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래 한 개의 글로 쓸 예정이었던 글인데 내용이 좀 길어지게 되었고, 무엇보다 PGR21 게시판이 글이 너무 길어지면 버티지 못하고 내용이 잘려나가더군요. 그래서 내용을 두세개로 좀 분할 합니다. (2) 편은 내일 올리겠습니다. 이하 사진 자료는 beermania님 지도 자료입니다.
* 나무위키에 있는 '형양 성고 전역' '팽성 전투' 항목을 제가 엔하위키 시절에 작성했던지라, 그 항목에 나오는 내용과 비슷한 부분이 많을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에 중국 땅에서 펼쳐진 '초한 전쟁' 은 한왕 유방과 패왕 항우가 맞붙어 유방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승리한 한나라의 최대 공신은 누구일까요? 전후 한나라 조정에서 공적 1위로 추대받은 사람은 소하였고, 유방에게 가장 신임받았던 인물은 장량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평가로 본다면, 최고의 공신은 바로 '한신' 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인 평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에 대한 '자치통감' 에서 사마광의 평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한신이 첫째로 큰 계책을 세웠다고 하니, 고조와 더불어 한중(汉中)에서 군사를 일으켜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가지고 북쪽으로 가서 위표(魏豹)를 사로잡고, 대(代)를 빼앗았으며, 조(趙)를 무너뜨렸고, 연(燕)을 위협하였으며, 동쪽으로 가서 제(齊)를 공격하여 이를 소유하고 남쪽으로는 초를 해하(垓下)에서 멸망시켰으니, 한(漢) 왕조가 천하를 소유할 수 있던 것은 대개 한신의 공로입니다." (世或以韓信首建大策,與高祖起漢中,定三秦,遂分兵以北,禽魏,取代,仆趙,脅燕,東擊齊而有之,南滅楚垓下,漢之所以得天下者,大抵皆信之功也)
사마광은 직접적으로 '한나라 개국 최고의 공신은 한신' 이라고 평했습니다. '혹자들은 한신이 개국을 위해 첫째로 큰 계책을 세웠다고 한다' 며 운을 띄고, 한신의 공적을 나열한 다음 '한 왕조가 천하를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한신의 업적' 이라고 평했으니, '한신이 첫째로 큰 공을 세웠다' 는 시각에 자신도 동의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한신이 역신으로 규정되었던 당대 한나라 사람이었던 사마천은 비교적 돌려서 자신의 시각을 보여주었습니다.
"가령 한신이 도리를 배우고 겸손하게 양보하며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의 능력을 뽐내지 않았다면, 한(漢)에 대한 공훈은 거의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太公)의 무리에 견줄 수 있고, 후세에 나라의 제사를 받았을 것이다."
주공 단은 공자도 존경했다고 알려진 인물이고, 소공은 그런 주공과 함께 초창기 주나라를 보좌한 연나라의 시조입니다. 태공은 강태공으로 유명한 여상 입니다. 세 사람 모두 주나라 800년 왕조의 기틀을 세운 인물입니다. 사마천은 소하에 관해선 굉요(閎夭)나 산의생(散宜生)에 비견했는데, 이 두 사람은 태전(泰顚), 남궁괄(南宮括) 등과 함쳐 주나라 초창기에 공을 세운 공신들 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을 주나라 초기 정치를 주도한 주공, 그 주공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 소공, 최고의 공신인 태공과 완전히 동일한 반열에 놓긴 힘들어 보입니다.
