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대학교 힙합 동아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신입생 때부터 제법 촉망받는 인재였다. 어눌한 발음을 고치기 위해 시작한 랩이 예상치 못하게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생각보다 내 실력은 뛰어난 모양이었다. 동기는 물론이요, 심지어 선배들도 감탄을 마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나는 많은 호사를 누렸다. 무대 경험 한번 없는 초짜가 감히 대학교 축제 무대에 오른데다, 심지어 페이까지 받고 공연을 뛰기까지 했으니.
물론 내 깜냥은 딱 방구석 래퍼였다. 육지담처럼 박자를 밀고 당긴 경찰대학교의 흑역사는 아직까지 뇌리에 남는다. 그때만 생각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루에도 몇 번을 죽는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난 내 상황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건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오 맙소사, 신이시여. 힙부심으로 가득한데다 학점은 3점도 채 되지 못하는 볼썽사나운 래퍼 지망생이 탄생해버린 것이다. 이제 와서 고백하면 나는 집에서 용돈도 타썼다. 게으른 나머지 이렇다할 작업물도 없었다. 그런 주제 술자리에서 힙합 이야기만 나오면 마치 소문의 래퍼라도 된 양 어깨를 거들먹거렸으니, 실로 끔찍한 광경이다. 요컨대 매일 가사 주제로 씹고 뜯는 가짜가 바로 나였던 셈이다. 빌어먹을.
그렇게 2년이란 시간을 허송세월 보냈다. 물론 여전히 정신은 못차렸다. 그때까지도 내가 언더래퍼란 착각에 빠져 살았다. 그랬으니 틈만 나면 취미와 특기가 랩이라고 지껄였겠지.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한 가지 더 흑역사가 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언젠가 쇼미더머니1에 참가할 생각이 있냐며 연락이 왔다. 사실 그리 대단치도 않은 일이다. 대부분 대학교 동아리에 연락이 갔다고 들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그 시절 로꼬와 내 실력은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나 뿐만 아니라 대학교 힙합 연합 동아리에서 활동한 사람이면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 시절이었다. 부끄럽게도 이번에도 힙찔이 기질은 여실히 발휘됐다. 나는 들을 것도 없다며 단박에 거절했고 그날밤 술자리에서 실컷 엠넷을 안줏거리로 씹었다. 그것으로 모자라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며 큰소리를 아주 떵떵쳤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 나는 주변의 반대를 만류하고 쇼미더머니2에 참가한다.
결과는 2라운드 탈락.
당시의 내가 죽일듯이 밉다.
어느덧 내 나이는 스물셋이 됐다. 미루고 미룬 군대를 가야했다. 훈련소에서도 나는 여전히 힙찔이였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면 자랑스럽게 그동안의 이력을 거론했고, 힙합은 내가 내 자신에게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었다. 누구와 이 주제로 이야기해도 꿀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마침 다른 생활관에도 비슷한 친구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기쁜 마음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더니, 글쎄. 알고 보니 이 친구 또한 대학교 힙합 동아리 소속. 거기다 심지어 유학까지 다녀왔단다.
묘한 긴장감 속에서 간단한 통성명을 마쳤다. 그리고 눈을 마주쳤을 때 깨달았다. 이놈, 나와 동류구나.
동시에 마음속으로 전투준비를 마쳤다. 준비란 이렇다. '어이 친구, 나는 이런 진귀한 곡을 알고 있어. 그리고 외국래퍼 누구누구를 알아. 이놈은 언더그러운드에서 개쩌는 녀석이야. 이 정도는 알고 있지?' 국내 힙합 이야기는 최대한 나중으로 미룬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는데 그 당시 힙부심은 그런 경향이 있었다. 어줍잖은 지식을 자랑인양 풀어놓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따라 말이 잘 안나왔다. 선수를 빼앗긴 것이다.
"어디 해외 랩은 좀 들어?"
아직도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기억난다. 짧은 대화 속에서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았다. 유학생은 이 방면의 전문가였다. 사실 랩이란 게 기원이 미국이다. 애당초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게다가 사실 져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이까짓 자존심 싸움이 뭐가 대수겠는가? 오히려 잠자코 패배를 인정하고 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얻는 게 이득일 터.
그러나 몇 번을 말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힙찔이였다. 사실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지기 싫은 마음에 그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제법 그럴듯한 단어를 섞어버린 것이다.
"물론이지. 마침 내가 힙스터라서."
"뭐? 힙스터가 뭔지 알아?"
"그 방면에 전문가란 뜻이지. 설마 몰라?"
"...."
이후 자연스럽게 나의 별명은 힙스터형으로 정착했고,
이 창피한 경험으로 인해 비로소 언더래퍼란 허울을 벗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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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다 자기만의 세상에서 자기만의 멋과 자부심으로 살아가기에 그런 모습들 자체가 특별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유독 강하고 또 이를 굳이 겉으로 강하게 발산하려는 사람들이나 지나치게 반사회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간혹 눈살 찌푸려질 때가 생기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