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 무렵 항우가 '해하 전투'에서 참패한 후 죽게 되고 유방의 '한 제국' 이 성립되었습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서양에서는 한니발이 '자마 전투' 에서 패배했고, 로마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양 쪽의 문명권에서 거대한 제국이 성립된 시기가 비슷하기에 두 나라 모두 종종 비교대상이 되곤 합니다. 뭐 보통은 어느쪽이 더 우월하다느니 하는 식으로 '게임 기분' 식의 이야기 일 뿐이지만은...
아무튼 어디가 뭐가 더 짱이냐느니 하는 식의 좋은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이 많이 했으니 넘어가고, '흑역사' 이야기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로마군은 지중해 세계를 장악한 군단으로 명성이 높지만, 그런 로마군도 참패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지도 높은 패배인 '칸나에 전투', '카르헤 전투', '토이토부르크 전투' 등 같은 패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들은 로마의 승리 이상으로 유명 합니다. 보통 17, 18, 19군단이 모두 날아가고 2만의 군사가 전사했으며 라인강 북방 영토를 모두 날려버린 토이토부르크 전투나, 황제의 군단이 패배하고 황제까지 전사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등이 최악의 참패로 이야기 되곤 합니다. 물론 로마 역사가 좀 긴게 아니니 사람들마다 따로 꼽는 전투도 있구요.
토이토부르크 전투
로마군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하고, 그럼 반대로 서한-동한을 합쳐 400여년에 이르는 한나라 역사상 최악의 참패는 무엇일까요?
의외로 이 경우는 로마의 유명한 여러 전투들과는 달리 팍 하고 떠오르는, 대중들에게도 유명한 전투가 별로 없습니다. 한 제국군이 패전 따윈 하지 않는 백전백승의 부대라서 그러지는 않을테구요. 천하의 몽골군도 패전한 전투를 열거해보라면 막상 꽤나 꼽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조명이 덜 된 탓이 있겠지요.
참패라고 부를 수 있는 한군의 패배 중에서 가장 유명한 패배가 있다고 하면 바로 한고조 유방이 흉노의 묵돌에게 당한 패배인 '백등산 포위전' 일 겁니다. '평성(平城)의 치욕(恥)' 이라고까지 불린 이 패배로 인해 한나라는 향후 무려 70여년간 흉노에게 군사적 우위를 내주었으며, 흉노는 그 전성기를 이룩했습니다. 이후 한무제 시기까지 계속된 '초거대 고대 중화제국' 과 '초거대 고대 유목제국' 의 격렬한 군사 투쟁의 시초이기도 하니, 역사적 중요성도 확실히 대단한 전투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전투에서 한군의 전사자는 그렇게까지 어마어마하진 않습니다. 이 백등산 포위전의 양상은 급하게 추격해 온 한나라 군의 지휘부가 본대와 떨어져 도출되어 있자, 흉노군이 재빨리 이를 습격해 일주일 가량 포위하였고 굶주리고 추위에 한군이 지치자 치욕적 조건으로 합의를 보고 포위망에서 벗어난 전투입니다. 토이토부르크 전투처럼 군대가 먼 땅에서 전멸 당하거나,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처럼 지휘하던 황제가 전사해버리거나 한 전투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군사적 열세를 노출하여 이후 흉노의 변방 유린을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도 제대로 대응할 의욕을 꺾어버렸다는 측면에서 큰 전투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백등산 포위전
그렇다면 당장의 물리적인 차원에서, 한나라군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최악의 참패는 어떤 전투란 말인가? BC 90년에 한나라와 흉노 사이에서 펼쳐진 연연산 전투(燕然山之战)가 아마도 여기에 해당하는 전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백등산 포위전에서 110년이 지난 후 발생했던 전투 입니다. 의외로 이 전투는 한군이 당시 국제적 형세상 열세였던 상황에서 발생한 전투가 아니라, 기세를 펼치던 상황에서 발생한 전투였습니다. 어쩌면 오히려 그래서 이런 패배를 자초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긴 합니다.