확실히 한신의 공적은 초한전쟁을 통틀어서도 가장 눈에 띄는 활약임은 분명합니다. 서위왕 위표를 친 후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정형 전투에서 배 이상의 군사를 지녔던 진여를 기적처럼 물리쳐 전쟁의 판도 자체를 완전히 바꿔버렸으며, 제나라와 연나라를 복속시키고 용저를 참살하여 사실상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습니다. 말 그대로 파죽지세에 가까운 기세였고,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창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한신은 분명 최고의 창이었지만, 그가 언제나 공세지향적으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항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BC 205년 ~ BC 204년 경, 전중국 최강의 세력이자 가장 강력한 군단은 바로 서초패왕 항우의 부대였습니다. 이 무렵 항우가 직접 이끄는 군단은 단 한번도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으며, 세력의 기세와 주도권 역시 초나라에 있었습니다. 한신은 최고의 지휘관이었지만, 당대 최강의 부대와 전투를 치룬 적은 없었습니다.
지도에서 북방으로 향하는 점선으로 표시된 부분이 한신의 전투. 진한 → 표시가 되어있는 것이 유방의 군단이며, 좀 더 연한선으로 ← 방향으로 진군하는 것이 항우의 군단입니다.
그리고 이 무렵, 전중국 최강--아니, 사마천의 표현대로라면 그 시대로부터 근고(近古) 이래 이러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는, 그런 항우가 이끄는 부대를 정면에서 마주 보며 맞서 싸운 사람은 유방이 이끄는 한나라군 본대였습니다. 유방의 군대는 항우에 비해 전력도, 사기도,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는 상태였고, 항우가 한번 팔을 크게 휘두르면 벌벌 떨며 피해다니기 바빴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역사적 기록을 읽을때, 그야말로 쾌진격 그 자체인 한신의 전역(戰役)에 비해 유방이 이끄는 군단의 모습은 답답해보이고, 적에게 휘둘리며 무능해보이기 십상입니다. 때문에 이때 한나라군 본대가 맡은 임무의 중요성에 비해, 그 실제 업적은 과소평가 받거나 아예 무시당하는 경향이 없진 않습니다.
하지만 주로 형양(滎陽)과 성고(成皐)를 기점으로 펼쳐졌던 항우와 유방의 대치야말로 초한전 전 시기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제1의 전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방은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항우를 상대로 버텨냈고, 후술하겠지만 처음 시작과 마지막에 이르러 단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버텼습니다. 정형 전투를 위시로 한 한신의 전투는 확실히 예술에 가까운 맛이 있지만, 이 전역에서 유방이 전투, 외교, 기만, 모든 부분을 합쳐 보여준 모습 역시 자세히 살펴보면 대단한 면모가 있습니다.
일단 시작은 그 유명한 팽성 전투입니다. BC 205년 4월, 항우의 본거지였던 '팽성' 에 입성한 유방을 비롯한 제후연합군은 금은보화와 미녀를 취하고 승기에 고양되어 한껏 늘어졌습니다. 유방이 '삼진' 을 돌파하여 이곳으로 오는 동안 길을 가로막던 여타 제후왕들은 모두 속절없이 항복한 상태였고, 한나라가 유리해보이자 사방에서 몰려온 유력자들의 군대 역시 셀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상태였기 때문에, 모두들 승기를 잡았다며 마음을 놓았던 상태였습니다. 자연히 방비는 허약해졌고, 병력의 숫자는 많았지만 워낙 분간없이 수 많은 부대가 섞인 탓에 지휘 계통도 형편 없었으며, 모두들 싸울 마움도 전혀 없던 상태였습니다.
이 당시 항우는 초나라 군 본대를 이끌고 북방 제나라 전역에서 가히 늪에 빠진 듯한 모습으로 허우적 대고 있었습니다. 제나라 주력군은 이미 한차례 격파했지만 적의 지휘부를 괴멸 시키는 것은 실패했으며, 살아남은 제나라 잔당들은 구심점을 잃지 않고 저항하고 있었고, 각지의 농민들은 항우의 지나친 학살 탓에 게릴라로 돌변하여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항우에게 본거지, 팽성의 함락 소식이 전해 집니다.
