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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09 16:23
후삼국때도 후백제와 고려가 일리천 전투 당시에 거의 10만씩 동원했었고(이 당시 고려는 기병과 보병이 거의 1:1비율까지 됐으니...기병이 더 많았던가 그랬고)동북9성 개척당시에 별기군이 13만이였나했으니...불가능하지는 않을겁...
17/12/09 16:25
중국과 맞다이할거 아니면 십만씩이나 유지할 이유가...그거 다 민생에 부담이 되는지라 작은정부였던 조선이 그렇게할 이유가...
왜구가 고려말에조차 4만정도 온게 최대치였는데...임진왜란때 16만이 드랍올거라고 당시의 누구도 예측할 수 있는게 아니죠...
17/12/09 16:27
4군6진 같은 북방개척 등등 군양성이 아예 불필요한 건 아니었고 저 지역은 이후로도 여진족을 계속 상대해야했었습니다
다만 거란과의 전쟁을 비교하기엔 좀 그렇죠 여요전쟁은 고려 입장에서 말 그대로 국운을 건 전쟁이었으니깐요 (괜히 당시에 이거 이기고 큰소리 뻥뻥치고 다닌게 아닙..)
17/12/09 16:43
전근대 사회에서 인구 대비 군인의 비율은 후대로 갈수록 점점 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전한 시기와 같이 단순한 징집병이 주를 이루던 시대에는 전체 인구의 2%도 군인으로 돌릴 수 있었으나, 명나라 시대에 들어오면 0.5~1%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군대를 유지한다는 게 국가 재정에 상당한 부담을 주는지라... 극단적인 경우로는 11세기 초의 북송이나 비잔티움 제국은 국가 예산의 70~80%를 군사비에만 때려부을 정도였는데, 냉병기 시절에는 결국 직업군인에게 줘야 하는 월급이 가장 큰 비중을 가지고 있어서... 결국 평화롭다는 것만 확실하면 군인의 수를 줄이는 쪽으로 정책이 결정될 것입니다. 당시 조선의 인구를 1300만 정도로 가정하고 여기서 0.5%만 군인으로 돌릴 만하다고 치되, 대규모 침입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명나라가 쳐들어 올 일은 없고, 여진족도 꾸준히 눌러두었거나 분쟁이 있어도 규모가 작아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상황에, 일본으로부터의 대규모 침공을 예상하긴 어려웠을테니) 조선이 5만의 군대만 가진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17/12/09 17:53
조선의 주전선은 함경도 일대였으니까요. 여진부락을 상대하기에 적합한 규모와 군대로 발전한거였죠. 이 정도 수준으로도 당대의 지역강국이었던게 조선이었죠. 현 상황으로도 충분히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평화를 누렸고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세수도 적게 거두던 나라였으니 불필요한 군사력은 최소한으로 유지했다고 봐야합니다. 그럼에도 함경도 일대 여진족이 융성하지 못하도록 계속 견제하고 노력했죠.
17/12/10 06:03
현재로 따져도 2차대전 즈음에 대부분 선진국군대는 백만을 넘겼지만 지금은 거의 그러지 않는 거랑 같죠. 무기값도 오르고 평화의 시대니까요
17/12/10 14:50
사실 전쟁사를 보면 순간병력은 조금 의미가 떨어지는 수치 같긴 해요. 독소전쟁만 봐도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새로운 사단에 사기(?) 치는 편제에. (독일 보병사단 기준으로 분명 바로바로사 시작 때는 3연대 X 3대대 편제 였는데, 종전직전에는 2연대 X 2대대이면서도 실제 전투기록에서는 반도 못 채우고 싸웠네 어쨌네 하는거보면 참.) 이런걸 보면 평상시 정규군의 적당한 양을 조절하는 평시 국방부 (또는 그것에 해당하는 관련 국가부서)의 역할도 여간 중요한게 아닌것 같아요. 국가 정책도 그렇고. 사실 조선군도 임진왜란때 막 불릴 때는 15만 정도 됬던 걸로 기억이 살짝 납니다. 난리통에 불러주는 그대로 적은거지만요.