앞서 이야기 했던 백등산 포위전의 여파로, 한나라는 이후 70여년간 흉노에 대해 저자세를 고수했습니다. 흉노가 변방을 유린하면 물론 막으러 나가긴 했지만, 이미 볼일을 마친 흉노군이 룰루랄라 돌아가면 감히 이를 추격하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70여년간 착실하게 전국시대와 초한전쟁의 참상을 치료하고 회복하며 힘을 비축한 뒤, 야심만만한 군주였던 '한무제' 의 시대에 이르러 한나라는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한무제의 위대한 쌍검이었던 '위청' 과 '곽거병' 이라는 두 명의 명장을 앞세워, 수십만이 넘는 병력과 막대한 물자를 중국 내지도 아닌 멀리 북방의 사막과 초원으로 투시하는 엄청난 군사적 원정을 연거푸 시도했고, BC 119년 막북 전투에서 위청의 군단이 흉노 선우의 본대를 대파하고 곽거병의 군단이 바이칼 호수 근처까지 찍고 오는 위업을 달성하며 동북아시아의 균형추를 다시금 뒤짚어버리는데 성공합니다. 이로써 한나라는 의심의 여지 없이 흉노를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한무제
그러나 군대라는 조직이 원래 인적 자원, 물적 자원을 죄다 빨아먹는 블랙홀 같은 집단인데다가, 내지에서 펼쳐지는 싸움도 아닌 멀리 북방으로 보내는 '원정' 이었던 만큼 흉노와의 전쟁은 거대한 한 제국의 기반에도 큰 타격을 가했습니다. 그래도 흉노가 워낙 변경에서 펼치는 공세가 너무 심각할 지경이라 막북 전투까지의 원정 자체는 감수해야 했다는 식으로 이해하더라도, 이후에 펼쳐진 한나라의 군사적 원정은 여러모로 평이 좋지 않습니다.
필요에 의한 원정이라기보다, 허욕을 채우기 위해 쓸데없이 피와 물자를 소모한 고통스런 전쟁이라는 시각 입니다. 장수들끼리 내분까지 나며 과정이 워낙 추했던 고조선과 한나라의 싸움이라던지, 서역의 명마를 얻기 위한 탐욕으로 일으킨 대완(大宛) 원정들이 그런 시선을 많이 받는 편입니다.
왜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있는 이광리의 동상.
문제의 인물, 한 제국의 바루스라고 할 수 있는 이광리(李廣利)가 장군으로서 모습을 드러낸 것도 바로 그 대완 원정 때의 일입니다. 이광리는 무제의 총애를 받았던 '이 부인' 의 오빠가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한무제는 새로 얻은 이 부인에게 푹 빠져 있었기에, 이 부인의 오누이인 이광리 역시 등용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라에는 고조 유방의 유훈으로 '공이 없는자, 열후가 될 수 없다' 는 규칙이 있었기에 무제는 이광리에게 '공을 세울 기회' 를 주려 했습니다.
그런 무제의 의지에 따라 이광리는 '이사장군' 이 되어 서역의 대완을 정벌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습니다. 6천 명의 병력에다가, 직업 없이 놀고 있는 불량배 청년들 수만명이 서역의 보물로 한 밑천 두둑히 챙겨보려는 탐욕 속에 같이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광리 부터가 동생 뺵으로 장군이 된 초짜인데다가, 병사들도 그저 탐욕만 가득한 무뢰배들 뿐이었으니 제대로 싸움이 될리 없습니다. 물론 예전에 위청과 곽거병을 이런 식으로 등용해 무제가 재미를 본 적은 있습니다만 그런 경우가 계속 터지진 않았었고....
때문에 이광리의 오합지졸 원정군은 대완 정복은 커녕, 대완의 동쪽 경계인 '욱성' 공략에도 애를 겪으며 굶주렸습니다. 결국 무제에게 '길은 멀고 병사들은 굶주렸고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이다' 라고 편지를 보냈고, 이를 본 무제는 격분해서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옥문관(玉門關)을 넘어오지 말라." 즉 이기지 못하면 중국 땅 다시 밟을 생각은 접어라는 답변을 보냈기에, 이광리는 감히 진격하지도, 돌아오지도 못하고 둔황에 머물렀습니다.
