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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난 조각] 12주차 주제 "일기"를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장 대리로 지낸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그사이 많은 걸 바꾸었습니다.
우선 홈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뭐... 그렇다고 예약도 받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춘 홈페이지는 아닙니다. 블로그 계정으로 가게 소개만 하는 사이트입니다. 그래도 범용 스킨으로 만들면 없어 보일 것 같아서, 반응형 유료 스킨을 구매했죠. 그리고 되도 않는 실력으로 구색 갖춘다고 아주 생고생을 했습니다. 이런 걸 웹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html 언어라고는 "img src"나 "font" 정도밖에 모르는 놈이 html이니, CSS니 알아보느라 즐겨찾기 구글 버튼이 너덜너덜해질 정도였죠. 그래도 고생한 덕분에 저희 가게에 홈페이지가 생겼습니다. 네이버에도 등록해놓았죠. 이때 한 가지 억울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네이버에서 소규모 자영업자를 위한 홈페이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모두(modoo)! 누구나 쉽게 무료로 만드는 모바일 홈페이지!"라는 서비스였죠. 이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고생고생하며 홈페이지를 만들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ㅠ.ㅠ. 그래도 '모두' 서비스로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보기 좋은 홈페이지를 만들었기에 그걸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역시 자유도는 티스토리가 나은 것 같아요.)
홈페이지에 올릴 음식 사진도 찍었습니다. 사진에 일가견 있으신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동기도 한 명 불러서 부랴부랴 사진을 찍었죠. 기대한 것보다 훠얼씬 훌륭한 사진을 찍어주셨습니다. 동기는 특유의 센스로 좋은 구도를 만들어 주었고요. 문제는... 그걸 되도 않는 합성 실력으로 어정쩡한 모양으로 만들어 홈페이지에 올려버리고 말았지만요. (ㅜㅜ 형. 죄송해요.) 그날 주린 배를 움켜쥐고 늦게까지 사진을 찍어주신 선배님과 동기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피잘 유저시니 오셔서 보실 수도... 크크)
메뉴도 새로 뽑았습니다. 짤평하면서 그래픽 툴을 다뤘던 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합성처럼 실력이 필요한 일이라면 모를까, 메뉴 같은 문서 작업이야 짤평과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덕분에 그럴싸한 메뉴를 만들어 메뉴판도 바꾸고, 홈페이지에도 게시했지요. 테이블 매트도 새로 구입했습니다. 기존 매트는 낡아 빠졌었죠. 이것도 비슷한 모양의 저렴한 녀석을 찾느라고 애 좀 먹었습니다. 카운터도 깔끔히 정리했네요. 원래는 메뉴판이 잔뜩 쌓여있었습니다. 펜은 아무대나 굴러다니고 메모지랍시고 일수 찌라시들이 잔뜩 쌓여있었죠. 필요 없는 것들은 싹 다 갖다 버리고 집에서 가게 로고를 워터마크로 박은 메모지를 직접 출력해왔습니다. 지금 카운터는 훤하니 말끔한 모습입니다.
많은 것을 바꿨지만, 아직 다 끝낸 것은 아닙니다.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개선해야 할 점들이 너무 많이 보였습니다. 그중에 절반 정도 해 놓았습니다. 나머지는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아버지가 복귀하시기 전까지 저 혼자 처리할 수 없는 일들뿐입니다. 그리하야... 오늘부로 조금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동안은 앞의 일들을 처리하느라 말 그대로 1분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10시까지 가게에 와서 10시에 마감할 때까지 일하고, 손님이 없으면 틈틈이 앞서 언급한 작업을 했습니다. 집에 가면 잠들 때까지 홈페이지 작업과 그래픽 작업을 했지요. 약간의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정말로 퇴근이란 개념도 없이 먹고 자고 싸는 시간을 빼면 하루 종일 일만 했습니다.
이별의 슬픔을 잊기 위한 몸부림이었을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제 성격이 이런 듯합니다.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이별을 느끼는 감성이 과거와는 사뭇 달라졌습니다. 20대였다면 "아직 그녀를 잊지 못했어..."라며 미련에 젖어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회상의 여운조차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만, 앞으로 누군가를 그녀처럼 사랑할 순 없을 거라는 생각은 확고하게 느껴집니다. 사실상 그녀가 마지막 여자가 될 것 같습니다. 이 느낌이 두렵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직 손에 낀 커플링도 빼지 않고 있습니다. 이걸 빼면... 왠지... 장가도 안 간 홀애비가 될 것 같아서요. 빼지 않고 있으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음... 그냥 보통의 미련과 다름없으려나요?