17/12/09 17:05
최초의 군사혁명과 두 번째 군사혁명이 만났다는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네요. 보통 혁명과 같이 세대가 갈리는 부분은 뒤에 일어난 혁명으로써 앞의 일어난 혁명의 의미가 사라지곤 하지 않나 싶어서요. 즉 제 생각엔 글 내용대로라도 두 혁명이 만났다기보단 두 번째 군사혁명이 일본에서 소화되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은데요.
17/12/09 17:35
1차 군사혁명은 중화대륙의 높은 인구수를 높은 병사의 숫자로 전환하는 혁명이었다. 그리고 2차 군사혁명은 화약무기에 따른 발전 ("그 해, ..." 에는 다루지 않았던 부분이지만 지금 답글을 달면서 생각해보니 "대포, 범선, 제국" 이나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에서 다루었던 해상 화약 무기 즉 대포범선도 지상의 혁명 못지 않게 '혁명적'이었겠군요.)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그 2차 군사혁명의 병기들을 중화가 최초로 만들어냈던 수십만 대군의 형태로 결합해서 굉장한 군대가 되었다. 라는 식의 서술을 하고 싶었습니다. 처음 글이다보니 아무래도 미흡한 부분도 많은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17/12/10 14:39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이런 '체계' 관련한 책으로 다시 찾아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웃라이어"나 "나와 세계" 같은 책에서 사회제도의 전통을 참 강조하더라고요. 예를 들어, 서구학자들은 수십년 전만 해도, 가나, 필리핀, 한국이라는 3대 후진국 중에 누가 먼저 발전할지는 행운의 주사위 굴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맥아더의 쓰레기통 장미 발언도 생각나네요 흐흐.) 결국은 4대 문명 발상지 바로 옆에 있던 한국은 후진적이고 싶어도 그 동안 안정적인 국가운영을 했던 사회전통이 다시 비슷한 사회자본을 만들어 정상국가가 되었다. 물론 날아오른 부분은 아직 더 설명이 필요하지만요.
17/12/10 14:43
유럽 안에서는 한편, 상업혁명이 스페인에서 시작되어 이탈리아에서 말라죽고 네덜란드에 수렴해서 결국 영국이 최고의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산업혁명은 결국 영국에서 흐흐. 사실 이 책에서 상업혁명의 중요성을 낮추는 부분에는 유럽 자체의 발전에 대한 폄하보다는 아무래도 '자본주의의 맹아론'이니 하는 그 시대 전반적으로 세계문명 전부가 상업발전은 어느 정도 비슷하게 갖추기 시작해서 그래도 유럽은 못이겨! 라고 하는 더 서글픈 논리가 있었다고 봅니다. 이런 걸 보면 "발명이든 발견이든 타국가가 하게 놔두어라" 라는 주제를 가졌던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 라는 책도 참 기발한 책이었습니다.
아 정말 모든 게 지나가기 전에, 세계사가 움직일 때 그걸 분석해서 말하는 게 이렇게 쉬우면 정말 좋겠네요. 더 열심히 공부해서 더 재미있는 내용으로 강해져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17/12/09 19:50
유럽은 병농분리 사회였고, 일본은 병농일치 사회였습니다. 유럽에서 전쟁은 전문 전투기술을 가진 기사와 용병들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세시대의 왕과 영주의 관계는 토지 분배를 통한 무력 제공으로 이뤄진 계약 관계였습니다. 이를 현대로 바꿔서 과장을 좀 보태면, 네이비 씰이나 델타포스 수준의 전투전문가들이 제대로 된 급료를 받고 전투를 치르는 게 중세 유럽의 전쟁이었죠. 유럽이 동원하는 수 만 단위의 병력은 동양의 기준으로 봤을 때 매우 적어보일지언정 그 질적인 수준은 현격히 달랐다고 보아야 합니다.
