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줄때는 앉아서 주고 받을때는 서서 받는다'더니 이제 그 녀석에게 매달리는건 문돌이가 되었다. 그 녀석이 약속한 일주일 동안
문돌이는 매일같이 그 녀석의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들락날락 하면서 근황을 파악했다. 그 녀석은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잊은건지 매일같이 자기 여자친구랑 데이트 한걸 찍어서 올려댔다. 그 사진 중에는 그 녀석이 말했던 커플링 사진도 있었다. 화가 난다. 문돌이는 빌려준 돈을 언제 받을지 아니 받을수나 있을지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그 녀석은 천하태평하게 지 여자친구랑 어디가서 뭘 먹었는지 뭐하고 놀았는지 시시콜콜한것까지 모두 찍어 올린다. 돈 없다고 징징되던 놈이 왜 밥은 아웃백이나 베니건스 가서 먹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니, 여자친구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런데서 먹는거 까지는 이해한다 쳐도 왜 그걸 버젓이 미니홈피에다 올리는건지 이해가 되지않는다. 최소한 돈 없는 코스프레라도 해야 할것 아닌가? 가뜩이나 남들 다 있는 여자친구도 없어서 아웃백을 한 번도 못가본 문돌이기에 그의 분노는 더욱 거세어 진다.
"하...x바 아웃백에서 고기 처먹을돈 있으면 내 돈이나 갚지....아니 근데 이딴 사진은 뭐한다고 처올리노 도라이가 이새끼 진짜'
당장이라도 문돌이는 방명록에 '아웃백에서 고기 처먹을 돈 있으면 돈 갚아라'라고 적고 싶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없는 문돌이다. 하지만 그 녀석에게 '니는 돈 없다고 안갚더니 여자친구랑 아웃백도 가고 돈 쓸거 다쓰고 다니네? 나는 다 알고 있다' 라는걸 어필 하고 싶다. 강력하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속이 뒤집혀서 살 수가 없을거 같다. 최대한 대범하고 쿨 해보이면서 그 녀석을 뜨끔하게 해줄 방법을 문돌이는 고민한다. 장고 끝에 문돌이는 키보드에 손을 올린다. 그 녀석이 아웃백에서 찍은 사진에 댓글을 남긴다.
"아웃백하면 역시 부시맨 브레드지^^. 스테이크도 묵고 마이 뭇네 크크크 한 돈 '십만원' 나온거 아니가?크크크크"
이만하면 충분히 알아 먹었을꺼라고 문돌이는 생각한다. 한 줄에 모든것이 함축되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잘 전달될듯 하여 내심 뿌듯하다.
그러나 한편으론 아웃백 한번도 안가봤으면서 가본척 할려고 인터넷 검색까지 해본 자신이 몹시도 비루하게 느껴진다. 그냥 어서빨리 약속했던 일주일이 지나 이 고통에서 해방되길 바라는 문돌이.
그리고 어느덧 약속했던 날짜가 돌아왔다.
어느덧 문돌이는 조급함이나 불안함, 기대감 따위는 없어졌다. 오히려 차분해지고 초연해지기까지 한거 같다. 일주일동안 그를 괴롭히던 심적 고통에서 몸부림치다보니 어느새 고통에 적응하여 그냥 대충 포기하고 그 새끼 평생 저주하고 살겠다라는 마음을 먹은거 같다.
점심 무렵 그 녀석에게서 문자고 온다.
"집이가? 나온나. 느그집 앞이다."
"oo"
더 이상 그 녀석에게 쿨하게 보이고 싶지도 대범한척 하는것도 싫고 그냥 평생 저주하고 살꺼란 마음으로 성의 없는 답장을 날린다.
그리고 옷도 대충 방바닥에 있는거 주워입고 나간다. 집 앞에서 그 녀석은 활짝 웃으며 문돌이를 기다리고 있다.
"방금 일어났나?"
"어 자다가 니 문자받고 일어났다"
"지금 몇신데 아직 자노 크크 자 여기 니 돈. 잘썼다. 늦어서 미안하고."
'헐??'
문돌이는 속으로 무척 당황했다. 사실 문돌이가 집에서 나올때까지만 해도 그 녀석이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다시 또 사정사정 하면서 기일을 미룰꺼라 생각했기에 이러한 결과가 너무나도 놀랍다.
'진짜 아웃백 사진에 단 댓글이 이 새끼의 영혼을 울렸나?? x바 머지 이거'
"어 고맙다"
"고맙기는 니 돈인데. 늦게 줘서 내가 미안하지"
아니다. 지금 문돌이는 돈을 갚아준 그 녀석에게 진심으로 고마워 하고 있다. 정말 다른 이유 없이 돈을 돌려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근데 있다이가...진짜 미안한데"
"응? 왜? 또 뭐?"