이 과다 업무 끝에 얻은 보람이 하나 있다면 어머님이 더는 저를 보고 '게으르다'며 핀잔하지 않는다는 점이네요. 아마 전 세계에서 저를 게으르다고 구박하는 유일한 분이 어머니셨을 겁니다. 하긴 취업도 못 하고, 시험 합격도 못 했으니 게을러 보이기도 하겠죠. 그래도 게을리 살지는 않았습니다. 결과가 없었을 뿐... 솔직히 억울할 일이지 않나요? 시험이나 취업처럼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 나는 일을 가지고 제 성실성을 판단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뭐... 그래도 이제는 저보고 게으르다는 소리를 안 하시니 스트레스 쌓일 일이 하나 줄긴 했습니다.
요즘 편의점 진상 손님 글이 많이 올라오네요. 다행히 제가 일하는 동안 진상 손님을 뵌 적은 없습니다. 초짜가 상대하기에 다소 난감한 분들은 계셨지만요.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서빙을 하고 있는데, 한 손님께서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선생님 많이 드셔야 하는데 이걸로는 부족하겠는데요? 뭐 더 안 나옵니까?"
흔히 말하는 "서비스 좀 없냐."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서빙 초짜가 뭘 알겠습니까. 저는 이리 대답했죠.
"이게 마지막 코스입니다. 주문하신 건 전부 나왔습니다."
그러자 다시 치고 들어오십니다.
"이거 좀 부족한데. 뭐 좀 더 주셔야겠는데."
저는 정말 친절을 다 한다는 마음으로 이렇게 대답했죠.
"추가 주문을 원하시면 메뉴를 가져다 드릴까요?"
그러자 손님께선
"어... 그럼 메뉴 좀 갖다 줘봐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메뉴를 갖다 드렸더만, 그냥 뒷 자리에 놓고는 쳐다보지도 않으시더라고요. 그때 알았습니다. '아... 서비스 달라는 말이었구나.' 사실 음식점 입장에서 간단히 나갈 수 있는 메뉴가 아니라면 서비스를 명목으로 따로 조리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일단 주방 직원들이 싫어하고, 재료비니 뭐니 따지면 비용적으로 손해 보는 일이니까요. 그런 사정을 알고 나서야 제가 한 짓이 능구렁이 쌈 싸 먹는 능글맞은 일이었다는 걸 알았죠. 음... 아무래도 저는 서빙에도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게에는 별의별 판촉 전화가 잔뜩 옵니다. 개중에는 사기에 가까운 전화도 많지요. 가스 공사라며 사장님과 얘기를 해야 한다길래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스비 절약해주는 무슨 장치를 설치해준다고 합니다. 소속이 어디냐고 물으니 가스 공사가 아니라 이름도 모르는 회사 이름을 대더라고요. 안 사요. 하고 끊었죠. 바이럴 마케팅 전화는 시도 때도 없이 옵니다. 한 번은 네이버에 홈페이지를 등록한 날에 전화가 와서 깜빡 속을 뻔했습니다.
"네이버에서 블로그 홍보를 해드립니다."
"네이버라고요? 마이 비즈니스 등록 건 때문에 전화하신 건가요? 저희가 게재한 정보에 문제가 있나요?"
"네. 확인해 봤는데 문제는 없으세요. 기왕 등록하신 김에 블로그 홍보도 해보시라고 전화드렸습니다."
이때 뒷목이 싸한 게 느낌이 팍 왔습니다.
"말씀하시는 분 소속이 정확히 어딘가요?"
"저희는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홍보대행을 하는 OOOO입니다."
"아... 그럼 네이버가 아니시네요?"
"꼭 그렇지만은 않구요."
"네. 수고하세요."
정말 눈 감으면 코 베어 갈 세상 아닙니까? 와... 어쩜 말투도 안 변하고 홈페이지 등록 사실을 능숙하게 받아넘겼을까요.
어제는 너무나 당당해서 어처구니가 없는 전화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OOO입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계신가요?"
사장을 찾으면 99% 뭐다?
"네. 제가 사장입니다."
"아... 사장님 저희는 인스타그램 회사입니다."
