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기 시절의 영국은 대륙과 연결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마지막 빙하기는 1만 2천년 전 무렵에 끝이 났고, 영국이 대륙과 분리 되기 시작한 것은 BC 8,000년 경으로 지금으로부터 딱 1만년 전에 해당합니다.
소위 '화석인류' 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흔적은 수십만년 전의 것도 영국 내에서 발견 되곤 하니, 빙하기가 끝나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속에 속하는 호모(Homo) 어쩌구저쩌구.... 들은 차례대로 '브리튼' 에 발을 들인 셈입니다. 말이 좋아서 그냥 구석기 시대라고 뭉뚱그려 놓지만, 그 이전 시대를 한꺼번에 모아 몇배를 더해도 그 하나에 안될만큼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대 입니다.
빙하기 당시의 브리튼 지역은 빙하기라는 시대를 고려해봐도 여러모로 추운 곳이었던 듯 하고, 이때 당시에 브리튼에 발을 들인 무리들은 우리가 문명을 일군다, 고 할때 생각하는 '알박기' 느낌보다는 그나마 살만 할때 좀 왔다가 추워지면 다시 물러나는 등의 모습을 보인 것 같습니다. 즉 이 당시만 해도 브리튼 내에 인구의 숫자나, 그 인구의 밀집도도 아주 제한적이었던 듯 합니다.
대륙의 이주민들이 유입된 주된 통로인 콘월 지역.
인류 전체의 발달, 이런 점을 빼고 '한 지역의 역사' 라는 의미에서 측면에서 영국에서 문화, 그리고 문명이라고 할만한 것이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신석기 시대 부터였고, 브리튼의 신석기 시대는 BC 4,000년 경 부터 시작 됩니다.
이 최초의 사람들, 말하자면 '선주민' 들은 작달만한 키에 검은 머리털, 갸름한 머리를 가진 지중해 인종으로 추정되며, 이베리아 사람들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이들 중에 일부는 웨일즈, 혹은 스코틀랜드까지 이동했고,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은 동쪽으로 이동해 데번을 지나 솔즈베리 평원 부근까지 이동했습니다.
최초의 선주민들은 소나 돼지, 염소 등을 치면서 유목민적인 성격을 보이고, 동시에 부수적으로 소규모로 경작을 했던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영국 남부의 백악질 평원은 농사 짓기에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평원을 중심으로 구릉지를 따라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이들은 주로 가죽옷을 입었던 듯 하고, 농경이 발전되는 동시에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요소 역시 탄생했습니다.
초창기 문명 단계에 접어든 브리튼에서 경제와 정치, 종교의 중심지가 된 곳은 바로 솔즈베리 평원 부근이었습니다. 이 부근에서 거석 문명이 발달했고, 그 유명한 스톤헨지 같은 거석 기념물이 세워진 곳 역시 바로 이 곳이었습니다.
스톤헨지의 모습
또한 세계적인 유명세로는 아무래도 신비롭고 괴기한 분위기가 나는 스톤 헨지에 밀리기는 한데, 이 당시를 이야기하며 뺴놓을수 없는 것이 바로 실베리 힐(Silbury Hill) 입니다. 실베리 힐은 지금와서 보면 그냥 큰 언덕인데, 그 당시에는 계단식 피라미드 형상의 구조물이었습니다. 이런 거대 구조물이 만들어졌다는 건 그만큼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졌다는 것이고, 이런 작업에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고 조직할 수 있을 정도의 체계적인 권력 구조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문제는 이 실베리 힐이 그냥 좀 큰 구조물이 아니라, 무려 높이만 39미터가 넘고 평수로 치면 6,120평 정도 된다는 겁니다. 선사 시대 유럽 지역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구조물 중에서는 가장 큰 구조물인데,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기술로 이 정도를 만들려 한다면 500명의 남성이 15년 동안 일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신석기 시절에 소규모 집단이 여기저기에 난립한 정도가 아니라, 영국 남부 지역을 포괄적으로 영향력 아래 두고 있는, 신탁 등으로 권위를 확립한 정치 엘리트들의 손에 유지되는 광범위한 조직체가 있지 않았는가... 하는 말도 있습니다.
실베리 힐의 현재 모습
만드는 과정 상상도.
이렇게 자체적으로 발전을 하던 듯한 브리튼 내 '선주민' 들이었지만... '선' 주민이라는 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니까요.
대략 BC 2,800년 무렵부터 이른바 비커 문화(Beaker culture)라는 것이 유럽 지역에서 히트를 치기 시작합니다. 비커라는 이름은 이 사람들의 무덤에서 화약 실험용 비커처럼 생긴 원뿔 모양의 물그릇이 발견된 것에서 유래를 했는데, 이 사람들은 구리를 제련하고 청동기를 만들었습니다. 즉, 청동기 시대를 시작시킨 겁니다.
이런 비커 문화는 브리튼 내에도 들어왔고, 오랫동안은 이들이 처음 브리튼 내에서 야금술을 시도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으로 조사를 해보니 이미 아일랜드 지방에서 그런 기술을 발전 시킨 흔적이 나왔다고 합니다. 아무튼 널리 퍼뜨린 것만은 분명 합니다.
