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은 벨푸어 선언 발표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25 단어밖에 되지 않는 이 문서는 중동의 역사에 굵은 획을 그은 중요한 외교문서로 두고두고 회자될 논란거리로 남아 버렸습니다. 스스로도 질문이 많았던 사한이라 이번에 한번 제대로 공부 해보기로 했는데 흥미로운 사실들이 많더군요.
벨푸어 선언은 1차 세계대전이 유럽과 중동을 휩쓸고 있던 1917년 11월 2일 영국정부에 의해 유대인들의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을 팔레스타인에 세우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담아져 발표됩니다. 이 선언은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가 영국 유대인들의 우두머리 겪인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쓴 개인편지라는 특이한 모양새로 공포가 되었습니다. 선언문 초안들 중에는 유대인 국가(jewish state) 건국을 지지한다는 언급이 있었지만 정부내 상당한 반대론 때문에 영국 외무부내에서 여러번 논의와 수정을 겪고는 민족적 고향이라는 표현으로 수정이 됩니다.
이 사건은 수많은 우여곡절끝에 이스라엘 건국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벨푸어 선언이 성취된 그 배경에 대해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음모론들이 따라 붙습니다. 이게 딱히 놀랍다고 할수 없는게, 그 당시 벨푸어 선언을 주도한 영국의 정치인들이 세계에 퍼져있는 유대인들의 영향력과 그에 따른 반사이익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죠.
1) 하임 와이즈만의 등장
벨푸어 선언에 관해 자주 나오는 음모론이 영국이 유대인 금융자본 때문에 벨푸어 선언을 지지한 것이다라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벨푸어 선언이 그 유명한 금융가문 로스차일드가의 수장인 월터 로스차일드가 제안하여 성사시킨 것이라는 것에 주목을 합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금융업계의 큰손이 된건 나폴레옹 전쟁 덕분이었는데 그들은 이후 부를 모아 가면서도 이를 자선사업에 기부하고 영국 정부가 추진했던 아일랜드 기아 구호활동, 크림전쟁,수에즈 운하 지분매입 같은 주요 국책사업들에 융자를 통해 도움을 보태는 방식으로 영국 사회와 정치권에서 명망을 쌓는 동시에 영국내 유대사회의 대표자 위치를 얻어내게 됩니다.
벨푸어 선언 당시 월터 로스차일드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주창하는 영국내 시오니스트 단체의 의장이었는데, 역사가들은 벨푸어 선언에 있어서 로스차일드의 역활은 얼굴마담에 가깝게 보고 있습니다. 벨푸어 선언을 도출하는데 핵심적 역활을 한 유대인은 월터 로스차일드가 아니라 그의 친구이자 유명한 화학자인 하임 와이즈만이었습니다. 영국 역사가 폴 존슨은 그를 역사상 가장 뛰어난 로비스트로 평가합니다.
와이즈만은 무연화약 제조의 주요 원료인 인조 아세톤을 나무대신 곡물로 대량으로 생산하는 방법을 찾아내었고 이는 1차대전 중 무연화약 생산이 중요한 현안이었던 영국정부의 고민을 해결해주게 됩니다. 당시 영국은 칠레에서 무연화약을 수입해 오고 있었는데 독일의 잠수함작전으로 곤경에 처하고 있었습니다. 와이즈만이 영국의 지도층을 상대로 유대인 국가 건설의 필요성에 대해 로비할수 있게 한 정치자산은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1914년부터 와이즈만과 그의 동료이며 자유당 정치인인 허버트 사무엘은 신문들을 통해 유대인 국가건설 캠페인을 벌이면서 당시 자유당의 애스퀴스 총리를 상대로 로비를 펼쳤지만 애스퀴스는 유대인들과 시온주의에 비호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16년 12월 애스퀴스가 쫓겨나고 로이드 조지가 거국내각 총리가 되면서 시온주의 운동은 큰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총리가 되기 전 군수품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로이드 조지는 전시노력에 대한 와이즈만의 공헌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로이드 조지는 또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으로써 유대인들과 그들의 역사, 종교에 매우 호응적이었습니다. 그는 어릴때부터 성경을 탐독한 덕에 영국 역대총리들의 순서보다 이스라엘 왕들의 계보를 더 빨리 알고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죠. 로이드 조지는 또한 웨일즈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는데 와이즈만은 약소민족들인 유대인,켈트족의 공통점을 내세우며 그를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와이즈만의 로비 대상으로 로이드 조지만큼 중요했던 인물이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인데 그는 유대인들에게 상당히 호응적인 정치인이었지만 1906년 와이즈만과의 첫 대면에서 시오니스트들이 이전에 영국정부의 동아프리카 정착안을 거부했던 것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이 대화에서 와이즈만이 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역설한 발언이 꽤 유명한데 아래와 같습니다:
와이즈만: 그럼 제가 당신에게 런던대신 파리를 제안하는 가정을 해보죠.
