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에서 비자림은 도보로 닿는 거리에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비자림을 방문하지 않은 건 아이가 걷는 걸 싫어한다는 명확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일이면 지금의 숙소를 떠나 서귀포 쪽으로 이동해야 했기에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투덜거리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비자림으로 쭐레쭐레 걸어갔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라는 설명이 입구에 붙어 있는데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읽어보면 될 일이다. 음이온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가 적힌 팻말 따위는 아예 깔끔하게 무시하는 편이 낫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은 후 곧장 내부로 진입했다. 바닥은 적당히 단단한 흙길이고 길 양쪽으로는 나무들이 수북이 줄지어 있다.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뻗친 덕택에 마치 지붕이 있는 것 마냥 햇볕을 막아 준다. 이 정도면 산책을 딱히 즐기지 않는 내게도 충분히 걷기 좋은 길이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은 편이었지만 서로 부딪히는 일은 없다. 들어가는 길과 나오는 길이 서로 달라서 동선이 엉키지 않는 까닭이다. 게다가 길 폭도 적당히 넓어서 원하는 속도로 걸을 수 있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흐름에 굳이 맞추지 않아도 되는 건 어린 아이가 딸린 가족에게 상당한 장점이다. 처음에는 짧은 코스로 다녀오려 했지만, 걷다 보니 의외로 흥이 나서 결국 가장 안쪽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꼬박 한 시간 반을 씩씩하게 걸어준 아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진즉에 데리고 올 걸.
비자림과 숙소 사이에 있는 식당에 들러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 후 카페로 갔다. 바닷가에 위치한 데다 인테리어가 좋아서 소위 인스타그램 명소라는 모양이다. 그런데 사람 득시글거리는 곳이 싫다는 아내는 분명 자기가 가자고 먼저 말을 꺼냈으면서도, 정작 도착하기도 전에 손님이 많으면 다른 곳으로 가자고 채근이다. 가자는 이야기인지 말자는 이야기인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기까지 십여 분 동안 똑같은 이야기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들으니 슬쩍 짜증이 난다. 다행히도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사람이 많지 않아 자리가 꽤 비어 있다. 이층으로 올라가 주문한 후, 아내와 아이더러 내려가서 먼저 앉아 있으라 하고 나는 커피가 나오길 기다려서 내려갔다. 그런데 내려가자마자 아내가 짜증을 낸다. 자기 말대로 자리가 없지 않냐면서.
아니.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지금 서 있는 게 아니라 자리에 앉아 있잖아. 라고 나는 생각한다. 동시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뻗친다. 들어오기 전부터 자꾸만 그러더니 이제는 말도 안 되는 생떼다. 아내도 방석 위에 앉아 있고 아이도 앉아 있고 그 외에도 빈 의자가 족히 열댓 개는 보이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꽤나 많은 축약이 포함된 말이었던 모양이다. 이 카페에는 대략 다섯 종류의 좌석이 있다. 첫째는 소파 앞에 테이블이 놓인 평범한 자리다. 둘째는 기다란 책상에 등받이 없는 의자가 일렬로 배치된 곳이다. 셋째는 창문 옆에 야트막한 높이의 콘크리트 테이블이 튀어나와 있는 곳이다. 넷째는 마치 운동장 스탠드처럼 된 길고 높은 계단 중간 중간에 방석과 협탁이 놓인 형태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야외에 위치한 캠핑 의자들이다. 그리고 그 중 소파 자리만이 가득 차 있고 나머지는 반 이상 비어 있다.
그렇다. 아내가 말한 자리가 없다는 말은 ‘자신이 원하는 편안한 소파 자리’가 없다는 의미였다. 나머지 넷은 아내의 기준에서 자리다운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해 완료!
물론 이해를 했다고 해서 납득까지 되는 건 아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마음을 나는 맛본다. 그곳에 자리가 있어서 자리가 있다고 말했을 뿐인데 자리가 있다고 말하면 안 된다니! 입이 절로 튀어나오고 인상이 찌푸려진다. 그러다 본때를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호시탐탐 틈을 노린다. 그러다 기회가 온 순간 놓치지 않고 움켜쥔다.
소파에 앉아 있던 한 무리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나는 재빨리 그곳으로 가서 남들보다 빨리 자리를 차지하고야 말았다.
나는 보란 듯 아이에게 손짓해 이곳으로 오라고 부른다. 아내도 곧 따라온다. 나는 말없이 으스댄다. 봐라. 이것이 당신 남편의 능력이다. 나는 당신이 낸 까다로운 임무를 해결하고야 말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있느냐? 라는 속내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고 속으로만 그렇게 되뇐다.
아내는 뚱한 표정으로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내는 운전석을 향해 넌지시 손을 내민다. 화해의 손짓이다. 나는 승자의 기쁨을 만끽하며 그 손을 잡는다. 그렇다고 아내가 패자라는 건 아니다. 왜, 그 찬란한 영광의 노래가 있지 않은가. We are the champions, We are the champions. 우리는 모두 챔피언들. 숙소로 돌아와서는 서로에게 짜증을 낸 것을 사과하고 동시에 상대의 눈치 없음과 명확하지 않은 표현을 타박하며, 그렇게 오늘의 전쟁도 마무리된다.
원래 부부간의 싸움이라는 게 그렇다. 반드시 승자와 패자를 갈라야 할 이유 따윈 없다, 그보다는 화해를 통해 둘 다 승자가 됨으로써 마무리하는 편이 백배는 낫다. 부부는 적이 아니라 사회라는 이름의 치열한 전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는 전우들이니까. 안 그런가?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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