비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주로 활과 단검으로 무장했고, 원래 있던 토착 '선주민' 들과 뒤섞이거나 혹은 지배해 나갔습니다. 이들은 주로 천막이나 나뭇가지로 지붕을 덮어서 움막집을 만들었는데 순전히 그것만 보자면 신석기 시대 선주민들의 집만도 못한 수준이었지만, 대신 비커 문화의 토기는 브리튼 선주민들보다 훨씬 우월했고 아마(亞麻)와 양모를 이용해서 옷을 입었습니다.
비커 문화의 영향권 모습
비커 문화는 논쟁의 여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른바 비커 사람들(beaker folk)이 있어서 그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이주하면서 이를 퍼뜨린 건지, 아니면 기술/문화적으로 전파가 되었다는 건지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당초에는 전자로 생각되었지만, "선사 시대에 그렇게 이주가 가능했다고?" 하는 회의적인 의견에 따라 '문화적 전파' 에 힘이 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여기서 기술이 발전해지며 스트론튬 동위 원소 분석 같은 게 발달하여 이를 바탕으로 살펴보니, 실제로 상당한 탐사 및 접촉과 확산 등이 있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보면, 영국에서도 이러한 비커 문화의 수용에 있어서 '문화가 전파된 거냐, 비커 사람들이 온거냐' 를 가지고 갑론을박이 있었는데, 유전자 조사를 해보니 신석기 말기에 유전자 풀의 90% 이상이 이전과 확 바뀌어 이후의 비커 사람들과 비슷하게 대체가 되었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즉 원래 브리튼의 선주민들은 이베리안들과 더 비슷한 사람들이었는데, 외부인들이 들어오면서 대체가 된 겁니다.
비커 문화가 영국에 전파된 것은 BC 2,500년 전 무렵 입니다. 후기 신석기와 겹쳐 있고, 스톤 헨지나 실베리 힐 등 신석기 선주민들의 강성함을 보여주는 유적들이 이 무렵 완성/보강 되었기에, 저렇게 엄청난 구조물을 만든 직후에 브리튼의 헤게모니를 비커 사람들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일이?
아무도 모릅니다. 엄청난 전쟁, 대량학살 같은 무시무시한 사건의 흔적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선진 기술을 가지고 경제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해서 선주민들을 말려죽인것일까? 혹은 대륙에서 온 사람들이 가져온 전염병 때문에 싸움 한번 제대로 없이 몰살 당한 것일까?
여하간에 이 글에서 편의상 임의로 가칭을 붙이자면 이런 1차 인베이전 이후는 1,000년이 넘는 시간동안은 비커 후예들의 전성기가 펼쳐집니다. BC 2,000년 무렵부터 BC 1,00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웨식스 문화라고 불린 청동기 문화가 브리튼 전역에 전파 되었습니다. BC 1,400년 농경과 야금술 모든 부분에서 아주 큰 진보가 이루어졌습니다.
구릉 지대 토양의 지력이 쇠퇴하자, 사람들은 좀 더 오랫동안 경작할 수 있는 기름진 저지대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초기의 목축 중심 대신에 농경과 목축을 아우른 혼합농업이 더욱더 선호되고 이것이 더 일반적인 일로 변하게 됩니다. 겨울에는 밀과 보리를 심는 방법을 알아냄으로써 더욱 안정적인 식량 공급이 가능해졌습니다.
칼과 도끼, 창날 등의 무기뿐만 아니라 낫, 물통, 솥 등 농사 용구와 그 밖의 일용 도구들이 더욱 대량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브리튼의 인구 역시 수십만을 훌쩍 넘는 수준으로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천여년 가량 브리튼 지역이 목가적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을때, 2차 인베이전이 시작 됩니다.
아직 문명이라는 말보다도 '원시 공동체' 라는 말이 더 어울릴법한 신석기 시대 말기부터 여지껏 수천년간 시간이 흐른 결과, 바햐으로 '문명' 의 시대가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 유럽에서 좀 더 사람들에게 주목 받을만한 지중해 지역으로 시선을 옮기면, 유명한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성립되기 시작하던 BC 8세기에서 7세기 무렵 그 유명한 '켈트족' 이 브리튼 지역에 도래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브리튼에서 철기 시대를 시작한 사람들이고, 비커 문화의 도래로 신석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변모했듯 이번엔 켈트족의 도래로 청동기에서 철기 시대로 다시 한번 브리튼은 변모 합니다.
이렇게 새로 등장한 이주민들, 켈트인들은 브리튼의 생활 양식을 크게 바꿔놓았습니다. 일단,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당연하게도) 철기의 사용이 있고, 원시적인 화폐 사용이 있었으며, 우리에게 '드루이드'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사제 제도를 확립하고, 여러가지 예술과 공예에서 켈트 양식을 도입했습니다. 우리가 로마 시대 드라마나 영화, 게임이라던지에서 느낄 수 있는 '고대 영국적인 느낌' 은 바로 이때부터 확립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 입니다.
초창기 켈트인들의 주된 생활 양식이었던 '언덕 성채'
철기 장검과 단검으로 무장한 켈트인들은 동족들에 대해 과두정치를 시행했고, 원주민들을 종속민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앞서 비커 문화의 도래와 비슷하게, 이런 과정을 '침략' 이라고 해야 하는지, '이주' 혹은 '획산' 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만, 이런 부분은 일단 제껴두고...