벨푸어: 와이즈만 선생님, 저희는 이미 런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와이즈만: 그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런던이 늪이었을때 저희는 예루살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14년 와이즈만이 벨푸어를 다시 만나 독일의 예를 들면서 현지 동화를 하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유대인들의 애환에 대해 설득을 하자 벨푸어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을 받고 시온주의의 열정적 지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2) 영국의 전략적 고려
이쯤에서 던져봐야 할 질문이 과연 영국 정치가들이 종교적 신념이나 유대인들에 대한 동정심 때문만으로 팔레스타인내 유대인 국가 창설을 찬성한 것일까요? 물론 아니라고 봐야 될겁니다. 영국이 중동에서 오스만 제국과 전쟁에 돌입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쟁 이전에는 딱히 중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유대인 국가 건국이 이제는 충분히 가능할 뿐만 아니라 영국의 국익에 바람직해 보이기 시작한 거죠.
로이드 조지 내각은 이스라엘 성립은 영국의 국익에 3가지 방면으로 도움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첫째, 유대인 국가는 수에즈 운하와 이집트를 타 아랍 국가들 내지 프랑스 영토로부터 분리되게 할 완충지대 역활을 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둘째, 1916년 애스퀴스 내각이 프랑스와 전후 오스만 제국 영토 문제 처리를 다룬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체결했는데 여기서 팔레스타인은 국제적(영프러) 관리 아래 들어가게 될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1년도 안되어 로이드 조지와 사이크스-피코의 추진자였던 마크 사이크스는 협정을 뒤집고 팔레스타인을 영국의 관할 아래 두는 것을 원했는데, 유대인 국가 건설이 이를 가능케할 명분으로 보았습니다. 셋째, 국제적 유대인(international jews)들의 환심을 사면 영국에게 유리하도록 자국내에서 정치적 압력을 행사할 거라고 보았습니다.
1917년 10월에 벨푸어는 몇달간의 외무부내 선언 수정과 시오니스트들과의 논의 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고향을 설립하는 안건을 전시내각에 드디어 제출합니다. 여기서 그가 내각 동료들에게 내세운 주 찬성논리는 미국과 러시아내 유대인들 대다수가 시온주의 지지로 돌아섰기 때문에 그들의 환심을 사면 러시아의 볼셰비키주의자들이 전쟁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을수도 있고 전후 과정에서 미국이 영국에게 이롭게 나올 것이라는 분석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영국이 선수를 치지 않으면 국제적 유대인 여론이 독일에게 기울어질 수도 있다는 첨언도 합니다. 벨푸어가 이런 판단을 내리는데 있어서는 와이즈만에게서의 인풋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와이즈만은 세계 정계의 배후에 강력한 유대인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유럽내 광범위한 선입견(시온 의정서)을 되리어 유대인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한 것이죠.
3) 미국과 러시아
1917년 혁명을 앞둔 러시아와 관하여 흥미로운 점이 볼셰비키의 일반 조직원들 중의 5%정도가 유대인이었지만 지도층에는 상당한 규모로 유대인들이 포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917년 레닌이 혁명을 지도하기 위해 수립한 정치국을 보면 이를 이룬 중앙의원 7명 중 스탈린 등 2명을 제외하고 레닌,트로츠키를 포함한 나머지 5명은 최소한 어느 정도의 유대인 혈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건 유대인들이 러시아 제정 치하에서 박해를 심하게 당했던 것과 관련이 있는데, 볼셰비키보다도 멘셰비키쪽에 유대인들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벨푸어는 레닌이 유대인이라고 믿고 있었다는데 사실 레닌의 유대인 혈통이라는게 소련 붕괴쯤에 들어서서 밝혀진 것이지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이걸 알수가 없었습니다.
영국의 기대와 달리 볼셰비키 지도부 인사들은 시온주의에 되리어 적대적이었고 러시아내 유대인 사회는 시온주의를 위한 조직화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설령 조직이 되어 있었다고 해도 임시정부때나 영향이 있었을 법하지 볼셰비키들에게는 씨도 안 먹혔겠죠.. 벨푸어 선언 발표 후 몇칠도 안되어 11월 7일에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소련은 얼마 후 독일과 단독적으로 평화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을 해버립니다.
1917년 초반까지만 해도 중립국이었던 미국이 연합국측에 서서 참전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던 영국정부는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인 루이스 브랜다이스와 펠릭스 프랭크퍼터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월슨은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써 로이드 조지와 같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윌슨과 같이 브랜다이스와 프랭크퍼터 모두 진보적 개혁주의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런 점들 때문인지 윌슨은 그 당시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는 가장 친유대적인 행보를 보여줍니다. 브랜다이스는 당시 미국에 팽배했던 반유대감정에도 불구하고 윌슨에 의해 대법관 후보로 지명이 되고 의회의 비준을 받아 미국 역사상 최초의 유대인 대법관이 됩니다.