일본이 임진왜란 당시 패퇴할 수 밖에 없었던 건 결국 그들 사회가 봉건적 한게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겐페이 내전 이후 최초로 성립한 무가 정권.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시작되는 막부 정권은 상징적인 통치자인 천황, 실질적 통치자인 정이대장군이라는 이원화된 일본식의 통치 체제였습니다. 개인적인 능력이 출중하다면 언제든 기존 막부를 전복시키고 자신이 쇼군이 될 수 있는 게 중세 일본이었고, 이는 일본의 지방 사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슈고 다이묘들이 무능하고 무력한 모습을 보여주면 배신을 일으켜 주군을 전복하고 다이묘가 될 수 있던 시대가 전국시대였죠. 오다 노부나가의 오다 가문 또한 오와리(현 나고야)의 기존 주군 가문을 배신하고 가문을 일으켰고, 노부나가의 가문은 그 중에서도 방계였습니다. 그 노부나가 또한 부하 장수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반으로 목숨을 잃었고요. 이런 오다 가의 내홍을 모두 정리하고 일본을 제패한 게 도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임진왜란은 순전 히데요시의 망상으로 발생한 전쟁으로 16만이라는 규모는 일본 전역의 역량을 한계까지 끌어모은 수치였습니다. 지금의 관동 지역인 오다와라 정벌 당시 20만의 병력을 지휘하는 등 대군의 동원력과 지휘력을 보여주긴 했지만 바다 건너 적국을 침공한다는 것은 또다른 문제였습니다. 큐슈와 주코쿠 등 일본 서부의 히데요시 직속 다이묘의 병력은 대부분 차출되었고, 동북과 간토 일대의 변방에서도 병력 동원을 종용받았습니다. 압도적인 히데요시의 무력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섬나라라는 특성은 유럽의 영주들처럼 현 국왕과 타국 사이에 정치적 조율이 가능한 것과는 달랐고 이런 정치적 차이가 동원 규모에서도 일본이 당대 유럽과 격차가 나는 원인이 된 것이죠. 임진왜란 당시 침공한 16만의 일본군이 풍부한 전투 경험과 조선보다 앞선 총기 운용과 전술 활용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결국 조선을 이기지 못한 점. 이것은 침략군이라는 공격자의 불리함과 봉건제라는 일본 사회의 한계 때문입니다. 중앙집권화와 관료제로 운영되는 조선은 국왕이 의주로 파천하는 위기 속에서도 행정력을 발휘해 약 14만의 병력을 동원하며 일본군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평화를 누린 까닭에 얻은 안일함으로 전쟁 초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효율적인 대처를 보여주며 일본군을 몰아냈죠.16세기 일본군이 강한 전투력을 지녔지만 탈아시아급 군대로 볼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세우고 초대 쇼군으로 취임하죠. 각지의 다이묘를 에도에 머물게 하는 참근교대제와 함께 겐나엔부 선언을 통해 병력과 총포를 국가에서 관리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지향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간양록의 저자인 강항과 교류했던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인 하야시 라잔을 초빙해 막부의 이념을 성리학으로 삼아 일본은 중앙집권화를 완료하게 됩니다. 