둔황 북서쪽 100km 지점에 있는 옥문관.
어쩄거나 시작한 원정의 끝은 내야 했기에 무제는 지원군을 편성했습니다. 무제는 그야말로 제국의 힘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보급병을 제외한 순수 병력 6만명을 지원군으로 보냈고, 소 10만 마리를 물자로 끌고가게 했는데 이 마저도 전체 보급 물자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물자를 지원 받은 이광리는 대완을 여지없이 깨뜨렸고 대완의 수도 귀산성(貴山城)을 포위하고 40여일간 물 공격을 펼친 끝에, 대완의 신료들이 직접 왕을 죽이고 항복을 해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유명한 '한혈마' 가 한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6만명이 동원된 원정에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은 단 1만 명 뿐이었습니다. 전투보다도 오히려 굶주려서 죽은 사람이 많았는데, 물자는 앞서 말했듯 엄청난 숫자가 동원되었고 서역에서 한나라와 우호 관계에 있는 소국들 역시 물자를 조달했습니다. 하지만 장료들이 중간에 식량을 다 착복하는 바람에 물자 부족 현상이 일어났던 겁니다.
한서를 쓴 반고는 이 한나라의 대완 원정에 대해 '4년 동안 5만의 군사를 쓰고 억만금을 낭비하고 그 고생을 하고 겨우 얻은 게 말 40필' 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보통 이 정도면 승리라고 해도 장군도 처벌 받게 되지만, 무제는 이광리를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해서후로 봉했습니다.
7만에 가까운 병사를 동원했는데 5만 명이 증발했으니, 말이 승전이지 사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한나라 군 역사에 남을 피해라고 봐도 좋겠지만, 어쨌거나 승전이라고 무제는 좋아했습니다. 여하튼 그렇게 본래 목적이었던 이광리를 출세 시켰으니 적당한 명예직을 주고 놀게 하면 될텐데, 무제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이광리를 계속 군직에 두었습니다. 그것도 복방의 대적 흉노와 한나라 사이에 다시금 전운이 감돌된 시기에 말입니다.
"박아넣고 밀어주다 보면 터지겠지..." 같은 심리였을지도...
아마 대완에서 고생했던 이광리 입장에서도 왠만하면 그냥 놀게 해주면 좋지 않았을까 싶지만, 한무제는 "아, 매부. 팍팍 밀어줄게 공 좀 세워봐." 는 식으로 이광리를 억지로 전장에 계속 밀어넣었습니다. 그렇게 나선 이광리는 흉노와 싸워 적 1만명을 어떻게 물리치는 공을 세웠지만, 정작 돌아오던 도중에 흉노의 기습을 받아 병력 6할을 잃어버리는 참패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무제는 오히려 쎔쎔이니 더 만회해보라는듯 이광리를 계속 전장에 내몰았습니다. 그리하여 BC 90년 경, 이광리를 중심으로 한 엄청난 규모의 원정군이 새롭게 편성되었습니다.
이 원정군의 규모는, 무려 13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침공해온 흉노를 격퇴하는 부대도 아니고, 멀리 외부로 원정을 보내려는 병사로 이 만한 수준의 군사를 동원했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대군이었습니다.
三月,遣李廣利將七萬人出五原,商丘成將二萬人出西河,馬通將四萬騎出酒泉,擊匈奴。
3월, 이광리(李廣利)를 파견하여 7만을 거느리고 오원(五原)을 출발하게 하였고, 상구성(商丘成)은 2만 명을 거느리고 서하(西河)를 출발하게 하였으며, 마통(馬通)은 4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주천(酒泉)을 출발하여 하여 흉노를 공격하였다.
이 군대는 서군, 중군, 동군 총 3군으로 나뉘어 진군하게 되었습니다. 상구성이라는 인물이 2만명을, 마통이 4만 명을 이끌었으며, 원정의 중심인 이광리는 총 7만 대군을 이끌고 출동했습니다.
