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자흥이 정원 땅의 이름 좀 있는 부잣집 아들에 불과하던 무렵이다. 그는 언젠가 일을 저지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뜻을 숨기고 쓸만한 사람을 모으는 일에 집중하며 두루두루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 곽자흥의 지인 중에, 마공(馬公)이라는 노인이 한 명 있었다.
제대로 된 이름도 없던 마 씨 영감이지만, 곽자흥은 딱히 사람 가리지 않고 마공하고도 좋은 사이를 유지하며 친구관계를 맺었다. 마공은 본래 숙주(宿州) 출신이라고 하는데, 노인에게는 정온(鄭媼)이라는 부인이 있었다. 온이라는 것은 제대로 된 이름이 아니라 그냥 정씨 노파라는 정도의 의미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시절 가난한 평민들의 호칭은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그런 마공은 어느 날 덜컥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마도 몹쓸 돌림병이라도 걸렸던 건지, 마공뿐만 아니라 부인인 정씨 노파 역시 비슷한 무렵에 같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마공은 죽기 직전, 자신을 만나러 온 곽자흥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어차피 가진 것도 없으니 이렇게 살다가 죽어도 아쉬울 건 없다마는, 다만 유일하게 남은 것 딱 하나, 즉 자신의 혈육인 딸을 맡아주기를 부탁했던 것이다.
마공에게 남은 핏줄이라고는 딸이었던 마 씨 한 사람 밖에 없었다. 마 씨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결혼하고 나서는 마부인이었고, 황후가 되고 나서는 마황후였다. 그리고 죽은 뒤에는 고황후(高皇后)로 불렸다. 아마 십중팔구는 애당초 제대로 된 이름이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황후가 되고 나서는 공적인 호칭 대신 사적인 이름으로 불릴 일 자체가 없었을 테고 말이다. 결국 아버지도 이름이 없고, 어머니도 이름이 없으며, 본인조차 이름이 없었던 셈이었다. (1)
죽은 마공과의 친분 때문인지, 이 험한 세상에서 홀로 남은 천애 고아에 대한 동정심인지, 곽자흥 내외는 마 씨를 데리고 가 자신의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끼며 길렀다. 그런 마 씨의 나이도 이젠 스물을 넘겼다. 계속 자신이 데리고 있을 수도 없으니 적당한 혼담을 알아봐야 하는데, 그런 참에 주원장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곽자흥은 마 씨와 주원장의 혼인을 주선했다. 쓸만해 보이는 부하를 일찌감치 자기 곁에 두기 위한 방편의 하나이기도 했고, 세상 천지에 끈이라고는 없는 주원장으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주원장의 나이 25살, 마 씨의 나이 21살 때의 일이다. 둘 모두 당시로서는 결혼 적령기를 한참 넘긴 노총각, 노처녀였다. 결혼 이후 주원장은 부대 내에서 주공자(朱公子)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철저한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였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좋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마 씨에 대해선 별로 아름답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없었지만, 대신 온화하고 조용하면서도 생각이 깊었다. 자란 환경을 생각하면 의외로 글도 알고 있어 책 보는 것 역시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부대의 대장인 동시에 곽자흥의 비서나 다름없던 주원장은, 업무 중이 아니라 일상생활 중에도 갑작스럽게 “나중에 이런 일을 해야 하니 미리 기록해 두시오.” “이런저런 부분을 잊지 말고 적시해 두시오.” “이걸 이렇게 했다는 걸 적어두시오.” 라고 시키는 일이 잦았다. 밥을 먹다가도 그러고 잠을 자다가도 그러고 다른 일을 보던 중에도 그랬으니 성가실 법도 하건만, 마 씨는 주원장이 당부한 일은 잊지 않고 꼭 그 말대로 했다.
주원장과 마 씨 사이의 남을 일화는 꽤 많은 편이다. 꼭 2차적인 야사 집을 들추지 않아도 명사 등에 남은 이야기만 해도 적지 않다. 조금 흐름과 어긋날 순 있겠지만, 그중에 몇 가지만 소개해보려고 한다.