벨가이
순도 100% 고고학의 영역이었던 브리튼의 역사는 이제 슬슬 '문헌' 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 합니다. 켈트족이 처음으로 브리튼에 도래한지도 수백년이 지난 후, 중국으로 치면 진나라가 다른 6국을 멸망시키고 지중해에서는 로마가 에페이로스의 피로스와 격돌할 무렵 브리튼 남부로 벨가이(Belgae)인이라고 불리는 대륙의 켈트족 무리가 대거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브리튼 진입에 대해 기록을 남긴 사람은 다름 아닌 카이사르, 시저로 유명한 그 카이사르인데 카이사르는 이들이 '브리튼을 침공' 했다고 서술했으며, 그들이 남부 지역에 자리를 잡았고 브리튼 북쪽에 있는 사람들이 본래의 선주민이라고 여겼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3차 인베이전이라고 할만 합니다.
명확한 것이라고는 하나 없는 고대 역사의 서술상 이것도 또 몇몇 논쟁이 되는 듯하지만, 일단 일반적인 서술로는 원주 켈트인들의 저항을 무력으로 물리친 벨가이 인들은 템즈 강 하구와 그 주변 일대에서 전사와 사제가 우대를 받는 귀족정을 바탕으로 '왕국' 을 세워나갔습니다. 벨가이인들이 자리를 잡은지 100~200년 쯤 지난 BC 1세기 정도 되면 기존의 켈트식 언덕 요새는 남부에서 자취를 감추고(상대적으로 더 미개했던 북부에서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평야에서 '도시' 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도시왕국들은 귀족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도로와 강을 통해 수송과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졌습니다. 각 지역에서 대량 생산된 수제품과 지중해 지역에서 생산된 올리브유, 포도주 등의 교역이 빈번했고 바다 건너 로마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특히 BC 25년 쿠노벨리우스(Cunobelinus)의 왕국은 하트퍼드셔(Hertfordshire)와 에식스 지방을 중심으로 그 세력이 옥스퍼드셔, 펜 지대, 켄트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제 4차 인베이전이 펼쳐집니다.
이번 침공자들은 다름아닌 '로마' 였고, 침공군을 이끈 대장은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였습니다. 그동안은 극히 제한적인 문헌과 고고학에 의존해야 하는 브리튼의 역사는 이 무렵부터 문헌자료가 확 늘어납니다.
이런 침공과 전투 과정을 일일히 이야기하면 글이 너무 길어질테니 일단 생략하고 간략하게 보자면,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 카이사르는 우월한 전투력과 전술을 이용해 승기를 잡았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거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당시 브리튼의 유력자인 카시벨라우누스를 격파하고 그에게 항복을 받고 조세를 바치겠다는 약속을 확보하여 성공적인 귀환을 했습니다. 물론, 이후에 로마가 내전에 접어들자 조세 약속은 흐지부지 되어버렸습니다만.
카이사르가 사망한 이후 로마를 장악한 아우구스투스는 내심 브리튼 재정복을 노리고 있었지만, 당시 브리튼은 앞서 말했던 쿠노벨리우스가 강력한 정권을 성립한 이후였습니다. 때문에 기회를 엿보던 중에 재앙과도 같은 토이토부르크 전투 패배로 대외정복을 모조리 포기해야 했지만, 시간이 지나 즉위한 클라우디스 황제는 다시 한번 브리튼 정복을 시도했습니다. 마침 쿠노벨리우스는 죽었고, 용맹하지만 내정은 무능하고 부족들 사이에서 다툼이나 만들어내던 두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정권을 이어받아 브리튼이 혼란을 겪어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던 참입니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로마 장군 플라우티우스는 브리튼인들의 게릴라 전술에 곤란을 겪으면서도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승기를 잡았고, 급기야 나중에는 클라우디스 황제 본인이 직접 브리튼에 건너 오기까지 하며 전투를 독려하여 11명의 브리튼 왕들에게 항복 선언을 받고, 이들을 거느리고 심지어 코끼리까지 앞세운체 위풍당당하게 콜체스터에 입성하여 위엄을 과시하고 떠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브리튼은 로마에 정복 됩니다.