음... 도대체 인스타그램 회사는 뭘까요? 인스타그램은 페이스북이 인수했을텐데?
"음... 그런 회사가 있나요?"
"네. 인스타그램에서 홍보해드리는 회사인데요."
"아니 아니. 회사 이름이 뭔데요. '인스타그램 회사'라는 게 있어요?"
"네. 인스타그램 회사인데요. 인스타그램에서 가게를 홍보해드려요."
"그럼 바이럴 마케팅 회사이신가요?"
"바이럴 마케팅은 아니고요. 그냥 인스타그램에서 홍보해드리는 거예요."
순간 또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네요.
"에이... 그걸 왜 돈 들여서 해요. 그냥 제가 하지."
"?!? 어떻게 하시는데요?"
"제가 실은 그저께 구글 계정을 500개 구입했거든요. 그걸로 그냥 다 인스타그램 가입해버리려고요."
"아... 그래서 인스타에서 직접 홍보하시는군요."
"네. 그러면 되죠."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황당함이 가시질 않더군요. 인스타그램 회사라니 누굴 바보로 아나... 이건 좀 너무하잖아요.
이런 일들을 행하고 겪으면서 요즘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바쁘게 정신없이, 기막히고 코막히는 일들을 겪으면서, 이별의 아픔도 느끼지 못하면서, 예전처럼 자기 전에 유머 게시판을 뒤지며 10분 정도 우스갯소리를 보기도 하면서, 별도 뵈지 않는 서울 밤하늘을 바라보며 담배 한 개비 피우면서, 그래도 뭐가 분한 건지 잠이 오지 않으면 보드카 한 모금을 마시면서, 그렇게 잠자리에 들고, 다시 일어나 다음날을 시작합니다.
기쁜 것은 공부만 하던 시절에 비하면 무능감과 무기력에 시달릴 여지가 없다는 점입니다. 정신없게 열심히 할 일이 있다는 것은 그래서 좋은 일 같습니다. 이런 게 노동의 기쁨인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급여는 없습니...
슬픈 것은 제 인생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는 점이네요. 사실상 올해 시험은 무리인 것 같고요. 꿈? 일주일에 한 편 보던 영화도 볼 새가 없습니다. (<로건> 보고 싶슾셒슾...) 그동안은 바빠서 일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죠. 이제 조금의 여유가 생기긴 했습니다. 다만, 자리를 비울 수는 없네요. 조금의 여유란 손님 없는 시간에 멍 때릴 수 있는 정도입니다. 여전히 꿈 같은 걸 좇을 수는 없겠죠.
그럼 이 작은 여유 시간에 무얼 해야 할까요? 저는 가만히 멍 때리진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런 가게들 많이 봤습니다. 손님 없는 한적한 시간에 무기력하게 앉아서 종편 방송이나 보며 시간을 보내는 사장님이 계신 가게들입니다. 그런 가게는 성공 못 합니다. 양심 있고, 맛있으면 망하진 않겠지만, 절대 성공하진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가게들 없어지는 것도 많이 봤습니다. 그렇게 신촌에서 제 단골 가게들이 하나둘 없어졌거든요.
하지만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성격상 무언가 가게를 번창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다시 물소처럼 달려들 것 같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르니 걱정입니다. SNS나 블로그 조작질을 제 손으로 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건 양심이 허락지 않네요. 그런데 떠오르는 아이디어의 종류가 고작 이 정도니... 이럴 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려면 경력이 필요한 걸까요? 초심자이기에 꿰뚫어 볼 수 있는 무언가는 역시 만화에나 나오는 건가 봅니다.
일단 책을 볼까 합니다. 모교에 돈까지 기부하면서 도서관 이용권을 얻었는데 그거라도 써먹어야겠어요. 가게 운영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아보거나, 그런 게 없으면 손을 놓았던 어려운 책들을 다시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책이란 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이런 짬짬이 시간 속에서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집에 오면 매일 한식 대첩을 한 편씩 다시 볼 생각입니다. 무언가 신메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장 대리로 지낸 4월 한 달 동안 저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 코스트코에서 파는 1.75L에 14,000원짜리 보드카 개꿀입니다. 도수가 높아 한 모금만 마셔도 잠은 솔솔 오는 데다가 숙취도 없어요.
※ 가게를 번창하게 하는 일이 뭐가 있으려나요. 노하우가 있으면 공유 좀... (굽신굽신)
Written by 충달
http://headbomb.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