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르륵 써내려 가독성이 좋지 못합니다. 미리 사과의 말씀 올립니다.
#1
첫인상은 나쁘지 않은데? 정도였다.
잠깐이나마 넓디넓은 집에 살았기 때문에 다시 좁은 집에서 살게 되면 답답해질텐데, 너무 힘들게 생각하지 말라고.
다같이 이 위기를 잘 이겨내보자는 말을 아침 밥상에서 두어번 정도 들은 상황에서.
비록 방 안으로 집어넣을 창문이 마땅하지 않아 아주 커다란 장은 버릴 수 밖에 없었고
니방 내방 할 것 없이 네 식구가 옹기종기 모두 모여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각자의 생활을 해야 했지만,
그래도 왠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고교생이였고, 집보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갑절은 많았고,
집이 경매에 팔리려고 하기 직전에 공부에 재미를 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당장 좁아진 집보다는, 아니 좁아진 집 뿐만 아니라 한 두 가지 반찬이나 국으로 일주일을 견뎌야하는 것이나
가끔씩 쌀이 없기도 했고, 라면이 없기도 한 일이나, 보잘 것 없는 동전이나 지폐를 더 이상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나
자기 전 나 홀로 방 안에 누워 이런 저런 노래를 듣거나 샤프를 끄적이며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고 했던 나의 감정적인 사생활이 없어진 것이나
아무튼 그런 보통의 가난에서 발생하는 시시콜콜한 사정들보다,
가장 견디기 괴로웠던 건 엄마가 거의 매일 새벽 악몽에 시달려 울거나 울음을 삼키며 잠에서 깼고, 마땅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
그때마다 나는 엄마, 엄마, 하고 부르고 손을 꼭 잡거나 엄마를 안아주곤 하는 일이였다.
그때마다 엄마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눈물을 닦았고, 엄마는 아니다 괜찮다 라는 말을 했고,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엄마 옆에 누웠다.
엄마의 눈물을 볼때마다 우리 집에 들이닥친 일들이 내 가슴에 길고 깊게 패였고, 나는 그 우울에 넌더리가 났다.
때때로 깊은 신음을 섞으며 엄마는 이기지도 못할 술을 마셨고, 대체로 그런 날의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던 것 같다.
어느순간 엄마의 마음의 폭풍이 가라앉고 깊은 결심이 서는 순간에도, 아니 그러고도 한참의 시간동안 나는
어두운 방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와 범벅이 된 식은땀과 흐르던 눈물이 잊혀지질 않았고, 그런 생각이 날 때면 속절 없이 눈물이 났다.
#2
이제와 잘잘못을 따져서 무엇하겠느냐만은, 가장 아무것도 몰랐고 그래서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한 내가 보기에
우리 모두가 잘한 것은 쥐꼬리만큼 밖에 없었고 잘못한 건 하나씩 읊을수도 없을만큼 산더미 같았다.
그 과오를 이야기하자니 감히 나에게 그런 자격이 있을까 싶어 단 한번도 말로 꺼내어보지 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허나 그 이후의 시간에 대해서는 나 또한 책임이 있으므로, 가끔씩 떠올려 곱씹어보곤 했었다.
그런 일들 이후 우리 집에선 당연하다는 듯이 웃음이나 대화가 사라졌다.
종종 나오는 이야기는 원금이나 이자나, 경매 같은 이야기들이였고, 대체로 언성이 높아지거나 얼굴이 붉어지며 이야기가 끝났다.
밥 먹을 때가 아니면 굳이 얼굴을 맞대지 않았으므로 그런 이야기는 보통 밥상머리에서 나왔고, 나는 그때부터 밥상 앞에서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아니,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기보단 뭔가 밥을 앞에 대고 이야기를 하는 기능이 퇴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우울한 데는 이유가 없고 그냥 다 돈이 없어서 그런거라는데, 어린 나이에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고,
모난 말들로 서로를 상처주는 모두가 싫었고 모든 이야기가 돈에서 돈으로 끝나는 게 싫었고
나만큼이나 가슴을 앓던 형제가 그런 모습들을 외면하고 혼자만의 공간에 쳐박혀있는 것도 싫었다.
아직 우리집이 경매에 넘어가기 전, 야자를 마치고 돌아온 집에는 구둣발로 마루에 서서 무언가 이야기하는 채권자의 모습과,
방에 쳐박혀서 컴퓨터를 하고 있는 형제와, 난처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있었고, 그냥 뭔가 그런 일들이 있었다.