마통군의 움직임
한나라군의 3군 중 마통의 부대는 주천에서 출발해, 서북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부대는 천산산맥 부근까지 나아갔는데, 이를 요격하기 위해 근처에 있던 흉노군은 2만 군대를 동원했으나 멀리서 본 한나라 군의 전력이 워낙 강성했기에, 감히 싸움을 걸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물러났습니다. 때문에 마통은 땅밞기만 했지 제대로 전투를 하지 못해 전공의 득실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마통의 부대에서 성만(成娩)이라는 장군의 부대가 누란 등 현지 부족 군대의 도움을 받아 차사국(車師國)이란 곳을 점령했습니다. 차사국에서 마통의 군대를 차단하려고 시도할까봐 염려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흉노군이 교전 자체를 회피하고 주변국도 복속되면서 마통은 전공은 못 거두어도 실책도 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흉노군의 움직임
한편, 한나라가 터무니 없는 대군을 동원했다는 정보는 흉노쪽의 귀에도 금세 흘러들어갔고, 흉노의 선우는 일단 물자를 자신의 북쪽 거처인 힝가이 산맥 북방 쪽으로 옮기고, 자신은 힝가이 산맥 아래쪽으로 이동해 맞상대할 채비를 했습니다.
이때 3군의 장수 중 한 명이었던 상구성은 현지에 도착해 흉노를 찾아다녔으나 보이지 않자 마통처럼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흉노는 그 뒤를 흉노에 항복한 한나라 출신 장군, 이릉의 지휘 아래 3만 부대를 동원해 쫒았고, 양 군대는 무려 9일이나 전투를 치열하게 펼쳤습니다. 며칠간 계속된 전투 끝에 한군이 점점 남쪽으로 내려가 결국 더 추격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자, 이릉은 군대를 물려 되돌아갔습니다.
한때 한나라의 장수로 5천 보병으로 흉노 8만 기병에 포위되어 며칠을 버티다 항복한 뒤, 조국이었던 한나라에서 일가족을 모두 살해해 어쩔 수 없이 흉노의 장군이 된 이릉.
이렇게 되어 13만 대군 중 총 6만 명에 해당하는 상구성과 마통의 군대는 활동이 끝났습니다. 이제 문제는, 가장 많은 7만 명을 이끌고 있던 이광리의 움직임이었습니다.
동북아역사넷에 주석에 의하면 부양구산은 달란자드가드의 서쪽, 범부인성은 달란자드가드의 동북쪽. 오원에서 달란자드가드까지는 직선거리로 대략 420km 이상.
오원에서 출발했던 이광리는 부양구산(夫羊句山)이라는 곳에서 흉노의 5천 병력을 만나 교전했고, 완승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흉노를 범부인성(范夫人城)까지 추격했는데, 흉노는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달아났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말 좋은 분위기였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안 풀리는듯 했던 이광리의 군생활도, 어쩌면 전환점을 맞이하는게 아닌가 싶은 순간이었지만....
문제는 수백킬로미터 떨어진 제국의 수도, 장안에서 발생했습니다.
처형되는 승상 유굴리(劉屈氂)
대략 이 시기 한나라 조정을 뒤흔들던 정치 스캔들의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무고(巫蠱)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고란 없는 죄를 만들어내는 그 무고誣告가 아니라, 짚으로 부도교 저주인형 같은것으로 사람을 저주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당시엔 누가 누구를 무고했다느니 사건이 심심찮게 발생해 조정을 뒤흔들었습니다. 진짜로 무고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상대를 함정에 파뜨리려는 술책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무고 사건은 꽤 여러번이 있었는데, 이광리가 출전했을 그 무렵 놀랍게도 제국의 승상에 해당하는 '유굴리'가 이 사건에 엮이게 되었습니다. 유굴리의 아내가 '황제인 무제가 빨리 죽게 해달라' 며 무고를 했다는 사실이 발각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광리의 딸은 유굴리 아들의 부인이었습니다. 즉 이광리의 딸은 유굴리의 며느리였습니다. 두 사람은 인척 관계였던 셈입니다.