당시 로마는 브리튼에 4개 군단, 총 2만명을 주둔 시키고 콜체스터를 속주의 중심지로 삼아 이를 거점으로 브리튼의 서쪽 웨일즈 지역이나 북쪽 스코클랜드 지역에 원정을 떠나곤 했습니다. 로마는 압도적인 전투력과 우월한 문명으로 속주를 탄탄하게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외정이 아니라 내정이었습니다. 로마에서 한 몫 벌려고 고리대금업자들이 브리튼에 몰려왔고, 이들은 "원래 법률상으로 12% 이상의 금리는 불가능하지만 속주는 그런 제한 알바 아니다" 라는 헛점을 이용해 마음껏 폭리를 취했습니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부디카라는 여인이 항의를 했지만, 로마인들은 부디카를 잡아다 매질을 하고 부디카의 딸들은 강간하는 것으로 응수했습니다. 참다참다 못한 브리튼 인들은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 로마인들을 학살하고 고문했으며, 게릴라식 전술로 로마군을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브리튼인들은 전쟁터의 후방에 가족을 데리고 다닌다는 약점이 있었는데, 로마 총독인 수에토니우스는 이에 넒은 장소에서 회전을 유도하고 적을 유인시킨 후 격파했고, 도망치던 브리튼 병사들은 후방의 가족들과 마차 때문에 퇴로도 용의치 않아 거의 전멸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되어 로마에 대한 브리튼의 최대 저항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후 로마는 300년간 브리튼 지배를 지속했습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고, 이윽고 로마 제국이 흔들리게 되고 여러 군인 황제가 난립하다 쓰러지는 난장판이 되자, "내가 승부사다." 라고 하는 군인들은 죄다 브리튼의 군사를 가지고 황제 선언을 하는 등 혼란한 시기를 겪었습니다. 카라우시우스(Carausius)라는 장군이 황제를 자처하고 브리튼의 통치자로 군림하다 휘하 장교 알렉투스에게 살해당하고, 알렉투스는 또 자기를 브리튼의 황제로 자처하다 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 진압되고, 막시무스가 브리튼 주둔군을 발판으로 황제 선언을 하고 그라티아누스 황제를 제거했다가 테오도시우스에게 패배하고 등등...
이렇게 혼란을 겪던 중, 결국 AD 400년 경이 넘어가자 로마는 브리튼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우리는 물러난다. 너희들은 알아서 스스로를 지키라" 며 알아서 하라는 말만 남겨두고 그대로 거짓말처럼 빠져나갔습니다.
『브리튼의 멸망과 정복』(De excidio et conquestu Britanniae)
이렇게 로마가 물러나게 되자, 로마가 물러난 직후인 4세기에서 6세기 가량 브리튼의 역사 서술은 갑자기 '암흑시대' 로 변모하게 됩니다. 물론 아무것도 안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는 기록이 없다는 겁니다.
당대에 쓰여진 직접적인 사료는 단 하나, 540년 무렵 켈트계 수도사인 길더스(Gidas)의 '브리튼의 멸망과 정복' 뿐인데, 문제는 이 책에서도 실제 사건의 묘사는 별로 업습니다. 수도사인 길더스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역사를 서술하려는게 아니라 "지금 이 나라 이판이 진짜 이 정도로 썩어빠졌다. 악폐가 너무 심하다." 며 사회를 비판하려는 의도였지 체계적으로 역사책을 만들어보자, 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 외에 자료는 거의 8세기, 9세기까지 가서 나중에 작성된 것들입니다.
문제는 이 시기가 영국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대단히 역동적이고 중요한 시기라는 겁니다. 브리튼 역사의 향방이 무려 1,200여년 정도 만에 켈트인들에서 앵글로 - 색슨 계 쪽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바로 이때였습니다.
보티건
일단 로마가 떠난 직후인 4세기 초반 무렵, 브리튼에서 가장 유력한 인물은 바로 보티건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보티건의 통치도 브리튼 남부 지역 정도에서나 먹혀들었을 것으로 추정 됩니다. 여기서부터는 거의 대부분 추정 입니다. 보티건이라는 인물이 실존인물인지도, 실존인물이면 어느정도까지가 설화가 어느정도까지가 진짜인지도 불분명합니다.
당시 브리튼은 로마라는 보호자가 떠난 이후 서쪽에선 아일랜드인들이, 북쪽에서는 픽트족이, 동부 해안에선 색슨족이 틈만 나면 약탈을 감행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급기야 브리튼은 떠난 로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아 보기도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골머리를 썪던 보티건은 대륙에서 용병을 고용합니다. 이들이 바로 주트족(Jute) 입니다. 유틀랜드 북부에 정착해 있던 게르만족이던 주트족은 헹기스트(Hengist)와 호르사(Horsa) 형제라는 이들이 지휘하고 있었고, 이들은 보티건의 제안을 받아들여 켄트 지역의 사네트 섬이라는 곳에 정착합니다.
켄트지역
한동안 이들은 동쪽으로는 같은 게르만인들의 침략을 막아냈고, 서쪽으로는 아일랜드에서 오는 켈트족을 막아냈습니다. 하지만 고용주인 보티건과 그 밑의 켈트인들에게 점점 의심을 받고 지원도 줄어들자 헹기스트는 보티건에게 "보수를 올려달라. 그렇지 않으면 일이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른다." 고 협박했고, 이에 보티건이 다른 용병을 또 불러들여 자신을 치려고 하자 이번에는 자기 딸을 보티건에게 바쳐서 곤경을 벗어났다고 합니다.
여하간에 여차여차 한 끝에 헹기스트의 주트족은 '켄트 왕국' 을 세웠고, 이것이 세력을 키우며 종내에는 토착 켈트족을 압박할 지경이 되자, 켈트족은 서쪽으로 쫒기거나 주트족의 노예로 전락하거나 그게 아니면 대륙으로 이주하거나 선택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5차 인베이전이 벌어진 셈입니다.
