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부모님은 평범한 시민이였다
평범한 시민에 Ctrl+C, Ctrl+V를 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부산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결혼 후 서울로 올라왔고
만만치 않은 서울살이에 소시민답게 아둥바둥 살았다
반면에 친척들은 부자였다
공부를 잘했든 연줄을 잘 잡았든 돈을 잘 물려받았든
나름 대단한 분들이 많았고
우리집이 그중에서 가장 가난했다
하지만 간혹 친척들모임이 있으면 부모님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왜?
내가 가장 공부를 잘했으니까 -_-
누나는 상당히 공부를 잘했고 나는 매우 잘했다
잘난 친척들 사이에서 부모님은 기가 죽지 않았다
"우리 아들이 올백을 맞았습니다"
"어이 잘했네!"
'아빠 제가 백점 맞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과목 백점맞은 것을 올백이라고 하지 않는다구요ㅜㅜ"
난 종종 부모님이 푼수처럼 보였고 부끄럼이 유난히 많던 나는 더욱 부끄러웠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회사의 정치에 밀려난 아버지는 사업을 하셨고
어찌보면 당연하게도 사업은 망했다
그나마 있던 소시민의 지위도 위태로워졌다
아버지는 빌린 돈을 갚지못해 구치소에 가는 일이 생기는가 하면
어머니는 카드빚을 막느라 산수에 탁월해졌다-_-;;;
그러나 부모님은 기가 죽지 않았다
왜?
내가 매우 공부를 잘했으니까 -_-
딱히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거창한 생각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에게 힘이 되겠다는 철든 생각도 없었다
그냥 유달리 지기 싫었고 지기 싫은 마음에 열심히 했다
수능을 보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교 합격통지를 받던 날
부모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셨다
당시 아버지는 때늦은 바람을 피우다 걸린 상태였고 어머니는 미친듯이 화를 내고 있었다
이혼하냐 마냐 하는 흉흉한 상황에서 나의 합격과 더불어 모든게 좋은게 좋은 일이 되었다
참 놀라운 일이다
대학교에 가서 열심히 놀았다
집은 여전히 가난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놀고 싶은 이유는 많았고 딱히 공부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놀고 또 놀고 또 놀았다
그렇게 몇년을 놀았을까
어느 때처럼 친구들과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새벽에 들어가는데 일나가시는 어머니를 만났다
부잣집 막내딸로 곱게 자란 어머니는 아버지의 몇번의 사업부도와 더불어
김치장사 보험외판원 목욕탕카운터 등 다양한 테크트리를 밟았고
그즈음 아이스크림공장에서 포장일을 하고 계셨다
"우리아들 술마셨니? 피곤하지? 집에가서 푹쉬어~"
그순간 술이 확깨었다
여전히 공부를 해야 할 이유는 찾기 힘들었지만
어머니가 새벽같이 일나가시는데 밤새도록 탱자탱자 놀 이유는 없었다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웃기게도 아버지의 사업이 갑자기 풀렸다
10년간 꾸준히 망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사업이 거짓말처럼 풀렸다
단체로 신용불량자가 될 뻔한 상황에서 차곡차곡 쌓인 빚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평생 처음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공부를 했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공부하는 습관은 다 사라졌고 몇년간 놀던 관성만 남았다
머리는 굳었고 열심히 살던 친구들은 앞서 나갔다
마음은 초조해졌고 스스로가 초라해졌다
점점 자신이 사라져 가던 나에게 어머니은 평생 하시던 말씀을 하셨다
"우리 아들은 무조건 될꺼야"
그리고 난 평생했던 질문을 던졌다.
"왜요?"
어머니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우리 아들이니까"
'세상은 그렇게 쉽지 않다고요 전 그렇게 잘나지 않았어요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어머니의 믿음은 소박했고 합리성이라곤 전혀 없었지만 단단했다
사이비종교를 믿는 신도의 심리가 이럴까?
누가봐도 선량한 상식을 가진 현대사회의 보통 시민인데
유독 자식문제에 있어선 왜 이렇게 비합리적으로 변하는 것일까?
그러나 어머니의 비합리적인 믿음은 이상하게 힘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종종 하소연하셨다
"너네 엄마는 왜 너랑 싸우고 나한테 이혼하자고 하냐 ㅜㅜ"
삶에 지쳐 종종 어머니한테 스트레스를 풀면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푸셨고
아버지는 그냥 당하셨다 -_-;;;;
역시 자식은 죄인이고 엄마에겐 돈주는 남편보다 돈쓰는 아들이 최고다 -_-;;;;;;
그렇게 2~3년을 공부했을까
마침내 합격자발표날이 다가왔다
난 내심 합격을 기대했건만 보기좋게 떨어졌다 -_-;;;;
역시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독서실에서 유난히 긴 하루를 보내고 집에 오니 아버지께서 맞아주셨다
술에 취하신 아버지께선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껴안으며 말씀하셨다
"우리 아들 괜찮지? 아빤 괜찮아 난 아들 믿는다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봐 아빠가 평생 밀어줄께"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던 나를 그렇게 아버지는 몇분을 껴안다 들어가셨다
같이 기다리던 어머니께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너네 아빠 많이 속상했나보더라
저녁먹다가 괜히 옆사람과 시비가 붙어서 평생 술마시고 주사한번 없던 양반이었는데 막상 너오니 한마디도 못하고"
할말이 없던 나는 더더욱 할말이 없어졌다
다시 냉정한 세계로 돌아와 공부를 시작했다
정신없이 공부하던 중 누나가 결혼허락받는다며 남편을 데려온다고 하였다
그동안 몇번 들었지만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한귀로 흘려듣곤 했는데
도저히 그날 행사는 빠질 수가 없었다
"오면 술먹여야지 사람은 술을 먹여봐야 알 수 있어"
아버지께선 자신있게 말씀하셨다
밖에선 온갖 무게를 다 잡으시지만 자식들앞에선 큰소리 한번 못하는 분인데 과연???????