제나라라는 늪에서 맥을 못추며 비틀거리던 항우는 최대의 위기 상황에 직면하자, 지난날 거록 전투 당시의 날카로움을 일순 되찾게 됩니다. 현재 항우에게 중요한 것은 물론 하루라도 빨리 본거지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제나라에 있는 주력 초나라군 전부를 한번에 빼서 데려가긴 상황상 힘들었고, 설사 그렇게 했다고 한들 대군을 이끌고 내려가는 데는 시간이 걸릴 텐데, 그 소식이 전해지면 적은 분명 대비를 할 것이 틀림 없었습니다.
이에 항우는 정예병 3만을 따로 추려낸 후, 56만 연합군이 버티고 있는 팽성으로 바람처럼 달려갔습니다. 노현에서 호릉, 소현을 거친 항우는 소현에서부터 서진해 새벽 무렵, 득달같이 팽성의 한군을 급습했습니다.
이때 한나라 군을 포함한 제후연합군의 숫자는 앞서 말했듯 56만에 달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너무나 엄청난 숫자기에 과장의 여지가 없다곤 볼 수 없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아예 불가능한 숫자는 아닙니다. 유방이 삼진을 깨고 나왔을때 병력이 수만여명이었고, 서쪽에서 동쪽 팽성까지 진군하면서 얻은 병력들 역시 수만에 달했을 것이며, 제대로 싸움조차 못해보고 유방에게 깨지거나 항복한 제후들의 병력이 또 수만이 더해졌고, 그런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서 몰려온 뜨내기 군웅들의 병력 숫자도 다 합치면 수만에 달할테고, 무엇보다 행렬이 이렇게까지 거창해지며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몰려와서 엥겨 붙은 여타 집 없는 유민들까지 더해지면 56만까진 몰라도 수십만은 상황상 충분히 가능할법 합니다. 문제는, 이런 숫자가 전력으로 전혀 쓸모가 없었다는 전입니다.
군기와 지휘계통 모두 엉터리 그 자체였던 상황에서 새벽에 기습을 받은 한군은 가히 처참할 정도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소현에서 팽성에 이르는 길목에서 처음 전투가 시작될때가 새벽이었는데, 정오가 넘어서까지 싸움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싸움이라기보다도 앞에서부터 기습을 받은 병사들이 우르르 무너질때, 그 소식을 듣고 혼돈에 빠진 병사들이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 탈주하는 토끼몰이에 가까운 형국이었습니다.
분명 정신을 차리고 수습해서 싸운다면 싸워볼만 하겠지만, 애초에 싸울 마음이 없었던 한군은 자기들끼리 무너지며 도주했습니다. 여기서 막무가내로 팽성 동쪽으로 도망친 10만 명은 사수 강가에 이르러 도주로가 막히고 말았고, 이런 상태에서 초나라군의 공격을 받자 자기들끼리 밀고 젖히고 하면서 10만 명이 때죽음을 당했습니다.
남쪽으로 달아난 병사들 역시 신세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수수 강가에 이른 한나라 병사들 역시 초나라 군의 추격을 받아 여기서도 밀치고 젖힌 끝에 10만 명이 떼죽음을 당했고, 수수 강가가 시체로 메워질 지경이었습니다.
추격하는 초나라군과 정신없이 도망치는 유방
군사들이 이렇게 지푸라기처럼 쓰러질 판국이니, 총사령관인 유방 역시 온전하긴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유방은 적에게 포위 되었다가 모래폭풍 탓에 겨우 달아나는 가 하면, 도망치는 와중 항우의 장군이었던 정공(丁公)에게 습격을 받아 직접 칼을 듣고 맞상대를 하면서 자비를 구걸한 덕택에 겨우 도망치기도 했고, 패 지역을 지나가며 가족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초나라군이 거기까지 추격하는 바람에 수레에 태운 자식들 마저 밖으로 밀면서 달아나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유방의 아버지와 부인 마저 샛길로 도망치다가 결국 초나라 군에 걸리는 바람에 포로가 되어 인질로 끌려올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수난을 당하며 도주한 끝에, 하읍(下邑)에 이르러서야 유방은 겨우 한숨을 돌리게 됩니다. 유방의 마누라, 여후의 오래비인 주려후(周呂侯) 여택(呂澤)이 이 지역에 약간의 병사를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옆에 수십 명 밖에 없는 맨몸이나 마찬가지였던 유방은 겨우겨우 부대를 수습하며 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팽성에서 패로, 패에서 하읍으로, 하읍에서 양(梁)으로, 양에서 우현(虞縣)으로.....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서쪽으로의 도주였습니다.
