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었으나 '국적성'이라는 것이 일종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본문에만 씁니다. 미시마 유키오와 타짜 정도는 별 문제 없겠지요 아마. 서사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으나, 서사 전개의 장치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인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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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신경숙의 컴백 기사를 읽었다. 신경숙이 표절한 '우국'은 언젠가 원서로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소설이며, 미시마 유키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본 작가 중 하나다. 생각해보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인 aiko도 표절을 당한 적이 있다. 마가 낀 건가. 많은 유명한 예술가들이 표절의 대상이 되지만, 유명하다고 해서 모두가 표절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유명할수록 표절을 당할 확률은 줄어들 것이다. 걸리기 쉬우니까. 역시 마가 낀 걸까.
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것은 근대인이 피해야 할 사고 방식일 것이다. 그러면, 왜일까. 잠시 고민해보다가, 이런 결론을 내렸다.
나는 국적성을 좋아하는구나.
이를테면 나는 미시마 유키오를 동시대의 동급 작가 다자이 오사무라거나 현대의 '국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일곱 배 정도 좋아하는데, 일곱 배 중 두 배 정도 분량은 미시마 유키오가 가진 '지극히 일본적인 맥락' 때문일 것이다. 소속사의 한국지부가 있음에도 정식 라이센스 앨범 한장 국내에 출시한 적 없는 aiko를 데뷔 동기이자 '인터내셔널 디바' 우타다 히카루보다 좋아하는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적인 맥락을 고도로 추상화하여 상징적인 작품을 써냈다는 노벨상 수상자 모옌보다는 대국적 관점에서 중국 근현대사 훌훌 풀어낸 중국 아재 위화를 좋아한다. 하지만 세계적 대중성을 손쉽게 갖추는 쪽은 역시 탈국적적이고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모옌이나 무라카미 하루키나 우타다 히카루 쪽일 것이다. 그리고 작품의 '강한 국적성' 덕분에 완성도에 비해 해외 인지도가 떨어지는 미시마 유키오나 aiko같은 예술가들만큼 표절하기 좋은 대상은 없을 것이다. 잘 만들었는데, 덜 유명하고, 이국적이다. 하여 내가 각별히 좋아하는 작품들은 세계구급 상을 탈 확률은 낮고 표절당할 확률은 높다는 슬픈 결론. 뭐, 미시마 유키오는 작품보다 작품 외적으로 더 유명하다는 문제도 있을 것이지만.
'국적성'이란 거대한 구체의 첨단이 상징으로 상용됨으로서 만들어진다. 어떤 무작위의 텍스트에 등장하는 80년 광주, 라는 단어는 단순하게 1980년의 한반도 어느 지역을 지칭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에 등장하는 일본도는 하루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일본도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잠깐, 하루키 소설에 일본도가 등장하기는 하던가). 국적성을 가진 작품들은 작품이 내적으로 다루는 이야기 이상의 구체적인 서사로 난잡하게 가득 차게 되고, 나는 이러한 '구체적이고 난잡한 이야기'를 고도의 추상화와 상징화로 이루어진 이야기보다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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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성의 맥락에서 만화 '타짜'를 정말 좋아한다. 만화 타짜는 지리산 빨치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지리산 빨치산의 이야기로부터 지리산 아래로 펼쳐진 농촌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그 농촌의 노름꾼으로부터 4부작의 장대한 서사가 시작된다. 타짜는 기본적으로 도박을 둘러싼 군상극이지만, 타짜의 도박은 굉장히 구체적인 한국의 역사 위에서 진행된다. 빨치산과 부동산 개발, 화폐 개혁 시도 등의 굵직한 역사적 이벤트가 인물과 화투패 사이를 배회한다.