자기네 사촌인 주트족이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본 다른 게르만 부족들은 그 뒤로 대거 브리튼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477년에는 남부 유틀린드 반도에서 거주하던 '색슨족' 전사 엘레가 배 3척에 3명의 아들과 부하를 이끌고 브리튼 남부 해안에 들어오고, 14년만에 서식스(Sussex) 왕가를 남부 지방에 구축합니다. 495년에는 또다른 색슥족 족장인 체르디크가 상륙하여 웨식스 왕국을 세웠고, 동부 지방에 정착한 다른 색슨족은 에식스 왕가를 세웠습니다.
브리튼 꿀 빨러 몰려 오는 색슨족들
이 색슨족들은 무시무시한 전사들일뿐 아니라 엄청나게 난폭하고 잔인한 사람들이었고, 선주민이었던 켈트족에겐 재앙같은 존재였습니다. 색슨족이 전투를 하러 왔다는 뿔나팔 소리와 고함 소리만 들려도 주민들은 공포에 질렸고, 색슨족은 약탈, 살육, 강간을 마음껏 자행했습니다. 비드의 연대기에서는 이렇게 묘사 합니다.
"잔인하게 살해된 사람들을 매장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언덕에서 붙잡힌 불쌍한 몇몇 생존자들은 한꺼번에 몰살당했으며, 그 외의 사람들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기어 나와 먹을 것을 구걸하며 적에게 투항했다. 그들은 당장의 살육은 면했지만 평생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졌다. 곤궁을 피해 해외로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고향 땅에 눌러 있으면서 비참하고 공포 어린 삶을 견뎌나갔다."
그러나 생각보다 이런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앵글로 - 색슨족의 침입은 서서히 진행되었습니다. 토착 브리튼 사람들도 그들에 맞서 저항을 했기 때문입니다. 길더스에 의하면 결말이 나지 않은 전쟁이 수없는 세월에 걸쳐 이어지다가 (아마) 500년 경에 오늘날 위치를 알 수 없는 몽스 바도니쿠스(Mons Badonicus)라는 곳에서 브리튼인들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아서왕 전설의 시작점입니다. 온갖 전설과 민담, 엶게 남은 전승의 기억이 뒤섞인 속에서 아서왕이라는 인물이 실존했는지, 몽스 바도니쿠스 전투가 실제했는지, 아서왕이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인물인지, 다른 어떠한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한 사람인지, 그건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허나 과거의 로마 지배 영역이 무너져 마침내 브리튼과 앵글로 - 색슨의 여러 나라로 분립되기 이전에 마지막으로 통일을 (어느정도 성공적이었을지는 둘째치더라도) 기도했던 영웅왕은 있을 법도 합니다. 이 시기 주요 정치사건에 대한 기록의 부재와 우리의 무지는 너무나 커서 더이상 추론할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한편 가장 늦게 브리튼 땅에 들어선 앵글 족은 슐레스비히 근처에 근거지를 둔 게르만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5세기 말에 브리튼에 들어와 동앵글리아(East Anglia), 머시아(Mercia), 그리고 중북부 지방에 노섬브리아(Northumbria)를 세웠습니다.
이리하여 마침내 7세기 초까지 브리튼에 정착하여 자리를 잡은 주트 - 앵글로 - 색슨족의 주요 게르만 왕국들은 켄트, 서식스, 웨식스, 에식스, 이스트 앵글리아, 머시아, 노섬브리아의 7개 왕국이 되었습니다. 바로 7왕국 시대였습니다.
이렇게 7왕국 시대가 열릴 때가 되면, 앵글로 - 색슨 인들은 더 이상 침략자가 아니라 브리튼의 주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이 7왕국이라는 거지, 문헌상으로 알 수가 없을 뿐 당시에 온갖 자잘한 소국들은 아주 많았던것 같습니다.
기록상으로는 아주 제한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지만 이런 '전국시대' 를 맞이한 브리튼에서는 온갖 전투와 계략, 암투가 펼쳐졌습니다. 이들 중 중국 춘추시대의 '춘추오패' 같은 존재들이 있었고, 이렇게 유력한 왕들은 브레트왈다(Bretwalda)로 불렸습니다.
처음에는 켄트의 애설버트가 브레트왈다로 명성을 떨쳤고, 이후에는 이스트 앵글리아의 래드윌드가 브레트왈다였습니다. 7세기 전반에는 노섬브리아의 군주 에드윈이 그 이전까지 어떤 앵글로 - 색슨 군주보다도 강력한 브레트왈다로 군림했습니다. 그러나 머시아가 그위네드와 손을 잡고 공격하여 에드윈을 전사시켰고, 머시아의 군주 오퍼는 그 이전까지 역대 가장 강력한 군주로서 카롤루스 대왕와 비견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웨식스 왕가가 강성해짐에 따라 오퍼 역시 잉글랜드 통일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런 길고 긴 쟁패 끝에 웨식스 왕가가 힘을 발휘하던 때,
다시 한번 침공이 펼쳐집니다.
789년 어느날, 웨식스의 왕 베어르크트리크의 시절에 노르웨이인들을 태운 배 세 칙이 나타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지방 관리는 어리둥절하면서, '정체불명의 외지인이 왔으니 왕에게 안내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그들에게 다가갔고, 바로 살해되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브리튼에 나타난 최초의 데인, 덴마크에서 온 이들이었습니다.
