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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29 18:53
시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인지라 저 시들이 얼마나 위대한 지는 솔직히 잘 느끼지 못 하겠지만, 말씀듣고 보니 전자는 도덕 상대주의자 후자는 이상주의자가 쓴 글 같이 다가오긴 합니다. 근데 전자라고 꼭 부패하는 것도 아니고 후자라고 꼭 평생 고결하게 사는 것도 아닌 지라, 서로 반대의 시를 썼다고 해도 나름 의미가 남다를 것 같아요.
17/11/30 09:42
그렇지요. 사실 아주 냉소적으로 보자면, 윤동주가 찬양받는 이유는 별다른 죄를 짓기 전에 죽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가 오래 살아남았더라면 독립운동가로서 독재정권을 지지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건 그저 가능성의 영역일 뿐이니까요.
순수하게 시로만 두 사람을 보자면 OrBef님의 표현이 참 적절합니다. 윤동주의 시는 아름다워요. 그러면서도 탐미적이지 않고 담백하지요. 마치 대지에서 한 뼘쯤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비현실적인 존재로 느껴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만큼 감탄스럽다는 거지요. 이야. 이런 사람이 있다니. 이 세상도 살아볼 만하겠구나. 그런 느낌입니다. 그러니 도덕적 이상주의자라는 표현이 참 좋네요. 반면 서정주는 격렬한 몸부림 같습니다. 진흙탕에서 적과 드잡이질하는 늑대 같다고나 할까요.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세우고, 적을 노려보다, 격렬한 몸싸움으로 뒤엉키며 피가 뒤섞인 진흙을 사방으로 뿌려댑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생명의 본질이라 할 만한 근원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약육강식. 혹은 적자생존. 서정주가 일제나 전두환에게 머리를 조아렸던 것도 딱히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는 자연의 법칙에 철저히 순응했거든요. 그의 시처럼 말입니다.
17/11/29 19:37
서정주는 라캉, 윤동주는 칸트 같군요. 개인적으로 사상가로서는 라캉보단 칸트를, 문학인으로서는 윤동주보단 서정주를 더 좋아합니다.
17/11/29 20:18
서정주가 친일을 시작한 건 1942년. 그의 나이 28세 때부터였는데요.. 최재서의 주선으로 친일잡지 편집을 맡았을 때부터죠. 이십대 초반의 서정주는 서울에 올라와서 정말 거지처럼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서정주가 정식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도 거지 생활 하다가 어떤 주지 스님 눈에 띄어서 중이 되고 나서부터고...그래서 스물 세살의 서정주는
정말 개처럼 헐떡어리며 온 거고..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는 말은 뻔뻔스럽기보다는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갖은 고생 다 한 이십대 초반이 보여줄 수 있는 결기의 표현이죠. 이때까지는..이때까지는 말입니다.
17/11/29 20:23
서정주...참 애증의 이름입니다...
친척의 명예를 위해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려니 드루뭉실한 말밖에 할 수 없네요 제 삶의 아득히 먼곳에 스치우듯 드리워진 인연의 끈이 느껴질때면 참 씁쓸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17/11/29 21:57
서정주의 자화상은 너무 좋아해서 외웠습니다. 현실적이고 처연한 모습과, 그에 합쳐진 미래의 친일파 서정주의 모습까지 그려지면서 감정이 묘하더라고요. 세상에 꺼내는 출사표의 의미를 가지며,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소시민이다" 라는 선언문에 가까웠습니다. 대문학인 서정주는 이미 소시민이 아닌,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주는 이였지만 그의 영혼은 소인배의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합니다.
17/11/29 22:17
작품과 저자의 삶 사이의 괴리는...참 뭐라 말하기 어려운 문제인 듯해요. 너무나 멋진 글을 쓴 사람이 너무나 멋 없는 행동을 한 사람일 때 저는 놀랍니다. 가만 보면 엄청 자주 놀라요. 슬프지만, 그런 게 인간인 듯합니다.
17/11/30 09:44
서정주의 시에서 느껴지는 힘, 자연의 근원적인 힘은 그야말로 어마무시하지요. 스물일곱에 시집을 내고 바로 요절했더라면 그 누구도 그를 한국 현대시의 사조로 추앙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17/11/29 23:27
시 자체로 보면 한국사 전체를 다 뒤져도 서정주를 따라잡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때 <문둥이>라는 시를 잃고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지금 보면 영락없는 차별적 내용이지만) 진짜 인성이 필력의 10분의 1만 따라왔어도... 하다못해 입에 발린 참회의 말이라도 했더라면 그렇게 처량한 최후를 맞고 부정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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