'근데?? 이 x바 여기서 근데가 나오면 안되지. 이 x바새끼야' 갚자마자 돈을 빌리려는 심산인줄 알고 문돌이는 목구멍에서 욕이 삐져나오는것을 간신히 막아낸다. 아마 문돌이 인생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반응속도와 절제력이었을 것이다.
"그때 말한거 있다이가. 내 여자친구랑 여자친구 친구랑 같이 술묵기로 한거, 그거 안되겠다.
어제 여자친구랑 싸워가지고 지금 분위기 별로 안좋다."
"아 그거 에이 뭐 그거 신경쓰지마라. 에이 뭐 그거가지고. 나는 또 뭐. 뭐 그거가지고 진짜 에이"
어차피 그 술자리는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에 문돌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여자친구랑 풀리면 연락할께. 간다~"
"그래 드가라"
모든것이 해결됐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문돌이는 졸렬하고 음흉했던 자신의 과오를 떠올리며 '나는 왜 남들처럼 대범하지 못한가?'에 대하여 반성을 한다. 앞으로는 사람들을 믿고 좀 더 사나이답게 행동하리라 굳게 다짐한다.
그리고 다음날 드디어 타입원을 사러 갈 생각에 들뜬 저녁.
그 녀석의 전화가 온다. 여자친구랑 화해했다고 술 한잔 같이 먹잔다. 마침 여자 친구 친구들도 있으니 어서 준비해서 나오라고. 결정적으로 그 친구들 이쁘단다. '세상이 이렇게나 아름답구나' 느끼며 문돌이는 재빨리 머리를 감고 핑크색 개*비 왁스를 머리에 곱게 펴바르고 서둘러 하단에 있는 준코로 향한다. 그 녀석이 오늘 술 쏜다고 했지만 그래도 예의상 3만원 정도는 기분좋게 쓸 요량이다.
그렇게 도착한 준코. 분위기는 적당히 무르익어 다들 문돌이를 환영한다. 그리고 그 녀석 말대로 친구들의 상태가 썩 나쁘지 않다.
얼굴만 괜찮은게 아니라 흥도 많고 리액션은 아주 훌륭하다. 그런 훌륭한 리액션에 발 맞추어 문돌이의 드립도 오늘 포텐이 터진다.
좌중을 압도하는 드립에 분위기는 하하호호. 살짝 살짝 여자애들과 스킨쉽도 주고 받는다. 랜덤게임도 열심히 하고 흑기사도 열심히 해주는
우리의 문돌이. '됐다. 오늘이다.' 오늘 끝장을 보기로 한 문돌이는 소주와 맥주를 그야말로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간을 추가하고 안주도 추가하고 다들 술에 취해 혓바닥이 꼬여 갈때쯤 문돌이가 화장실을 가려는데 그 녀석이 따라온다.
그 녀석도 많이 취했는지 눈에 초점이 안 맞고 가만히 서있지를 못한다.
"야 오늘 좀 많이 나올거 같은데 일단 니가 계산해라. 내가 담에 줄께"
"그래 알겠다. 임마 걱정하지 마라."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문돌이는 호탕하게 계산을 약속한다. 그렇게 준코를 나온 시간이 새벽 2시.
2차를 가자고 문돌이는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그 녀석과 여자들은 술에 취해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그냥 주저 않아만 있다.
"야 안되겠다. 오늘은 집에 가자. 더 마시면 진짜 죽을거 같다. 얘들 내 여자친구랑 같은 동네 사니까 내가 여자친구랑 챙겨서 갈께"
"한잔 더 묵지. 와 벌써 갈라고?"
"됐다 됐다 담에 보자. 드간다이. 니도 조심해서 드가라"
"그래 연락할께"
그렇게 그 녀석과 여자들은 택시를 타고 떠나고 문돌이는 혼자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간다. 집에 가자마자 씻지도 않고 외투만 바닥에 팽개쳐놓고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든다. 다음날 메스꺼움과 두통으로 일어난 문돌이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지갑부터 확인한다. 정확히 말해 지갑안에 있는 영수증의 금액부터 확인한다. '어제 얼마나 쓴거지? 아... 좀 많이 나온거 같던데' 지갑 안에 들어 있는 영수증에 적혀 있는 금액 12만 7천원.
그 이후 그 녀석은 문돌이를 노골적으로 피했고 문돌이는 그때 본 여자들과 다시는 못 봤으며 결정적으로 타입원의 유행이 끝날때까지
결국 타입원은 살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녀석과 다시 만나 화해를 한건 그로 부터 3년뒤 서로 제대하고 한창 심심할때 우연찮게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만취해버린 문돌이가 없던 일로 하자면서 과거를 청산해버린 것 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문돌이는 다시는 그 녀석에게 돈 뿐만 아니라 어느 무엇 하나도 빌려주는 일이 없었다. 차라리 줬으면 줬지.
그 녀석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도.
'남한테 먼지 한톨이라도 빌리지 말고 빌려주지도 말자'가 문돌이의 인생 기조가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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