이때 한무제의 본래 태자는 죽어 버려 태자 자리가 공석이었던 상태였는데, 이광리를 이렇게 출세시킨 이 부인은 '창읍왕' 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광리는 출정할 무렵, 출전하는 사람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제사 임무를 맡아 배웅하러 온 유굴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라건데 군후께서 일찍 창읍왕(유박)을 태자로 삼으라고 청하고, 만약에 세웠다가 황제가 되면 군후께서는 오래도록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
자신이 출정해 있는 동안 창읍왕을 태자로 좀 추천해달라고 귀뜸한 것인데, 설마하니 이광리가 아무리 욕심이 있다고 한들 '황제를 저주해서 죽이라' 고 지시를 내렸을 리는 없으니, 그로써는 어이없이 엮어들어간 셈입니다. 아무튼 감히 황제를 저주한 사건이었으니 유굴리는 저잣거리에서 허리가 잘려서 죽었고, 그 처자식도 모조리 목이 베어졌습니다. 여기에 엮인 이광리의 가족들도 모두 옥에 들어가서, 도마 위에 놓인 생선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은 저 멀리 있던 북방의 이광리에게도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광리가 두려움에 떤 것은 말할것도 없습니다. 다른것도 아니고 감히 대역죄에 엮였으니, 자신뿐만 아니라 온 일가족이 전멸할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일단 이광리 본인은 북방에 있어 몸이 무사한 상태였고, 휘하에는 7만 군대가 있습니다. 여기에다 주위 사람들 역시 이광리를 충동질 했습니다.
"부인과 온 집안이 모두 관리들의 손에 있는데, 만약에 돌아갔다가 뜻에 잘 맞지 않으면 함께 감옥에서 만날 것인데, 여기 질거수의 북쪽 땅을 다시 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이광리는 하나의 결론을 내립니다. 지금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황제가 자신을 용서하고 죄를 상쇄시킬 만큼의 엄청난 공을 세우자' 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폭주했습니다.
셀렝가 강
그 즉시 이광리는 7만 대군을 몰아 북쪽을 향해 미친사람처럼 진군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기록에는 '질거수' 라고 언급된 셀렝가 강(Selenga River)까지 나아갔는데, 달린자드가드에서 여기까지는 직선거리로 780km 이상으로 오원에서부터 따지면 1200km 이상 진군한 것 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직선거리이기에 실제 도보로는 더 걸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셀렝가 강에서 바이칼 호까지는 불과 100km 거리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당시 이광리가 얼마나 엄청난 폭주를 했는지 어느정도 감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셀렝가 강 앞에 도달한 이광리는, 2만 부대를 빼어 결국 그 셀렝가 강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서 흉노의 좌대장과 좌현왕이 이끄는 부대가 한군을 공격해 왔습니다.
1000km가 넘는 거리를 거쳐 와서 피곤함이 극에 달해 있으며, 머나먼 곳으로 원정을 와서 핸디캡이 극심한 한나라군이었지만 놀랍게도 한군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광리의 집념인지, 한군 정예병의 힘인지는 몰라도 흉노군은 대패했고 흉노 좌대장은 아예 전사했습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못할 것이 없다는게 정말인지, 이 시점에서 이광리는 30년 전 바이칼 호까지 진군했던 곽거병을 '잠깐' 연상시킬 법한 공적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광리의 이런 필사적인 행동과는 별개로, 휘하 장교 및 병사들의 불만은 커져갔습니다. 아니, 그럴법도 한게 전공을 세우겠다고 지금 사람을 시베리아까지 데려가고 있으니 불만이 안 생기는게 더 이상한 일이고...
이에 이광리의 부대의 장사(長史)와 참모장은 "장군이 많은 사람을 위험하게 하면서 공로를 세우고자 하니, 이러다 패할까 걱정이다." 라며 이광리를 습격해 잡을 계획을 꾸몄으나, 이것이 들통나 오히려 이광리에게 잡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나올 만큼 부대의 분위기는 암울해졌고, 병사들 역시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광리 군단은 셀렝가 강 방면에서부터 남쪽으로 천천히 500km를 이동했습니다. 맨 처음 출발부터 따지면 1,700km를 이동한 셈입니다. 한반도의 세로 길이가 950km니 한반도를 한번 왕복하는 정도의 거리를 사막과 산맥, 골짜기를 넘어가며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직선거리로 따졌을때 그랬다는것이니, 실제로는 이보다 더 길었으면 길었지 짦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군이 연연산(燕然山) 근처에 이르렀을 때, 적이 지칠대로 지쳤다는 것을 알게 된 흉노의 선우는 직접 5만 기병을 이끌고 퇴로를 차단하고 공격을 퍼붓었습니다. 이때 1,700km 이상을 진군하면서 지친 한군 병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로 괴물같은 전투력으로 흉노군과 양패구상 수준으로 맞상대 했습니다.