벨푸어 선언에 대한 대표적 음모론 중 하나가 브랜다이스가 유대인이라 월슨을 설득하여 미국을 영국편으로 1차대전에 개입시켰다는 것인데 이건 시점상으로도 신빙성이 없고 증거도 없습니다. 벨푸어 선언은 1917년 11월이고 미국의 1차대전 참전은 같은해 4월입니다. 1915년 루시타니아 여객선이 침몰되었을때 이미 윌슨은 독일에게 무제한 잠수함전을 멈추지 않으면 미국이 연합국편에 설 것이라고 경고까지 하였고 독일은 잠시 무제한 잠수함전을 중단했습니다.
하지만 1917년에 들어서서 독일은 다시 미국을 상대로 무제한 잠수함전을 개시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미국이 참전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에 멕시코가 미국을 상대로 전쟁에 참전하도록 전보로 종용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1917년 1월 영국에 의해 독일 외교부의 멕시코행 전보가 감청되어 미국에 폭로되자 미국 여론은 독일에게 분노하게 됩니다. 멕시코는 참전을 하지 않게 되지만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전을 다시 실시하게 되죠. 중립을 유지하려 했던 윌슨은 1917년 4월 2일 대독일 전쟁을 의회에 선포하게 됩니다.
(화폐전쟁이라는 불쏘시개를 쓴 저자는 벨푸어 선언이 미국이 전쟁선포를 하고도 유럽전선의 참전에 미적거리자 파병을 이끌어 내려고 영국이 내놓은 방안이었다고 하는데 어이가 없는게 전쟁선포를 한다고 당장 대서양 반대쪽 대륙에 파병을 할수 있는게 아니죠. 2차대전때도 미국이 히틀러에게 선전포고를 당하고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는데 1년 걸렸습니다.)
1917년 5월, 미국의 선전포고 직후 벨푸어가 유대인 고향 설립에 대한 윌슨 대통령의 지지를 받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게 됩니다. 윌슨의 지지가 필요했던 이유가 벨푸어 선언은 이전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내용을 뒤집는 것으로써 프랑스로부터 비난을 받을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지원사격을 바랐던 것입니다. 벨푸어 선언에 앞서 프랑스는 이미 시온주의 로비에게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 부흥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비밀리에 한 바 있었습니다만, 와이즈만을 비롯한 영국의 시오니스트들의 그들의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드레퓌스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기에 프랑스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벨푸어는 미국에 도착하여 당시 막 대법원장 지명을 받았던 브랜다이스와 윌슨의 또 다른 최측근 에드워드 하우스 대령를 만나게 되는데 그들로부터 윌슨 대통령이 벨푸어 선언을 지지하게 될 것이고 영국과 프랑스간의 비밀조약인 사이크스-피코 협정(훗날 러시아의 볼셰비키에 의해 세계에 공개됩니다)은 지지하지 않는다는 답을 받습니다. 실제로 월슨은 몇달 후 벨푸어 선언에 대한 지지를 표하는데 아마도 브렌다이스가 윌슨을 설득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의 약속에 결정적인 힘을 얻은 로이드 조지 내각은 1917년 11월 2일 벨푸어 선언을 발표하게 됩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벨푸어 선언이 맥마흔-후세인 서한과 달리 국제법의 기반이 되어 이스라엘 건국으로 이어진 주 이유로써 시온주의 로비가 영국만이 아닌 다른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동의도 같이 끌어내는 전략을 추구했다는 사실에 평가를 내립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강력한 카리스마를 소유하고 있었던 동시에 자신을 정치적으로 현지화는데 성공한 와이즈만이라는 사람의 존재 그리고 국제 유대인이라는 미스테리한 존재의 위력에 대하여 상당한 기대를 걸었던 영국 정치인들의 판단미스 역시 중요한 요인으로 치죠. 특히 마지막 요인은 영국 정치인들만이 예외가 아니었던게 벨푸어 선언이 발표된 직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독일이 국제 유대인들의 여론을 포섭하는데 있어서 뒤쳐졌다며 안타까워 했다고 합니다.
이런 저러한 자료들을 보면서 영국 정치인들이 뛰는 입장이었다면 시오니스트들은 날고 있었다는 느낌이 내내 강하게 들었는데 그러면서도 한가지 놀라운 사실이 눈에 띄더군요. 1918년 1월 로이드 조지가 자신의 외무장관과의 상담도 없이 오스만 제국측에 연락을 해서 그들이 독일과의 동맹에서 이탈을 한다면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제국 치하에 남도록 하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맥마흔-후세인,벨푸어,사이크스-피코만으로도 모자라 영국은 중동을 가지고 무려 4중 플레이(!)까지도 할 의사가 있었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