이윽고 793년 린디스판, 794년 재로우(Jarrow), 그리고 795년 아이오우너 등 브리튼 역사상 가장 성스러운 수도원들은 갑작스레 바다에서 나타난 세력들에게 무참하게 약탈 당했습니다. 데인들은 무방비의 수도사들을 잡아다 두개골을 까부셨으며, 농민병을 처참하게 도륙했습니다. 절망에 빠진 수도사들은 연도문(煉禱文) 끝에 이렇게 덧붙여 기도했습니다.
"주여, 노르만의 광포로부터 저희들을 구하소서!(A furore Normannorum libera nos, Domine!)
8세기 말이 되자 데인의 침략은 이제 완전히 연례행사가 되어버렸습니다. 거의 30년간 약탈하고 겨울이면 집에 돌아가던 그들은 850년 경부터는 아예 브리튼 내에 아예 주둔하기 시작했습니다.
865년, 할프던(Halfdan)과 무골의 아이바르(Ivarr the Boneless)가 이끄는 데인군, 즉 이교도 대군세(Great Heathen Army)가 브리튼에 상륙합니다. 그들은 강대했던 왕국인 노섬브리아를 멸망시켰고, 이후 이스트 앵글리아로 이동해 그곳의 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이스트 앵글리아의 왕 에드먼드는 전투에서 패한 뒤 데인들에게 사로잡혀 희생제물로 잔혹하게 살해되었습니다.
단 3년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노섬브리아와 이스트 앵글리아를 멸망시킨 이교도 대군세는 이제 웨식스로 진격했습니다. 웨식스는 처음에는 데인들에게 일격을 먹였지만, 전열을 정비한 그들이 다시 반격하자 처참하게 패배했습니다. 874년 4월, 기존의 데인들에 더해 새로운 군대가 또다시 상륙했고, 마침 웨식스의 애설레드 왕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잉글랜드 전역을 돌아보아도 지원을 요청할 곳은 아무데도 없었고, 종말은 눈에 다가온듯 보였습니다.
알프레드 대왕
그러나 종말이 눈앞에 다가온듯 했을때, 잉글랜드에 영웅왕이 출현했습니다. 바로 알프레드 대왕이었습니다.
과거 웨식스 군대가 짦은 성공 이후 처참하게 데인군에게 패퇴할때 알프레드 역시 그 과정을 함께 했었습니다. 이미 즉위 이전부터 알프레드에게 데인은 넘어서기 힘든 벽 같은 존재였던 겁니다. 혼란스런 와중에 왕으로 즉위했지만, 역시 1년 동안 작은 패배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어려움을 느낀 알프레드는 굴욕을 감내하며 뇌물을 데인인들에게 바쳐 당장의 위험은 벗어났습니다.
뇌물을 받고 웨식스에서 물러난 데인인들은 머시아를 침공하여 또다시 유서깊은 왕국을 멸망시켰고, 이후에 세번째로 웨식스로 침공해왔습니다. 데인의 군대는 여전히 압도저이었습니다. 여러 지역이 항복하고, 또다시 패배한 알프레드는 늪지대 속에 있는 섬에 들어가 7주 동안 숨어 살면서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궁리했습니다. 이때 알프레드를 묘사한 아주 유명한 일화가 알프레드 대왕이 케이크를 태워먹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지치고 비통에 빠진 대왕은 한 집안에 들어가 신세를 졌는데, 집에 있던 부인은 이 누추한 거렁뱅이를 위해 케이크를 굽다가 잠시 밖으로 나가며 케이크가 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군대를 다시 모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데인족들을 물리칠 수 있을지 너무나 깊게 생각하던 대왕은 배고픔도, 그리고 타고 있는 케이크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다시 들어온 부인이 타버린 케이크를 보고 노발대발한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신은 게으름뱅이로군요. 음식을 원하면서, 일하기는 싫어하니!" 왕은 그저 조용히 웃었고, (그가 그날 저녁을 먹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며칠 뒤에는 데인족을 물리치고 잉글랜드를 구원했다.
여하간에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엿본 알프레드는 애딩턴 전투에서 민병대를 동원해 기적같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데인의 지배자 구스럼은 패배를 받아들였고 알프레드와 구스럼은 평화조약을 통해 데인로(Danelaw)라고 불린 데인들의 지배 영역, 그리고 웨식스의 지배 영역을 나누었습니다.
어쨌거나 평화 조약을 하긴 했어도 데인인들은 여전히 잉글랜드에 눌러 앉아 있고, 전면전을 펼쳐지지 않더라도 국지적인 전투를 끊임없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알프레드 대왕은 육해군을 개혁하고 외교술을 통해 사람들 사이를 원할하게 주재하고 도시 방위 계획을 수립하고 행정제도를 개편하고 교육계획까지 수립하는 등, 가히 최악의 상황이자 위태위태한 형세에서 오히려 국가의 기틀을 충실하게 다졌습니다.
이렇게 알프레드 대왕의 노력 아래 기초를 충실히 닦은 웨식스 왕가는 그 후손들에 이르러 마침내 데인로 지역을 회복했고, 954년에는 최종적인 역전승을 거두었습니다. 973년에는 '평화왕 에드가' 가 마침내 최초로 통일된 잉글랜드 왕으로 대관식을 치뤘는데, 이 대관식은 오늘날까지도 영국왕 대관식의 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좀 평화가 찾아오려나 싶더니, 또다시 바이킹의 침공이 재개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번의 적은 이전보다도 훨씬 강력한 상대들이었습니다.