도박을 둘러싼 군상극이란 사랑이나 종교, 혹은 계급에 대한 서사와 마찬가지로, 가장 범-인류적이고 보편적이며 본원적이고 무국적적인 서사 중 하나일 것이다. 이를테면 명작 도박영화 '라운더스'의 경우는, 비록 배경은 미국이고, 주인공은 프로 도박사가 되기 위해 라스베가스로 향하며, 주인공의 스승은 미국법이 강제하는 양육비로 고생하는 퇴물 도박사이고, 악역은 러시아 마피아지만, 그럼에도 무국적적이다. 포커 테이블이 있고, 테이블에 사람이 앉아 있으며, 패가 돌고, 이야기는 오직 패 안에서만 펼쳐진다. 하지만 타짜는, 지극히 한국적이다. 지리산의 빨치산 이야기로 시작하는 작품이 한국적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 라운더스에서 지하 도박장을 운영하는 러시아 마피아는 삼합회로 대체된다 해도 서사적으로 큰 문제가 없을 것이지만(물론 영상미나 전개의 차원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겠지만), 만화 타짜에서 지리산 빨치산은 파리 꼬뮌이나 소비에트의 혁명전사 혹은 민가를 약탈하는 산적1로 대체될 수 없다. 타짜의 빨치산은 단지 산도둑놈이 아닌, 한국사의 어떤 거대한 맥락의 작은 첨단이다.
나는 라운더스가 굉장한 명작이라고 생각하지만, 만화 타짜와 영화 라운더스 중에 뭐가 더 위대한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타짜를 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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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미시마 유키오와 타짜는 그 강한 국적성으로 인해 세계 수준에서 온당히 그들이 받아야 할 대우를 받지 못했지만(팬의 관점이므로 일반적인 관점과 다를 수 있다), 그 어려운 걸 기생충이 해냈다. 칸 영화제가 제비뽑기로 상을 주는 행사는 아닐테니 말이다. 기생충은 굉장히 뚜렷한 국적성을 가지면서도,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기생충의 서사적 핵심은 '계급'이며, 계급 서사란 종교 서사나 도박 서사가 그러하듯, 본원적이고 무국적적이다. 하지만 서사를 전개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소재들은 너무나도 현대-한국적이다. 반지하, 라는 특수한 빈민 주거공간(아, 나도 반지하에 살고 있다). '휴전중인 국가'에 존재하는 가정 방공호. 위조된 대학 졸업장과 과외. 수석. 전국체전의 메달. 필라이트. 인디언을 필두로 한 '미제'와 '일제'에 대한 욕망과 선호. 보이스카웃. 대만 카스테라에 스러진 삶과 삶들. 교양 있는 신진 부르주아 사업가. 이런 것들은 타짜의 빨치산마냥, 대체될 수 없는 구체적인 국적성을 가진 것들이다. 동시에, 구체성이 결여된 채로도 내적 서사를 위한 장치로 훌륭하게 기능한다.
방공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세이프 룸'이라는 국제적인 개념이 있지만, 기생충의 방공호는 그보다 구체적인 국적성을 띈다. 영화에서 설명되듯, 예전에 지어진 대저택에는(그리고 보통의 단독주택에도) 간간히 전쟁에 대비한 방공호 공간이 있었고, 이제는 여러가지 이유로-그것이 부끄러움이건 뭐건-잊혀진 공간이다. 방공호는 한국의 역사적/정치적 상황이 상징화된 공간이며 이는 원래 가정부의 북한식 농담으로 재확인된다. 단순한 세이프 룸이 아닌, 한국의 '지하 방공호'이기에 기생충의 서사는 방공호만큼의 깊이를 얻는다. 단순한 사업 실패가 아닌 '대만 카스테라'도 '대만 카스테라'로 표상되는 수많은 한국적인 문제들을 함축한다.
대만 카스테라가 아니라 단순한 사업의 실패였다 할 지라도, 방공호가 아닌 보통의 세이프 룸이라 할 지라도, 기생충의 전체 서사는 어떻게 이어지기는 할 것이다(그리고 그대로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상을 받았겠지). 하지만 대만 카스테라이기에 작품은 카스테라마냥 농밀하고 풍부해진다. 가타부타 설명도 영상도 없이, 서로가 '대만 카스테라'가 들어간 대사 한 줄씩을 뱉는 것으로 구체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러한 구체성으로 인해 서사는 풍부하게 완성되지만, 그러한 구체성을 모른다 해도 서사는 재미있는 서사로 완결된다.
글을 쓰며 내가 외국인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영화로 재미있을 텐데, 미싱 링크들이 많지 않을까. 왜 대만 카스테라를 하다 망하지? 돌을 모으고 선물한다는 게 어떤 의미지? 한국의 집에는 방공호가 있나? 저 두 가정은 저렇게 계급이 다른데 어떻게 같이 보이스카웃을 했지? 등등등.
오랜만에 재미있는 영화를 보아 기분이 좋은 날이다. 우와,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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