그 순간 그 장면만큼은 언제 생각해도 생생하게 하나하나 기억날만큼 머릿 속에 남아 있다. 아마도 꽤 충격적이였던 일이였나보다.
얼굴이 시뻘개져 가방을 집어던지고, 아버지의 앞에 섰다. 그리고 아마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남의 집에서 구두발로 들어와 남들 다 자는 시간에 무어하는 짓이냐며.
당신들 나가고 나면 우리는 이 곳에서 구두 자국을 닦아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내일 아침엔 밥을 먹어야 한다고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따지는 하얀 하복의 고교생을 보는 그 아저씨 아줌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끔씩 궁금했다.
다행히도 그 까만 구둣발들은 조용히 돌아갔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왔다.
원래는 몇억 얼마짜리였는데, 경매를 통해 몇천만원에 집이 싸게 팔려나갔다고 했다. 글쎄, 잘은 몰랐지만, 마음이 좀 그랬다.
그러던 어느날, 밥을 먹고 일어나던 아버지가 휘청하며 의자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 일이 자꾸 생각났다.
그리고 종종 울었다. 휘청하며 쓰러지는 아버지의 모습에 너무 많은게 생각났다. 울 일이 많은건지 눈물이 많은건지 모르겠는데, 그냥 참 많이도 울었다.
#3
각자 그 상황을 몸서리칠만큼 견디기 힘들어했고, 나름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한들
평범하고 특출 난 데 없는 네 식구가 천단위를 넘는 빚을 단기간에 해소할 수는 당연히 없는 일이였다.
그렇게 한 곳에 살며 넋이 나간 채로 하루씩을 견뎌내는 생활이 시작됐고, 대부분의 생활동안 툭 튀어나온 서로의 존재를 어쩔 수 없이 견디며 지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의 우리는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각자 노력하는 대신 서로와의 관계를 희생하게 된 것만 같았다.
비록 사랑이라던가 하는 단어는 섞지 못했어도 아주 가끔은 서로의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기도 했다.
그래도 가족이였고, 아마 서로를 좋아하진 않는 관계도 있었으나, 그래도 깊게 사랑했으므로.
그렇다 한들 단절된 신뢰나 깊은 상처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였으므로, 우리는 더이상 서로를 좋아할 수는 없게 되버린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그게 슬프지도 않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조차도 몰랐으니까.
#4
그러고보면 나는 별 노력을 안했는데, 그냥 돈이 없으니 놀 수도 없었고, 마침 운 좋게 공부가 재밌기도 했고,
알아가는 재미를 깨달았는데 아는 게 하나도 없다보니 알아갈 게 너무 많았다.
얼마나 형편 없었느냐면 자그마한 32줄짜리 수첩에 영 단어를 주루룩 적어놓고서 외우기 시작해 그 백장 가까운 수첩이 열개가 채 되기 전에 고교시절이 끝났는데, 그 많던 수첩의 가장 처음은 school이나 basic 같은 거였다. it이나 that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할 게 없어 공부를 하다보니 적당한 하위권에서 적당한 상위권이 되었고, 전교 1등이란 것도 해보게 되었고,
그렇게 공부를 하루하루 하다보니 수능을 쳤고, 운 좋게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다니게 됐다.
지나고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이였지만 그래도 허벅지를 찔러가며 잠을 쫓아냈고 사물함에 기대어 눈을 비비적거렸던 일들과
영단어를 외우거나 수능특강을 풀던 자습실에서의 내 모습은 종종 생각이 난다.
연락은 하지 않지만 그 때 한숨이나 우울이나 웃음들을 함께 나누었던 친구야들의 얼굴은 언제 생각해도 너무나도 정겹고 고맙고 그랬다.
나한테 맨날 암바사 사준 친구한테는 언젠가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말로만 보답보답.. 이젠 니 어디서 뭐하는지도 몰라.. 헤헤.. 미안..
군데군데 까맣고 우둘투둘한 왼쪽 허벅지는 이제 아무런 감흥조차 없으나, 그 이후 대학에 와서는 그렇게까지 공부를 해 본적이 단 한 번 뿐이였으므로,
아마 미친거였을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5
그렇게 살다보니 시간이 소로록 빠르게 흘러가버렸고, 대학생이 되서 술도 마셔보고 연애도 해보고 좋은 사람도, 나쁜 년놈들도 만나보고
휴학해서 돈도 벌어보고 또 써보고, 공부해서 장학금 받고 알바해서 용돈 만들어쓰고,
상황이 안 좋을 때면 아무도 하지 못하는 집안일을 하며 용돈을 타 쓰고, 그런 보통의 가난한 대학생으로 살았다.