이윽고 매형이 왔다
"자네 술 좀 하는가?"
"잘은 못합니다"
"그럼 하지 말아야지 몸에 안맞으면 안마시는게 좋아"
그럼 그렇지 -_-;;;;;
아버지가 이런 분인줄 진작 알았건만 -_-;;;;;
아버진 맥주한잔에 매형이 얼굴이 빨개지자 놀라며 바로 마시지 말라고 하셨고 다신 술을 권하지 않으셨다-_-;;;;
그리고 어머니와 난 종종 그일로 아버지를 놀렸다 ^______^
누난 그렇게 결혼했고 나는 공부했고 결국 붙었다
합격자 발표날 어머니는 하염없이 우셨다
"정말 고맙다 정말 고마워"
'고맙긴 제가 고마운 걸요 몇년동안 제가 쓴 돈만 우리집 몇평은 줄어든 것 같은데 ;;;;;'
그렇게 난 집안의 근심거리에서 벗어났다;;;;;
그 후 난 나름 괜찮은 직장을 잡았고 해외출장을 간 김에 어머니 선물을 하나 사왔다
"이 비싼 걸 왜 사오니? 환불할 수도 없고..돈도 없는데 앞으로 이런 거 사오지마"
평생 자식 뒷받침에 고생하신 부모님은 아들의 작은 선물에 지나치게 고마워하셨고
평생 부모님에 얹혀살던 아들은 작은 선물을 드리며 내심 뿌듯했다
부모님의 손익계산은 아무리 공부했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고
이렇게 세상엔 또다른 사기꾼이 태어났다 -_-;;;;;;
두달쯤 전에 누나가 카톡을 보냈다
빨간 줄이 두개 그어진 체온계비슷한 도구
난생 처음 보는 것이지만 왠지 모를 확신이 생겨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임신한거야?"
"응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임신4주래"
"헉 누나 정말 축하해"
결혼 3년째 얘가 없어서 가족들 모두 걱정했었는데 드디어 조카가 생긴 것이다
"초음파론 언제 볼 수 있대? 빨리 사진으로 보고 싶어ㅠㅠ"
"다음주나 다다음주쯤 볼 수 있대"
"빨리 다음주가 되었으면 좋겠다 ㅠㅠ"
"태명은 정했어?"
"태명은 똘이로 하려고'
"크크 귀엽다 ^^"
기다리고 기다리던 누나 임신 소식에 가족들은 모두 흥분했고 나 역시 대단히 신났다
2주 뒤에 초음파로 똘이를 처음 만났고
다시 2~3주가 지나서 누나가 초음파 사진을 보냈다
"똘이 팔생겼다 흐흐"
평생 학문에 정진한 나는 최대한 고상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우와 팔생겼다"
그리고 아주 품위있게 친구들한테 자랑했다
"우리조카 드디어 팔도 생겼다!!"
친구들은 축하해주었으나 그들의 눈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에이 한심한 놈'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거지만 정말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2~3주가 지났을까
아주 놀라운 일이지만 무려 다리도 생겼다
게다가 3D 초음파로 얼굴도 볼 수 있었다
똘이는 이쁜지 모르겠지만 정말 이뻤고 장동건보다 잘 생겼고 아이유보다 이뻤다 -_-;;;;
난 정신없이 친구들에게 자랑했고
친구들은 갈수록 한심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_-;;;;;
그리고 며칠전 누나한테 카톡이 왔다
"똘이가 족발 먹고 싶대^^"
"누나 걔가 족발이 먼지나 알까? -_-;;;;;
게다가 맛이란 말이지 미각기관이 있어야 하는거라고? 걔가 혀가 있기나 해?"
"똘이가 족발 먹고 싶대^^"
"................................"
난 내가봐도 호구라고 생각하며 즐겁게 족발을 사갔고
매형은 누나의 온갖 임신스트레스를 받아주고 있고
누나는 태교한다며 몇년만에 공부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손자준다며 아기옷을 만들고 있고
아버지는 여기저기 자랑하느라 바쁘다;;;;
어렸을 때 본 우리 부모님은 푼수였지만
누나부부는 푼수가 되고 있고
나 역시 확실히 푼수가 되고 있다
그리고 부모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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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이 글의 1/3 지점인 것 같습니다.
집안이 좋지 않았지만 촌동네에서 공부는 조금 했어요. 딱히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도 없었지만 어쩌다보니 그렇게, 그렇게 흘러가다가
고등학교에서 노력을 안하다보니 슬슬 벽에 부딪혀 대입 레벨을 좀 낮추게 되었는데 아버지께서 재수를 시키셨죠. 그렇게 넉넉한 환경도 아니었는데 기숙학원까지 넣으셨지요.
신기하게도 제가 재수를 하면서부터 집안에 돈이 굴러들어오기 시작하고, 부모님은 한 것도 없는 저를 복덩이라고 불렀습니다.
원하던 대학교에 진학하고 혼자 사는 자유를 만끽하며 신나게 놀았죠. 학점은 바닥을 치고 군대를 갔다오자 어느새 3학년에 해 놓은 건 없었습니다.
지금은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제가 자신이 없어서 징징거리고 있으면
아버지는 뭘 하든 밀어줄테니 걱정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 하시고 어머니는 전화를 드리면 너는 잘 될 거다. 우리 아들이니까 라며 힘을 주십니다.
저도 글쓴분처럼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아들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