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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01 02:34
글을 쓰다 보면 진짜 그런 느낌 받습니다. 한국어-한글의 조화는 생각보다 깊이가 얕다는 점입니다. 구어가 가진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아직 문어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띄어쓰기 입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도대체 왜 띄어쓰기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가? 어문 규정상 띄어 쓰라고 하는데, 나는 그러고 싶지 않으면? 띄어 써서 느낌이 죽어버리면?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띄어쓰기의 역사가 150년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점이 오히려 장점이라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한국어는 세계에서 가장 유연한 문법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제약이 없어요. 혹자는 이걸 두고 예외가 너무 많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근데 예외가 너무 많아서 표준이 없을 지경인지라, 그냥 막 써도 뜻이 통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어가 좋습니다.
18/03/01 03:06
문어체와 구어체 사이의 괴리는 정말 큰 문제입니다. 문어가 구어가 지닌 가능성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저는 일반 단행본에서도 가급적 입말을 쓰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현실에서 쓰지 않는 말을 글에서 쓸 이유가 없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가끔 독자에게 점잖은 글말을 써야 할 자리에서 천박한 입말을 썼다고 타박을 받을 때는 섭섭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입말을 천시하는 풍조가 아직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어가 구어를 소화하지 못하는 (혹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겠지요.
띄어쓰기는 저도 참 피곤한데...어찌 보면 복잡해서 좋을 때가 많습니다. 편집자분들이 워낙 바쁘다 보니, 띄어쓰기가 잘못된 글을 쓰는 분들을 먼저 거르시거든요. 대충하고 넘어가는 작가들이 많다 보니 열심히 해놓으면 아웃풋(?)이 굉장한 것 같습니다 :) 한국어는 숙련자가 쓰기에 참 좋은 언어인 듯해요. 본문에서 단점이라고 적어놓긴 했지만, 글 잘 쓰는 사람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문제니까요. 제약이 거의 없기도 하고요. 아 그래도 한국어로는 이런 묘기를 부리긴 힘들 겁니다. 이게 한 문장이에요! https://www.newyorker.com/magazine/1978/06/26/girl
18/03/01 07:47
오! 이런 작품이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한국어로는 이런 묘기를 부리기 힘들다는 말은 철회해야겠네요. 성급한 주장이었습니다. 이런 문장을 한국어로 쓰면 가독성이 엄청 떨어질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심각하진 않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
18/03/01 12:01
예전의 법원 판결문을 보면, 위 글처럼 한 문장이 거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정도로 무척 길게 늘어진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마침표 없이, 어려운 용어로, 최대한 길게 쓰는 것을 마치 미덕으로 여겼던 것처럼요. (혹자는 이런 경향에 대해 판결문의 권위를 위해서, 또는 심오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여기게 해서 항소를 포기하게 하기 위해서 라는 농담도 하곤 했습니다)
판결문은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재판받은 사람에게 그 취지를 최대한 이해시키는 방향으로 써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예전 판결문이 위와 같은 내용과 형식인 것은 아마도 일제시대 및 권위의식의 잔재 때문일 겁니다.
18/03/01 02:47
제가 읽고 쓰는 글의 대부분은 보고서와 논문 형태의 글인데, 영문으로 작성할 때와 한국어로 작성할 때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영어로 작성할 때는 분명한 문장 구조 안에 제가 하고 싶은 표현을 채워넣는다는 느낌이라면, 한국어로 작성할 때는 바닥부터 의미를 쌓아서 올린 뒤에 그걸 주물러서 한국어로 변형시켜야 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는 제 모국어가 한국어이기 때문이겠지만, 왠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런 글을 쓸 때는 영어로 쓰는 것을 선호합니다.
어디선가의 글을 봤는데, 한국어는 "나선형 언어"라는 점입니다. 제가 전공자가 아니라 잘 이해하지 못한 부분인데, 대화의 격률을 지키기 위해 한국어가 이와 같은 형태를 띠기를 선택했다는 요지의 글이었습니다.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builder.hufs.ac.kr/user/ibas/No27/12.pdf 저는 제가 가장 익숙한 언어이기에 한국어를 쓰지만, 이 언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끔은 한국어 화자로 태어난 것을 저주하기도 하며, 조금 더 표현을 분명하게 할 수 있는 다른 언어의 화자로 태어났으면 할 때가 많습니다. (한국어가 세계 주류 언어가 아니라는 별개의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사람이 면면으로 대화하는 시대를 지나 서로 모르는 대상과 언어로 의사소통할 일이 많은 지금, 한국어는 제 생각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18/03/01 03:24
그러게요...사실 저도 한국어가 논문을 쓰기에 적절한 언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어와 한국어로 작성할 때 느낌이 다르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하고요. 한국어는 (특히) 추상적인 개념을 명확하게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봐요. 다만, 한국어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언어라고 생각하기에 점차 개선될 거라고 믿습니다. "나선형 언어"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처음 들어 봅니다. 뜻하지 않은 소득을 얻은 기분이네요. 고맙습니다. 당장 저부터 전공자가 아니라 이해하려면 공을 많이 들여야 할 것 같아요.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일전에...어떤 논문에서...(기억이 안나네요ㅠ)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얻는 유무형적인 이득을 수치화한 자료를 봤었는데요. 주류 언어로서 영어가 학술 분야나 비즈니스 분야에서 주는 이점은 말할 것도 없고, 언어 그 자체가 주는 문화적 효용이 대단하더라고요. 펀더멘털 자체가 남다른 언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왕이면 다른 언어의 화자로 태어났으면 좋았겠다는 말씀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18/03/01 20:23
근데 진짜로...안철수씨 말하는 걸 보면 엄청 축약하는 것 같기는 해요. 안철수씨 눈에는 자기 말을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엄청 이상해 보일 듯합니다; 축약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18/03/01 16:31
와. '관계하는 방식으로서'가 '이에 근거하여'가 되는 것을 보고 제가 정말 배움이 모자라다는 걸 통감했습니다. 한 책에서 어떤 독일어 문장을 (원문은 저도 직접 본적이 없습니다) "기라성 같은 두뇌의 고흐도 일상에서는 고통에 빠진 괴짜에 불과했다"라는 문장을 "하늘에서 빛나는 별이었던 천재 고흐는 지상에서는 번민하는 괴물이었다."라는 문장으로 고치는 것을 보고 문학번역의 예술성에 전율에 휩싸인 적이 있었습니다. 몇 년 뒤에야 비슷한 경험을 한 번 더 해봅니다. 그림 뿐만이 아니라 문장에도 미학 이론을 접목시켜 더 유창하고 깊게 감상을 적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가득해지는 순간입니다.
스페인어나 러시아어는 격이라도 살아 있어서 주어가 빠져도 괜찮지만, 한국어는 고맥락 사회라는 바다의 생선이라 물 밖으로 꺼내면 갈치처럼 폐사해버리는 경험을 자주 해봤습니다. 비교문학수업을 곧 개강해서 듣기 시작할 문학도에게 TheLasid님의 글은 어머니가 떠주는 한 잔의 따뜻한 물 같네요. 이번 학기는 좋은 횟감으로 가득하길 빌며.
18/03/01 20:31
좋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Farce님 말씀에 힘이 나네요. 문학 번역의 예술성...참 멋진 말이에요. 비문학을 번역하는 저같은 사람들도 저런 멋진 번역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사실 엄청 힘들어요. 비유, 직유, 환유...넘나 어려운 것 ㅠ)
그러면 행복한 한 학기 보내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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