이는 250년 에도 막부의 평화에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무력을 관리하게 되면서 사무라이는 '칼 든 공무원화'되었습니다. 지금의 일본도로 대변되는 사무라이 이미지가 에도 시대부터 고정된 것은 일본인들이 칼을 문화의 정수로 숭상해서가 아닌 중앙 정부의 체제 정비에서 이뤄진 부산물인 것이죠. 군사 전통이 답보했음에도 전반적인 사회 체제를 진일보시켰다는 점에서 퇴행이라곤 볼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일본의 근대화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군의 내실을 쌓을 수 있었던 점은 역시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당시 시대적 상황이 너무 일본에게 운이 좋았다고 봅니다. 쿠로후네 사건으로 일본을 강제 개항한 미국은 곧이어 남북전쟁으로 돌입했고, 유럽 열강은 중국의 개항에 열을 올리며 일본에 비교적 관심을 보이지 않은 점 등 일본이 내실을 다질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습니다. 프로이센의 군사 교리를 받아들여 육군 교리를 확립하고 천황의 군대라 하여 천황이 만세일계의 존재가 되는 군의 정신적 기강이 된 부분 또한 일본군이 아시아 침략에 영향을 발휘한 이유라고 봅니다. 이렇게 일본군이 비대화하며 정치적 견제를 상실하게 되면서 일본군은 군대가 국가를 다스리는 군국주의 국가로 변질되었고 결국 일본의 패망을 불러왔다는 부분은 저도 아직 공부가 많이 필요하네요. 사족으로 화약이 유럽의 군사 패러다임을 바꾸게 된 시초를 저는 스페인 테르시오 전술의 개발로부터 보고 있습니다. 중세 유럽의 중심지인 프랑스, 영국, 신성로마제국 등 유럽 중심부와는 변방에 놓여진 스페인은 동떨어진 지리적 특성에 부합하는 군사 전술이 발달되었습니다. 약 9세기부터 치러진 레콩키스타(재정복) 운동으로 후우마이야 왕조의 수도 그라나다가 함락되는 1492년까지 스페인은 영토 내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거듭해왔습니다. 백년전쟁처럼 소강기와 전란기가 반복되는 양상이었지만, 이런 항시적 긴장상태와 전쟁의 반복은 스페인 군사력의 발달을 촉진하게 되었죠. 이베리아 반도의 뜨거운 기후와 산악지형, 경장갑 이슬람 기병대를 상대하기 위해 스페인은 경무장 경기병대와 보병 중심의 전술이 특화되었습니다. 중장갑 기마대를 운용하던 유럽 중심 국가들과는 달랐죠. 스페인 귀족들도 보병으로 복무하는 걸 부끄러이 여기지 않고 당연시 하였고요. 잦은 전쟁을 치르던 나라였으니 군대의 전투 능력 또한 여타 유럽 국가에 밀리지 않는 수준을 보여줬죠. 1492년은 스페인의 통일과 더불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이기도 합니다. 스페인은 국가적 역량을 통합하고 유럽에 군사적 역량을 투사하기 시작하는데, 이런 잦은 대외 전쟁에서 총병과 창병 방진을 결합한 최초의 총병 전술인 테르시오가 개발되었고요. 30년 전쟁으로 몰락하기 전까지 약 한 세기 가량 유럽에서 무적으로 군림했죠. 저는 이런 모습을 보면 계속되는 전쟁이 군사 혁명을 일으키게 되는구나 싶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소리겠지만요.
