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은 동네 이름부터가 정겨운 종달리에 위치한 [종달리엔 엄마식당]에서 먹었다. 어째서 다짜고짜 점심부터 시작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아직 나라는 사람의 게으름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게 틀림없다. 나는 아인슈타인이 하루에 열한 시간씩 잤다는 출처 모를 이야기를 마치 종교 경전처럼 신봉하는 사람이다. 물론 내가 아인슈타인처럼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적어도 그처럼 잠꾸러기가 될 수는 있다. 그럼 적어도 절반이나마 닮은 셈 아닌가.
이곳의 메뉴는 일본식 카레와 스테키동이다. 간혹 제주도까지 가서 왜 굳이 일본식 카레를 먹느냐고 의문스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하기야 관광지마다 들어찬 국적불명의 가게들을 보면 나도 가끔씩 괴상망측하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하지만 국적불명이면 또 어떤가? 여행지마다 먹어야 할 음식을 정해 놓아야 하는 여행이라면, 그래서 제주도에서의 보름 동안 내내 고등어와 흑돼지와 전복죽만 먹어야 한다면 그거야말로 꽤나 곤욕스러운 여행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돈가스도 카레도 치킨도 피자도 그냥 내키는 대로 다 먹어치웠고 앞으로도 그럴 작정이다. 맛있으면 됐지 뭐.
그럴지라도 이왕이면 제주도 고유의 특색 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사람에게는, 이곳에서 파는 쉰다리라는 제주도 전통 발효 음료를 추천한다. 발효가 되어 있다 보니 뜻밖에도(혹은 당연히도) 알코올이 함유되어 있다. 아무래도 운전해야 하는 사람은 조심하는 편이 낫지만 슬쩍 맛을 보니 막걸리에 사이다를 탄 것 마냥 상쾌했다.
사실 종달리에 온 진짜 목적은 자그마한 서점인 [소심한책방] 방문이었다. 손바닥 두 개쯤 되는 좁은 공간에 책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모습이, 지난 세기에는 간혹 존재했으나 현대에 이르러 거의 멸종하다시피 한 존재인 ‘동네 서점’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겉모습만으로도 반갑기 그지없지만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더욱 마음이 설렌다. 이곳은 지극히도 개인화된 서점인 까닭이다.
무척이나 작은 공간이다 보니 장서의 양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가져다 놓는 책들은 자연스레 주인의 선택을 따르게 된다. 그 결과 이곳은 우리가 흔히 방문하는 대형 서점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서점 전체가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하나의 경향성을 띠고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작은 서점의 한가운데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면 주인장의 취향과 관심사와 성격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렇다. 이 서점은 곧 주인이 관심을 기울이는 책들의 집합체이며 동시에 그 주인 자체나 다름없다.
과거, 그러니까 십오 년쯤 전에 내 꿈은 은퇴하고 나서 조그만 책방 하나를 차리는 것이었다. 물론 조그만 책방이니 책장은 모두 내 취향에 맞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 삼백 페이지에 걸쳐 동일한 말을 무한 반복하며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내려 드는 자기계발서와, 자의식 과잉이 넘쳐흐르다 못해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기까지 하는 얼뜨기 에세이 따위는 절대 출입 금지다. 대신 역사와 과학과 문학과 SF로 그득한 나만의 서재를 구축하고 그 책들을 방문자들과 공유하며 판매하는 서점이 나의 꿈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대략적으로나마 계산해본 후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나의 꿈이 이곳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물론 내가 차린 서점이 아니다 보니 내 취향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방향성을 보이는 곳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한때 꾸었다가 깔끔히 접어버린 형태의 꿈을, 나와는 아무 관련 없는 누군가가 이렇듯 실현해내는 모습이 내게는 참으로 기쁘게 다가왔다. 부디 영원토록 망하지 않기를 바라며 아내고 고른 책 세 권과 딸아이가 고른 책 한 권을 집어 들어 계산한 후 밖으로 나왔다. 이곳을 방문한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존재 가치는 차고도 넘쳤기에 굳이 사족을 더 덧붙일 필요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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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삼년전 정도부터 이런 저런 서점들이 늘어난 듯 싶은데 저도 반가우면서 잘 될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부터 앞서더군요. 예전에 구제주 칼호텔 근방에서 딜다책방이란 데서 예쁜 테이프를 구입해서 아직도 애가 잘 가지고 놉니다. 딸이 있으시니 근처에 갈 일 있으시면 들러도 괜찮을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