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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7/05/08 14:32:47 |
Name |
깐딩 |
Subject |
[일반] 동물의 고백(11) |
2017년 1월 26일
설 연휴 시작 전날이었다.
고향에 내려가기 위해 KTX를 탔다.
여자고 뭐고 모든 걸 다 포기하고 내 복근으로 빨래하는 그날까지 운동에 전념하며 살려고 결심했다.
KTX가 출발함과 동시에 맥주를 한 캔 개봉하고 휴대폰을 꺼냈다.
마지막 접속이 언제인지 까먹은 소개팅 앱에 한번 접속해본다.
'이놈들 이러고 노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
한번 둘러본 후 미련 없이 앱을 삭제했다.
모임 앱에 접속했다.
아무 생각 없이 이 모임 저 모임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미련 없이 삭제하려고 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모임이 눈에 들어왔다.
#☆☆동네 주민, 직장인 모여요! 같이 점심 먹고 산책해요!#
정말 이상한 모임이었다.
아니 모임이라고 하기도 뭣 한 게 그 모임엔 사람이 모임장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보통 저녁이나 주말에 모여 친목을 빙자한 술자리를 갖는 게 보통이고
취미활동을 공유하는 모임이 99%인데
이 모임은 특이하게도 평일 점심에 모여 점심 먹고 근처 산책하자는 모임이었다.
게다가 이런 모임은 지역으로 나눠서 서울, 경기 또는 강남, 홍대 이런 넓은 지역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데
이 모임은 내가 살고 있는 특정 동네를 정확하게 지칭하고 있었다.
이런 모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호기심에 한번 가입해 보기로 했다.
뭐 앱을 삭제하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
모임에 가입하고 아무 말 없이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다.
모임이 살아있으면 알아서 말을 걸 것이고
죽었다면 아무런 반응이 없겠지, 괜히 나서서 내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가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임장이 채팅을 했다.
-와 언제 오셨어요? 오신 지도 몰랐네요. 반가워요! 첫 회원이네요!
모임장이 엄청 반가워했다.
또 저렇게 인사하는데 안 받아 줄 수가 있나.
내려가는 길 몇 시간 동안 지루했는데 잘 됐다 싶어 나도 채팅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한 20분 전에 가입했어요.
-여기 주민이신가요? 아님 직장이 여기신가요?
-직장도 사는 곳도 다 여기에요.
-집에서 가깝게 직장 잘 구하셨네요. 저도 직장이 여기인데 지나가다 봤을 수도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내가 지루할 틈도 없이 모임장이 빠른 속도로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전 올해 꺾임요.
-저는 올해 30 찍었습니다.
-오! 저도 30ㅠ
꺾였다는 게 30을 말하는 거였구나.
-저희 비슷한 게 많네요. 직장도 같은 동네고 나이도 똑같고. 혈액형은 뭐예요?
-A형이에요. 부모님도 다 A형
-와! 저도 가족들 다 A형이에요. 진짜 신기하다!
모임장이 심심했는지 아님 첫 회원을 놓치기 싫었었는지 정말 열심히 채팅을 했다.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 점심 모임이죠?
모임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네, 언제 같이 점심 드실래요? 아님 사람 더 모이고?
채팅을 주고받다 보니 모임장이 어떤 사람인지 굉장히 궁금해졌다.
여자 아이콘을 쓰고 있었는데 정작 자기 사진은 없고
진짜 여자인지 넷카마인지도 궁금하고
뭐 하는 모임이길래 점심 모임을 만들었으며 왜 이렇게 적극적인지 호기심이 마구 생겼다.
-설 연휴 끝나고 수요일에 같이 점심 드실래요?
-2월 2일요?
-1일요.
-여기 근처에 맛집 있나요?
-느린 마을이라는 곳이 있는데 가보신 적 있으세요?
-아뇨~ 재밌는 상호네요. 여기 술 파는 곳은 아니죠?
-술도 파는데 점심엔 점심 메뉴만 따로 해요. 술은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요?
-네, 저 술은 안 마셔요.
-이 근처에서 몇 안 되는 분위기 괜찮고 맛도 좋은 곳이에요.
-크크 넵~
그렇게 약속을 잡고 집에 도착해 정신없이 설을 보내고 있었다.
친척들을 뵙고 친구들을 보고 부모님과도 술 한 잔 기울이며 여유로운 명절을 보내고 있었다.
설 연휴 일요일에 뜬금없이 모임 앱의 채팅방 알림이 울렸다.
아, KTX에서 가입했던 그 모임이다. 다른 사람이 들어왔나 보다.
하고 채팅을 확인했다.
-설 잘 보내고 계세요?
어? 회원 목록을 보니 새로 가입한 사람이 없다. 나뿐이다.
-네, 설 다 보내고 이제 좀 놀러 다닐까 했더니 비가 와서 못 나가고 있네요.
-아~ 여긴 눈 와요ㅠ
그렇게 또 모임장과 두어 시간을 채팅으로 보냈다.
-아~ 카톡 할래요?
모임장이 카톡을 하자고 한다.
그래 카톡 프로필을 보면 니가 진짜 여자인지 넷카마인지 내 장기를 빼가려고 하는 조선족인지 알 수 있겠지.
-제 아이디 알려드릴까요?
-네네~
잠시뒤 카톡이 울렸다.
-와 카톡도 깐딩이시네요 크크
그렇게 카톡을 주고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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