선우는 한의 군사가 피로하였다는 것을 알고서 스스로 5만 기병을 거느리고 차단하여 이사를 공격하니, 양측이 살상 한것이 매우 많았다-자치통감
이사장군(이광리)은 선우와 10여 일을 전투했다- 사기 흉노열전
'사기' 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한군은 무려 10여일을 흉노와 치열하게 맞상대했습니다. 다만 흉노 열전 극후반부를 포함한 한무제 제위 중후반기 시점의 '사기' 기록은 내용도 순서도 뭔가 오락가락하는 면모가 있긴 한데, '한서' 나 '자치통감' 의 기록으로 보더라도 싸우던 도중에 '밤이 되었다' 는 언급이 있는것을 보면 최소 하루 이상 치열하게 버텼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다 죽어가는 줄 알았던 한군의 저항이 생각보다 막강하자, 흉노군은 작전을 바꿔 밤중을 틈타 한군의 앞에 거대한 참호를 판다음 ,후방을 기습하여 몰아붙이는 작전을 취했습니다. 이에 한군은 혼란에 빠졌고, 결국 드디어 군대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앞뒤 상황을 보면 오히려 그때까지 버틴게 더 신기한 일이긴 했습니다. 더 이상 버틸수가 없는 지경이 되자 결국 이광리는 흉노군에 투항했습니다.
이광리 군단은 본래 7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이르러,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로 돌아간 사람은 천 명 중에 한 두 명 뿐' 에 불과했습니다. 굳이 그런 기록이 없더라도 상황을 보면 저렇게 머나먼 북방 초원에서 한군의 탈주병들이 사막과 골짜기를 건너 한나라로 돌아갈 길을 찾을 수도, 그때까지 버틸 식량을 찾을수도 막연한 노릇이라, 90% 이상은 죽거나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본래 목적인 범부인성과 다른 방면으로 나아간 군단이 도착한 천산산맥 근처의 위치와, 이후 이광리가 폭주를 하여 진군한 질거수 방면의 위치. 이렇게 보면 본래 목표보다 얼마나 더 올라간건지 알 수 있음.
흉노를 상대로 한 한나라 최악의 굴욕이라는 개국 초기 백등산 전투는 앞서 말했듯, 실제로는 황제 유방이 이끄는 선두 부대가 후방과 거리가 멀어진 틈을 타 흉노에게 포위되었던 포위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북방에서 7만 부대가 한줌의 먼지처럼 사라진 이 전투야말로 한나라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배라고 할만 합니다.
외부에서는 이런 엄청난 참패가 있었고, 내부에서는 태자 문제를 둘러싼 분쟁이 극에 달했던 이후, 대략의 문제가 일단락 되자 한무제는 "스스로를 꾸짖고 반성하는 조서" 를 낸 다음 다시는 군사를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한무제 시기 동서남북으로 전개되었던 거대한 군사작전은 이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다만, 전후 70여년간 막대한 영향을 끼쳐 역사에 이름을 남긴 백등산 포위전에 비해 이 연연산 전투는 '엄청나긴 하지만, 단발적인' 승리로 남았습니다. 흉노 역시 수십년간에 걸친 거대제국 한나라와의 전투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이 승리를 활용한다거나 이를 이용해 한나라에 우위를 점한다거나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투 이듬해에 흉노의 선우가 한나라에 사절을 보내 이러한 요구를 하긴 했습니다.