덴마크의 군주 '푸른 이의 헤럴드'(Harald Bluetooth)는 덴마크와 노르웨이, 두 지역을 장악했고, 그 휘하에 고도로 훈련된 직업군인들, 전투기계들을 육성하여 엄청나게 강력한 군단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런 헤럴드에 대항해 아들이었던 스벤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퇴위시켰고, 아버지 못지 않게 걸물이었던 스벤은 그 강력한 군단을 여전히 손아귀에 쥐고 휘두를 곳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마침 잉글랜드는 새로 즉위한 왕인 애설레드가 무능 및 귀족들간의 대립으로 평판이 아주 나빠 사회가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애설레드의 별명이 "준비 되지 않은 애설레드"(Æthelred the Unready)일 정도니 더 할말이 없을 지경입니다. 이를 기회 삼은 스벤은 계속해서 치고 빠지기로 잉글랜드를 공격했고, 그때마다 애설레드는 돈을 주어 그들을 물러나게 했습니다. 그 돈을 땅파서 나오는게 아니고 세금을 더 뜯어야 했으므로, 애설레드의 평판이 더 떨어진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동안 치고 빠지기로 일관하던 스벤은 "이 정도면 그냥 해볼만 하겠다." 는 생각이었는지, 1013년 자신의 위풍당당하고 무시무시한 군대를 총동원해 잉글랜드를 정복해버릴 계획이었습니다. 상륙한 스벤의 정예군은 잉글랜드 전역을 초토화 시켰으며, 단 1년 만에 옥스퍼드, 윈체스터, 런던까지 함락 시켰습니다. 심지어 잉글랜드 왕이던 애설레드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노르망디로 바다를 건너 달아날 지경이었으니, 이미 잉글랜드는 스벤이 다 장악한 셈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처구니 없게도 스벤은 성공이 눈 앞이던 1014년 2월 급사했습니다. 스벤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애설레드는 곧바로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스벤의 뒤를 이은 군주, 크누트는 일단 재정비가 필요함을 느끼고 물러났습니다.
크누트 대왕
크누트는 머지 않아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듬해인 1015년, 그는 이전보다도 더욱 많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당시 잉글랜드는 국왕인 애설레드에 대해 그의 아들인 에드문드가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때문에 잉글랜드의 전력을 기울여도 막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적인 크누트는 손쉽게 노섬브리아 지역을 장악한 후, 런던으로 위풍당당하게 출진했습니다.
이 군대가 런던에 당도하기도 전에 애설레드는 병으로 죽었고, 런던의 귀족들은 황급히 에드문드를 왕으로 추대했지만, 런던을 제외한 다른 곳을 유력자들, 주교와 수도원장들, 웨식스의 다른 많은 사람들 모두가 "어차피 다 틀렸다.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못 이긴다. 헛짓거리 하느라 괜히 피해나 입지 말고 그냥 크누트를 왕으로 모시자." 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물론 에드문드는 그럴 생각이 없었기에 지지자를 모아 크누트와 전투에 나섰고, 처음에는 재미를 좀 보는가 했지만 결국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조약에 따라 크누트와 에드문드는 영토를 분할했지만, 에드문드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면서 크누트는 자연스레 전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습니다.
결국 잉글랜드 전역이 덴마크의 손에 떨어진 셈이지만, 절대 다수의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는 차라리 잘된 일 이었습니다. 물론 크누트도 막 잉글랜드를 손에 넣은 후에는 반대자가 될 사람들을 살해하거나, 논공행상을 위해 잉글랜드인의 영지를 몰수해서 데인계 측근들에게 나눠주긴 했습니다만, 어느정도 통치가 궤도에 오르자 온화한 정책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이미 초창기 데인의 습격과는 달리 잉글랜드에 정착한 많은 숫자의 데인계 때문에 예전처럼 무차별 살육이 있지도 않았고, 크누트 스스로도 자신은 앵글로 - 색슨 잉글랜드의 제도를 존중하며 자신이 그 계승자임을 강조했습니다. 여러 행정문서 등도 이전과 크게 바뀌지 않았고, 법률 반포와 수도원 설립에도 힘을 보탰기에 연대기 작가들은 크누트에 대해 "야만인에서 가장 기독교다운 왕으로 변모했다" 고 표현했습니다.
당시 크누트는 북해 전체의 지배자였고, 잉글랜드와 덴마크, 노르웨이에 걸친 영역은 종종 북해제국(North Sea Empire)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광범위했습니다. 잉글랜드는 크누트의 지배 영역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크누트가 쓰러진 후 이 광범위한 왕국은 후계 다툼 과정에서 바로 분열 되었습니다. 크누트의 아들인 하르사크누트가 잠깐동안 분쟁 끝에 잉글랜드의 지배자가 되었는데, 하르사크누트는 아버지는 크누트고 어머니는 일전에 죽은 왕 애설레드의 미망인으로서 크누트와 재혼했었기에 웨식스 왕가의 핏줄을 이어 받아서 정통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2년만에 죽고 맙니다.