아참 군대도 갔다왔다. 으으.. 으으으...
생각보다 살만했던 게, 그 와중에 이쁘고 이쁜 여자들은 또 많이도 만나거나 차였고, 남는 시간마다 피씨방에서 게임도 했고, 담배도 많이 피웠다.
심지어 여자 만나다 질질 짰던 얘기를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니.. 나란 놈이란.. 걔넨 나한테 아무 생각도 없었을텐데..
깊게 고뇌한 적은 많았으나 기억에 남는 일들이 없어 유의미한 시간들이 거의 없었고, 인생에 획을 그은 사건들도
고교생 때 그어진 획에 비해 자그만했기 때문에 그냥 대체로의 일상은 스치듯이 지나갔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졸업을 했고, 조그마한 곳에서 작지만 귀찮은 일들을 하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작지만 그래도 그럴듯한 월급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야 사회인이 된 지 반년이 되었다. 장학금을 받아도 모자랐던 학자금을 메꾸기 위해 받았던 대출을 거의 다 갚았고,
소중한 것들의 낭비는 대체로 어엄청 즐거운 편이므로 돈이나 시간이나 인생을 낭비하며 살 생각을 하던 날들이였다.
어느새 나보다 훨씬 일찍 취업을 했던 형은, 아니 이 양반은 나보다 더 독하게 노력을 했기 때문인지 정-말 그럴싸한 곳에서 정-말 그럴싸한 일을 했고
받는 돈도 많았고 복지 카드니 어쩌니 그런 것도 어엄청 많았다.
나이차가 별로 나지 않는 우리 둘이 그 좁디 좁은 집안에서 서로의 사생활을 공유하면서까지 사이가 좋을만큼 둘 다 성격이 좋지는 못했으므로
관계는 점점 어그러졌고 대화를 하지 않는 날들이 늘어났고 서로가 싫어지기 시작했으므로, 그저 짧은 생각으로 그 돈들 다 어따쓰나 싶었는데
다 빚 갚고 적금 들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에 썼다더라. 아마 그 적금에 더불어, 나이드는지도 모르고 쉴틈없이 일한 아버지와 엄마의 시간들과
덩치값 못하는 몬나니 아들 두 놈에 대한 감정과, 그 피 땀 눈물..내 마지막..아니..
아무튼 그런게 고스란히 일고여덟자리의 숫자로 통장에 당당하게 찍혀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이사를 간댄다. 어엉..?
#6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온지도 벌써 십년이 다 되어간다.
어쩌다 무슨 일로 집 앞을 함께 걸을 때면 집 앞에 떨어진 은행들이 코를 찔렀고, 엄마와 나는 손을 잡고서 후다닥 도망을 쳤다.
언제는 엄마가 그래도 내년 은행이 떨어질 때는 여기서 나가겠지, 여기서 나가겠지, 하며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새 10년이 되었단 말을 했다.
아마 엄마의 악몽을 꾸던 그 어둔 밤들과 그 상처나 그런 것들은 어린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또 어두웠을 것이고,
내가 그랬듯이 아무도 모르게 눈물 흘렸던 적도 많았겠다 싶었다. 나는 왠지 엄마의 손을 꼭 쥐었고, 엄마도 내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같이 웃었다.
나는 워낙에 생각이 많은 편이였고, 그것들을 가다듬거나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으나, 느긋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정리정돈 하지 못한 까슬까슬한 인성으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받았고, 울기도 많이 울었고 나 때문에 운 사람도 분명 있을거야..
어느 곳 누군가에게는 생각날 때마다 곱씹을 잊을 수 없는 십새끼가 되었을 것이다.
여전히 가난으로 힘들고, 나 또한 보통처럼 쉽게 이겨내지 못할 것이고, 아마 앞으로도 힘들겠지.
앞으로 뭔 일을 겪든 나와 형과의 관계나, 형과 아버지와의 관계는 쉽게 좋아지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짧게 생각하기에 관계를 위해 무언가를 희생해야 하지 않을까.
흐지부지한 내 글솜씨만큼이나 일상이나 감정들이 정리되지 못한 채로 널부러져 있으므로, 아마 앞으로도 꽤 오래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사를 간다니, 내 방이 생긴다니.. 저, 이사 갑니다. 이사 간대요 이제. 이사를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