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를 밟을 각오를 하고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원래 영화 감상이라는 건 자신의 기대치를 얼마나 충족시켜줄지, 만족을 전제하고 하는 행동이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시리즈의 최신작이,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확인하러 가는 행동은 그저 인내를 요하는 고행에 가깝습니다. 이 영화의 경우 들려오는 악평을 먼저 참고하고 기대치를 뚝 떨어트리고 간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이지, 실소를 몇번이나 터트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이 영화의 배경에 대해서 말들이 많습니다. 이는 단순한 반일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배경이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연출 능력의 부재에 대한 실망으로 봐야 할 겁니다. 실제로 영화 곳곳에 비치는 일본의 이미지는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촌스럽기까지 합니다. 닌자 아니랄까봐 기와지붕에 올라가 닌자 전통 복장을 한 채로 아가씨를 호위하는 하라다의 모습은 막부시대 닌자가 타임슬립을 한 것마냥 고증에(혹은 닌자의 이미지에) 충실합니다. 실버 사무라이라는 원작의 캐릭터에도 충실하지 않은 마당에, 조금은 현대식으로, 세련되게 바꿀 수는 없었던 걸까요? 정장 차림에 총 쏘더라도, 조금만 날렵한 액션을 추가하는 식으로 차별성을 두면 닌자 협회에서 항의라도 들어옵니까? 여긴 일본이고, 나는 사무라이다! 나는 닌자다! 하는 식으로 영화는 있는 티 없는 티를 아날로그로 다 냅니다. 후반부 닌자 떼들이 튀어나오는 장면은 정말 가관이죠. 민망할 지경입니다. (멀쩡한 길을 가는데 덤블링은 굳이 왜 하는지.)
이런 진부한 와패니즘을 빼면, 일본문화라 할 것은 영화 내에 거의 남지 않습니다. 미장센 또한 기억에 남는 것이 없어요. 그러니 울버린이라는 캐릭터와 일본이라는 배경의 조합이 신선하지도, 특별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메카닉의 최첨단을 달리는 국가로서 문명과 야성의 충돌을 만든다든지, 위계질서로 이루어진 결속된 단체로서 집단과 개인의 대결을 이끌어낸다든지, 아니면 울버린이 성장하는 데 있어 일본의 어떤 문화를 수용했다든가 하는 식으로 이방인인 울버린과 일본 사이에 결합 혹은 거부작용이 일어났으면 일본이 배경으로 사용된 것이 훨씬 의도가 뚜렷했을 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저 닌자들의 출몰 배경에 지나지 않았기에 보는 사람들은 일본까지 가서 야쿠자한테 사시미나 맞고 있나 하는 식의 허무함을 느끼고 마는 거죠.
캐릭터들의 감정 변화가 뜬금없다는 것도 큰 약점입니다. 로건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유키오는 웁니다. 쿨한 현대적 아가씨로서 메신저의 역할을 하며 화려한 칼부림을 보여주던 여자가요. 마리코는 로건과 사랑에 빠집니다. 자신의 반려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울버린을 이끌어가는 주요 여성캐릭터들의 감정에는 어떤 명확한 계기도, 일관성도 없습니다. 주인공도 예외는 아닙니다. 생판 처음 본 여자를 목숨 깎아가며 지키는 시작부터 동기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이야기가 될 꺼 아니야' 하는 식으로 스토리는 두리뭉실 진행이 됩니다.
울버린이라는 캐릭터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이 영화는 그리 능숙하지 못합니다. 그는 불멸의 존재로서 주변의 사람들을 먼저 잃고 마는 신화적 비극을 내포한 인물이고, 여기에는 무궁무진한 드라마의 가능성이 담겨있었습니다. 불멸자의 고독함, 필멸자의 탐욕, 생과 사 영생의 역설, 그리고 인간 본연의 외로움에 대해 울버린이라는 존재에게 얼마든지 철학적 매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죠. 그러나 영화는 그를 마초, 터프가이로 소비하는 데 급급합니다. 그것도 어느 전작보다 단순무식한 다혈질로요.(어느 작품보다도 로건의 육체는 혹사당합니다) 그리고 비극적 요소는 초반에 잠깐 나오고 이후 아무런 과정이 없이 증발합니다. 로건 혼자 괴로워하고, 혼자 악몽 꾸다가, 영화 후반부 혼자 구원을 얻죠. 자기희생이라는 요소만 집어넣었더라도 그의 힐링팩터는 로맨스와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있어 훨씬 더 설득력을 불어넣었을 겁니다..
후속작을 위한 안배일수도 있지만, 울버린의 손톱을 부러뜨린 것 또한 대단히 악수로 보입니다. 한 캐릭터의 상징을 그렇게 파괴하는 것은 캐릭터의 정체성을 곧 흔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영화적으로 완성도를 가장 높게 평가받는 아이언맨 3를 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무엇에도 끄떡없는 견고함의 상징을 그렇게 쉽게 터트려버리다니요.) 그것은 울버린의 팬이 보기에는 너무 잔인했을 뿐더러, 현대 기술에 무너진 야성 - 이라는 함의를 내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원래 울버린은 자신의 발톱과 치유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야수성을 대표하는 캐릭터입니다. 그런 캐릭터에게 자신의 무기를 빼앗기고 적의 능력으로 위기를 타개하게끔 하는 이야기구조는 결국 캐릭터의 매력을 고스란히 반감시켜버리고 말았죠.
이 외에도 깔 이야기는 더 있습니다. 야시다 회장의 음모 전개에 있어서 비논리적인 부분이라던가, 바이퍼 말고는 전무하다시피한 뮤턴트의 부재라든가요. (유키오의 미래를 보는 능력은 패스하도록 하죠.) 하지만 좋아했던 프랜차이즈 시리즈의 혹평을 계속하는 일은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로한 일이군요. 결론을 내자면, 그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더 울버린은 전작 퍼스트 클래스와 너무나도 비교가 되는 졸작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휴 잭맨이라는 걸출한 스타이자 배우를 낭비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 쿠키 영상은 그 어느 히어로 영화보다도 흥미로웠습니다. 정말 전율을 느꼈습니다.
* 모든 시리즈 중에서, 이번 울버린의 헤어스타일이 제일 깔끔하고 멋졌어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저도 더울버린 보고 욕만 나와서 시원하게 욕해주는 후기를 읽고 싶었는데.. 감사합니다 흐흐..
도무지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 인과관계를 찾기가 힘들더군요.. 아무런 이유없는 사랑이 울버린 행동의 유일한 원인일 뿐..
바이퍼도 그 배경에 대한 이야기 하나도 없이 그저 악역 역할만 충실히 하다가 사라지고, 야시다의 변심도 그저 인간의 "생존본능"만으로는 너무나 약한 설명일 것 같은데 그게 다였더군요.
울버린이 죽을 거라는 예언도;;
-내 꿈은 틀린 적이 없어. -아니 틀렸어. -어 그러네? 야 신난다
이게 뭡니까 -_-;;
울버린 손톱도.. 부러뜨려버리길래 어떻게 다시 복구하려나 싶었는데 그냥 피부처럼 다시 재생되더군요;;
모든 게 너무나 허술합니다.
울버린이라는 캐릭터로 어떻게 이런 졸작을 만들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