이 당시 유방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첫번째, 병력이 괴멸 당했습니다. 이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 입니다. 다만, 56만이 괴멸 당했다는 팽성 전투의 신화적인 기록의 현혹에서 약간 시선을 돌릴 필요는 있습니다. 팽성에 모인 병력이 수십만에 달했다고 한들, 그게 전부 한나라의 병력은 아닙니다. 애당초 그런 식의 동원은 유방도 불가능했고, 이 '병력' 은 병력이라기보다도 오다가다 모인 패거리, 갈 곳 잃은 유민들이 모인 덩어리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주문(周文)은 진(陳)의 현자였다. 일찍이 항연(項燕)의 군에서 날의 길흉을 점치는 시일(視日)을 지냈고, 춘신군(春申君)을 모시기도 했다. 스스로 용병을 익혔다고 말해서 진왕이 그에게 장군의 도장을 주고 서쪽으로 진(秦)을 치게 했다. 가면서 병사들을 모아 함곡관(函谷關)에 이르자 전차가 천 승에 병졸이 수십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희(戱)에 이르러 군대를 주둔시켰다. 진은 소부(少府) 장한(章邯)에게 역산(酈山)의 형도, 노비의 아들을 사면시켜 모두 징발하여 초의 대군을 쳐서 초를 전부 패배시켰다. - 사기 진섭세가'
한참 진나라를 뒤흔들던 '진승-오광의 난' 이 절정에 달했을 시점에서, 진승이 주문이라는 인물에게 장군의 직을 주고 진나라를 치게 하니, 주문이 진나라를 향해 가는 동안 알아서 모인 군사들이 함곡관 근처에 이를 무렵엔 '수십만' 에 달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럴듯하게 깃발 내걸고 가고 있으니 무리들이 몰려들고, 그 무리들이 몰려서 숫자가 많아 보이니 그걸 보고 또 몰려들고, 여기에 진나라로 간다고 하니 재물 같은게 탐나서 더 몰려들고...
이 수십만 병력은 진나라 최후의 희망이었던 장한이 노역자, 노비의 자식등을 사면시켜 '동기 부여' 를 확실하게 해주고 전투에 나서자, 어이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무너졌습니다. 거의 인지도가 없긴 하지만, 이 희수(戲水) 전투는 초한쟁패기 무렵에 펼쳐진 전투 중에 규모로 따지면 거록 전투 이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전투 입니다. 아무튼 상황이 이러하니, 56만이 대패했다고 한들 주력군 몰살 → 나라 멸망! 이런 흐름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물론 당장 병력이 없어서 어떻게든 수습해야 할 지경이니 타격이 크기는 컸습니다.
두번째. 제후들이 배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방이 팽성에 이르기까지 손쉽게 대군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기세 좋게 진군하는 유방에게 여러 제후들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때 유방의 위세에 굴복하거나 혹은 알아서 동맹을 맺으려 했던 제후들은 항우의 위세에 겁을 먹은 나머지 다시 한번 편을 갈아탔습니다. 새왕(塞王) 사마흔(司馬欣), 적왕(翟王) 동예(董翳)가 항우에게 달아났고, 조왕 조헐과 대왕 진여 역시 항우와 손을 잡았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타격은 서위왕 위표의 배신으로, 위표는 어머니 병문안을 가야겠다며 구라를 치고 달아나 항우의 편에 붙었습니다.