이렇게 되자 잉글랜드 땅에서 덴마크 왕조의 혈통은 단절 됩니다. 대신, 애설래드의 아들인 고해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가 즉위해 웨식스 왕가는 다시 부활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에드워드 역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 합니다.
이때 잉글랜드의 왕위를 주장한 유력 세명은 3명이 있었습니다.
한명은 노르웨이의 왕 헤럴드 하드라다(Harald Hardrada) 입니다. 이 사람은 약력을 살펴보면 "뭐냐, 이 사람은.." 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사람으로서, 북방인 노르웨이의 왕이지만 비잔티움의 바랑기안 가드로 십수년간 복무하고 지중해의 아랍 해적선과 싸우고 아랍인들과 페체네그와 싸우고, 시칠라아에도 가서 싸우고, 발칸 반도, 불가리아 등등 온갖 곳에서 이름을 날린 역전의 전사였습니다. 그는 노르웨이의 왕으로서, 크누트 제국의 계승권을 주장했고, 자신이 잉글랜드의 지배자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다른 한명은 헤럴드 고드윈슨(Harold Godwinson)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웨식스 백 고드윈 때부터 아주 유력한 가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미 웨식스 왕가에 대한 공공연한 반역의 뜻을 아버지 때부터 수차례 드러낸 바 있는 가문이었습니다. 그는 웨이릊의 강력한 그위네드의 그리피드의 공격을 격파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바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었습니다. 죽은 고해왕 에드워드의 어머니 에마가 윌리엄의 고모 할머니이기 때문에 나에게도 계승권이 있다, 라는 것이 윌리엄 측의 명분이었습니다. 윌리엄의 자세한 약력은 여기서 서술하면 너무 길어질것 같기에 생략하겠습니다.
여하간 마침내 삼대 세력의 싸움이 펼쳐졌습니다. 먼저 잉글랜드에서 세력을 확보한 것은 당연히 잉글랜드 땅에 있던 헤럴드 고드윈슨이었습니다. 그는 바다 건너 노르망디에서 윌리엄이 올 것을 예상하여 그쪽 방면에 군사를 배치해 놓은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윌리엄이 북풍 때문에 노르망디 해안에서 꿈쩍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다른 세력인 헤럴드 하드라다는 오히려 그 바람을 타고 무사히 상륙해 왔습니다. 이때 고드윈슨의 추방된 동생 '토스티그' 가 헤럴드 하드라다와 손을 잡고 형에게 대항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생겼고, 그들의 군대가 폴포드 전투(Battle of Fulford)에서 승리를 거두며 무시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자 어쩔 수 없이 고드윈슨은 윌리엄을 막기 위해 배치한 병력 전부를 북으로 돌려 헤럴드 하드라다와 교전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고드윈슨은 4일만에 300km를 이동하는 어마어마한 기동전을 펼쳐 노르웨이군이 전혀 예상도 못한 타이밍에 도착하여 전투를 치룸으로써, 역전의 용사인 헤럴드 하드라다를 격파했습니다. 이 스탬포드 브릿지 전투(Battle of Stamford Bridge)의 결과는 '바이킹 시대의 끝' 을 의미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고, 최소한 잉글랜드에 대한 바이킹의 개입은 이것으로 끝난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가 펼쳐진 3일 뒤 윌리엄의 군대가 잉글랜드에 상륙합니다.
헤럴드 하드라다를 무찌르기 위해 북쪽까지 죽어라 올라가던 고드윈슨은 이제 다시 윌리엄과 싸우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헤이스팅스 전투' 로, 전투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전투 내내 유리해 보였던 고드윈슨이었지만 막판에 적의 궁병과 기병에 역습을 당했고, 그 와중에 고드윈슨이 어이없이 사망하여 지휘관이 쓰러지자 결국 윌리엄이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투 이후에도 아직 윌리엄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세력들은 있었지만, 윌리엄은 바로 런던으로 들어가 표적이 되는 대신 일부러 외곽 지역을 빙빙 돌면서 엄청난 학살을 장악하고 런던을 고립시켰고, 이렇게 되자 런던의 유력자들도 결국 굴복하고 윌리엄을 왕으로 섬기는 수 밖에 방법이 없었었습니다. 앵글로 색슨 왕조가 끝이 나고, 노르만 왕조가 성립된 것입니다.
이 당시 잉글랜드인의 숫자는 백만 내지 이백만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런 적대적인 주민들과 생활하는 노르만인들의 숫자는 1만명 이하였습니다. 반항이 없지는 않았지만, 윌리엄의 군단은 불복종자들에 대해 철저할 정도의 초토화와 몰살을 시행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노르만 왕조는 위태로운 시기를 거쳐 정착 하게 되었고, 이 1066년은 영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유명하고 극적인 전환점으로 사람들에게 기억 됩니다.
물론 모든 일이 그렇듯, 대중들이 좋아하는 극적인 사건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는 건 아니고 점진적인 변화가 있었고, 혹은 생각보다 아예 변화가 없기도 했습니다. 어찌되었건, 노르만 왕조의 성립을 마지막으로 '외부의 군사 세력이 기존 세력을 피지배층으로 떨어뜨리고 새로운 사회 지도층으로 등극' 같은 일은 마무리 되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겠고, 이 시점에서 영국 역사가 하나의 분기를 찍었다고도 할만 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