"남쪽에는 대국인 한이 있고, 북쪽에는 강한 흉노가 있습니다. 지금 한나라와 흉노가 국경 지대에서 큰 관문을 열고, 한나라가 종실의 여인을 보내 내 아내로 삼게 하며, 매년 몇가지 품목을 나에게 주면 흉노는 더 이상 변경을 취지 않겠습니다."
이에 한나라 역시 사절을 보내 흉노와 대화를 했는데, 이 대화가 선우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선우는 갑자기 한나라의 내정 문제를 거론하며 디스를 걸었습니다.
"내 듣기로 한나라는 예의의 나라라고 알고 있는데, 이사 장군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전 태자가 군대를 일으켜 바란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이오?"
그러자 한나라의 사절 역시 화가 났는지, 선우의 조상인 묵돌까지 거론하며 패드립으로 대꾸 한것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승상이 사적으로 태자와 싸워 태자가 군대를 일으켜 승상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승상이 이를 무고하니 그 때문에 승상을 베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군대를 가지고 논 것에 불과하여 그 죄가 태형에 해당하는 작은 잘못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찌 묵특선우가 몸소 그의 아비를 죽이고 그를 이어 즉위한 것이나 계모를 늘 처로 삼는 것과 같은 짐승 같은 행동과 비교할 수야 있겠습니까?”
이에 격분한 선우는 사절을 붙잡았지만, 아무래도 흉노의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조상 욕을 먹고도 차마 사절을 죽이진 못했고, 3년 뒤에 다시 풀어주게 됩니다. 이때의 선우는 계속해서 한나라와 화친을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화친이 이뤄지기 전에 죽었고, 이후에도 몇차례 한과 흉노의 분쟁이 있긴 했습니다만 무제 수준의 거대한 전쟁이 연이어 펼쳐지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두 국가간의 일은 이런 식으로 전개 되었는지....문제는 항복한 이광리 입니다. 이광리가 항복한 그 시점에서, 장안에 남아 옥에 갇혀 있던 그 일가족은 모두 참살 당했습니다. 한순간에 명예와 가족을 모두 잃어버린 이광리 였지만, 흉노 선우는 이광리가 본래 한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있던 것을 아껴서 자기 딸을 주고 사위로 삼고, 휘하에 있던 한인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이광리를 두고 대접했습니다.
그러자 문제가 생겼는데, '한인 주제에 총애를 받은 이광리에 대한 다른 흉노인의 질투' 가 일어나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를 아니꼽게 여긴 것은 흉노인들보다도 되려 다른 한인들이었습니다. 당시 흉노에 투항했던 한인들 중에서 위율(衛律)이라는 사람이 선우에게 꽤 총애을 받았는데, 이광리가 나타나자 자기가 뒷전이 될까봐 걱정된 위율은 전전긍긍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1년 쯤 지났을때 마침 선우의 어머니가 아파 흉노의 샤먼에게 선우가 방도를 물어보려고 할떄, 샤먼을 매수해 이렇게 말하게 했습니다.
"예전이 흉노가 군대를 동원해 공격을 할때면, 늘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이사 장군을 잡으면 그를 바쳐 제사를 지내겠다' 고 했었는데, 지금 어째서 그를 쓰지 않는 것이냐?"
그렇게 되어 운명이 조금만 달랐으면 한나라 땅에서 한량으로 배만 긁으며 평범하게 지냈을 이광리는, 고향에서 수천킬로미터는 떨어진 머나먼 흉노 땅에서, 흉노도 아니고 같은 한인의 탓에 인신공양의 제물로 죽게 되었습니다. 어이가 없고 화가 난 이광리는 죽게 되기 전에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내가 죽으면 반드시 흉노를 멸망시켜버리겠다! 내 반드시 흉노를 망하게 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우는 이광리를 죽였는데, 우연인지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후에 내리는 눈이 몇개월이 되도록 멈추지 않아 가축들이 죽어가고, 척박한 북방에서 그나마 곡식을 기를 수 있는 땅에서도 곡식이 잘 익지 않는데다 전염병까지 돌았습니다. 이에 선우는 이광리의 사당을 세워 죽은 이광리를 위로했다고 하는, 이광리 입장에서는 정말로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가 후일담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