17/12/09 20:37
아. 제가 상당히 오랫동안 유럽=봉건제=일본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세계사를 보고 있었는데 그걸 한번에 깨주시는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걸로 수많은 저의 오류들이 고쳐질 것 입니다. 제가 아무래도 책에서 '두 군사혁명을 이어받은 것이 일본' 이라는 논리를 도출해내다보니 조금 과장스럽게 '탈아시아적'으로 서술한 오류도 실수였습니다. 다만 군사혁명이 지속되지 못하고 평화의 아시아라는 틀로 다시 일본이 회귀했다는 점에는 제가 퇴행이라고 적을 수는 있었을 것 같긴합니다. 물론 침소붕대라고 보시면 아닌게 아니라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일본의 근대화에 대해서 길게 다시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항상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니덤 문제라고 하던가요?)를 어렸을 때부터 참 궁금해왔던지라 요즘에는 그것의 연장선인 왜 하필 일본은 근대화 되었는가를 고민하는 중이었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 많은 정리와 도움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파시즘의 탄생은 저도 이걸 역사에서 찾아야할지, 심리학 같은 과학에서 찾아야하는지 고민 중입니다. 공부 많이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스페인은 "그 해, ..."에서 처음부터 다루어집니다. 레콩키스타에 이은 신대륙 발전이 이 책의 프롤로그에 해당합니다. 생각해보니 막상 본문에서는 스페인이 크게 등장 안 합니다. 그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테르시오가 저는 단순히 레콩키스타에 등장한 히에메 (이슬람식 투창기병) 같이 이슬람 전투문화의 답습 및 발전, 그리고 유럽에서의 강대국으로서 반복된 참전에서 등장하는 줄 알았습니다. 엘 시드처럼 스페인 귀족들은 보병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군요? 그러고보니 에도시대의 칼사냥은 중세의 기사도와 테마가 비슷하니 크레시 전투나 아쟁쿠르 전투처럼 사실 중기병은 중세의 최종병기이자 근대의 최후발전장벽적폐가 아니었을까 연상되기 시작합니다. 아 이 스페인이 산업혁명 이후에는 내수 없음으로 한순간에 몰락하다니!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7/12/10 00:40
기독교 질서와 성리학 질서의 차이, 중앙집권된 주변부와 봉건제를 고수하는 주변부의 차이, 병농일치와 분리의 차이 등. 여러 복합적인 요인과 세부적인 차이점들이 일견 비슷해 보이는 봉건제에서 어떻게 다른 군사적 전통을 도출했는가를 한번 얘기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확립된 일본의 군사력이란 것 또한 일시적인 우위에 불과했으며 극복 불가능한 차이가 아니었음도요. 전성기 몽골군처럼 만나는 적은 가릴 것 없이 싸워 이겨낼 정도라면 일본의 군사적 발전상을 논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개전 초기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몰아붙였던 일본군이 명군의 합류와 조선군의 반격에 직면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 남해안 해안가에 왜성을 쌓고 틀어박혀 본국으로부터의 철군 명령만을 기다리던 신세가 되었으니까요. 그러한 차이에서 일본이 유럽으로부터 받아들인 군사 혁명의 영향과는 별개로 주변을 월등히 능가하는 수혜라고는 보기 힘들었다. 이런 부분을 부족한 제 의견이지만 한번 얘기해 보았습니다.
일본의 근대화와 파시즘까지 이어지는 부분은 여러 공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정치학, 외교학, 철학 등 인문학의 여러 갈래를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탐구하여 자신만의 의견을 도출하는게 좋아보입니다. 저렇게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분야는 정답이란 것이 없다고 봅니다. 엄청나게 깊게 공부해야 하는 부분이고요. 역사의 한 갈래인 전쟁사도 전문가가 아닌 이상,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도 세부적으로 알지 못하는 분야입니다. 스스로 배움을 추구하신다면 꺠달음을 얻으시리라 봅니다. 좋은 글을 통해 생각할 여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17/12/09 23:26
역사를 보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현실적인 군사력없이는 나라의 주권은 언제든지 타국에게 침략당할수있죠 지금 이시간에도 힘없는 국가나 분쟁지역 전쟁난민들이 지구상에 많죠
2차대전에서 독일과 일본등이 승리했다면 아마도 우리들은 일본말과 일본글을 사용하는 일본인혹은 식민지 백성들이 되었겠죠 우리는 역사를 보고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역사를 반복하지 말아야죠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한심한게 침략당한 역사를 금방잊고 다시 당하고 또 당하고 다시 당하죠 호위호식하던 위정자 높은분들이 나라 망치면 그피해는 대다수 국민들이 고스란히 받죠
17/12/10 14:44
역시 피를 보지 않은 군대는 약해지고, 피를 보는 군대는 결국 강해진다. 옳으신 분석입니다. 하지만 결국 정치집단이 위기를 맞는 것도 계속된 전쟁인 경우도 많으니, 체급이 되는 능력되는 전쟁을 하는 것도 참 국가의 능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이래서 지금도 미군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우주방위군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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