이진 않았다
왜 왜요? 뭐하는 거에요. 희태가 외쳤으나 그들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경찰을 불렀지만 이미 그들은 떠난 뒤였다
뒤늦게 온 경찰과 함께 올라가본 603호는 문이 열려있었고 냉장고만한 무정전 전원공급장치와 몇 개의 빈 컴퓨터 선반만이 남아있었다
인터넷에서는 어제 오후부터 주요 포털의 댓글 수가 부쩍 줄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10.
관리사무소장은 추석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돌아온 그는 경진대회에 나가야 한다며 아파트를 한동 한동 돌아다니며 녹색 페인트로 칠하기 시작했다
- 인물 이름은 냉장고를 부탁해 출연진에서 따왔어요 - 603호는 추천게시판에서 본 글곰님의 모텔 괴담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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