세번째. 반란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곤양에서는 우영(羽嬰)이, 옹구와 외황 등지에서는 특히 반란이 격렬하여 왕무(王武), 위공(魏公), 신도(信徒) 등이, 연에서는 정거(程處) 등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상황이라 진압하기에도 여러모로 성가신 형국이었고, 그만큼 팽성 전투 이후 유방의 권위가 약해진 상황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네번째. 때마침 대기근이 들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자치통감의 기록을 보면,
關中大饑,米斛萬錢,人相食。令民就食蜀、漢。
관중에 큰 기근이 들어서 쌀은 1곡에 무려 1만 전이었고, 사람이 서로 잡아먹었다. 백성들로 하여금 촉, 한에 가서 밥을 먹게 하였다.
한서 식화지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습니다.
漢興,接秦之敝,諸侯並起,民失作業而大饑饉。凡米石五千,人相食,死者過半。高祖乃令民得賣子,就食蜀、漢。天下既定,民亡蓋臧,自天子不能具醇駟,而將相或乘牛車。
한이 일어났을 때는 진의 피폐함을 이어받았고, 제후들이 모두 반란을 일으켜서 백성들은 생업을 잃었으며, 대기근도 들었다. 대체로 쌀이 1석에 5,000천 전이나 하여 사람들이 잡아먹고 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다. 고조는 이에 영을 내려 백성들이 촉군과 한중 지역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을 때도 백성들은 숨기거나 저장할 만한 것이 없었고, 자연히 천자조차도 털색이 같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갖출 수 없었으며, 장군이나 재상이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 한서 식화지
우리가 보통 '소하가 보급해줬다' 라는 부분을 다룰때, 무슨 '쇼미더머니' 라는 식으로 흡사 삼국지 게임에서 정치 99, 매력 99 캐릭터가 쭉쭉 내정 버튼을 찍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관중에서 병력을 생산해서 보내주는 마냥 게임 기분으로 가볍게 이야기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과정은 정말로 고통스럽고 피와 고름이 흘러내리는 광경에 가까웠습니다.
"소하가 관중 지역의 늙고 약해서 군대의 명부에 올라오지도 않은 사람들까지 모두 징발하여 형양에 가게 하니..." - 자치통감
당시 관중 지역은 기록적인 기근이 든 참이었고, 넘쳐나는 물자를 현장에 쭉쭉 보내기는 커녕 백성들이 전부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있는 백성을 벽지인 촉, 한으로 이주시켜 그곳에서 물자를 구하게 하는 형국이었습니다. 이런 마당이니 현장에 보낼 병사도 그렇게 많지 못했고, 때문에 아직 코 찔질 흘리며 엄마 아버지를 찾는 어린 애들에게 맞지도 않는 무기를 쥐어주며 보내고, 나이가 늙어서 찬바람 부는 거리를 조금 행군만 해도 나자빠지는 노인들까지 불러들어 멀리 형양까지 보내는 판이었습니다. 기록으로 보면 참 가볍게 느껴지지만, 그 광경을 옆에서 봤다면 정말로 참담한 모습이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다섯번째, 기세에서 밀리고 있었습니다.
"초는 팽성에서 시작하여, 이긴 기세를 타고 북쪽으로 쫓았으며, 한의 군사와는 형양 남쪽의 경 사이에서 전투를 치뤘다." - 자치통감
기록적인 대승을 거둔 초나라군은 당연하게도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초나라군이 끝을 모르고 서진하고 있는데, 반면 한군은 대패로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고, 흩어진 병력도 아직 수습이 덜 된 상황이었습니다. 유방과 한나라군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당장의 시간은 초나라군의 편이었습니다.
당시 유방은 병력, 기세, 내부 사정, 본국의 형편, 외교 관계 등 모든 면에서 이 이상 나쁜 경우를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최악으로 몰린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부터 진정한 의미의 초한전쟁이 시작됩니다.
??? : "아! 내가 이런 상황에서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