주원장이 모시고 있는 곽자흥은 복잡한 성격이었다. 어쩔 때는 화끈하며 천하영웅처럼 화통하다가도, 어느 순간엔 의심에 가득 차서 주변인을 경계했다. 곽자흥이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있을 때면, 주원장으로서는 조용히 몸을 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싸우고 일하는 입장에서 제대로 먹지 못하는 건 고통스러웠다. 흉년이 든 시점인데 혼자 밥을 잔뜩 먹고 있으면 그것 가지고도 시비를 거는 상황이라, 먹는 것 마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늘 배고프지만 드러내놓고 말하지도 못하고 그저 전전긍긍하고 있으려니, 마 씨가 어디선가 찐 떡을 2개 구해서 남편에게 가져주었다. 그런데 떡을 주는 마 씨의 손을 가만히 보니 살이 데어 있었다. 사실인즉 어디서 막 쪄서 내놓은 떡이 있길래 마 씨가 남편을 생각하고 몰래 훔쳐왔는데, 바로 쪄놓은 뜨거운 떡을 맨손으로 급하게 줍다 보니 손이 데어버렸던 것이었다.
주원장은 마 씨의 화상 입은 손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또 늘 말린 건량과 말린 육포 같은 가지고 다니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해놓고서는, 바쁜 주원장이 제대로 먹을 틈도 없이 움직이고 있으면 이런 음식을 주어 어디서건 굶주리지 않게 했다. 그런데 건량이나 육포를 만들 재료가 하늘에서 떨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주원장을 위해 음식을 마련해놓은 마 씨는 늘 제대로 먹지 못해 굶주렸지만, 이를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2)
황제가 되고 난 이후에도 주원장은 종종 그날의 아련한 기억들을 신하들 앞에서 이야기하며 아내 자랑을 했다. 거의 마성(魔性)의 인간으로 보이는 황제 시절 주원장의 몇 안되는 인간적 일화 중에 하나다.
이런 두 사람을 이어지게 해준 곽자흥에겐 확실한 의도가 있었다. 쓸만한 부하를 곁에 두려는 게 가장 큰 이유이긴 하지만, 막연하게 ‘인재를 모은다’ 는 부분을 떠나 본인의 입지에도 큰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위해서도 곽자흥에게는 좋은 측근들이 많이 필요했다.
곽자흥의 세력이라고 간편하게 일컫긴 했지만, 호주를 장악한 홍건적 부대의 대장은 곽자흥 뿐만이 아니었다. 부대의 대장은 곽자흥을 포함해 모두 5명이었고, 그들은 각각 서로를 원수(元帥)라고 일컬었다. 5원수 집단 정치체제였던 셈이다.
뚜렷한 기반 없이 급하게 사람을 모아 봉기를 해야 했던 곽자흥으로선 이런 조직 구조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의 부하가 되어라.’ 라고 하는 것보다는 ‘나의 동료가 되어라.’ 라고 하는 편이 동조자를 구하기엔 더 쉽지 않은가. 그 덕분에 처음 군사를 일으킬 당시에는 쉽게 따르는 사람을 1만 명이나 구하긴 했지만, 이 시점에 이르고 보니 태생부터 문제가 있던 이 조직구조가 계속 말썽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들 다섯 원수의 개인적인 인간관계가 끈끈하게 연결되어 좋기라도 했다면 또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장 급해서 뭉치긴 했지만 곽자흥과 다른 네 명의 관계는 썩 좋지 못했다. 곽자흥이 보기에 다른 원수들은 큰 뜻도 없고 무식하며 약탈밖에 관심이 없는 숫제 도적떼 들이었다. 그는 ‘이 자들은 큰일을 같이 할 사람들이 아니다.’ 라고 무시해버렸다. 그러자 그 네 명도 덩달아 같이 뭉쳐 곽자흥의 험담을 하고 무슨 일을 결정할 때마다 끼리끼리 싸고돌 뿐이니, 그 꼴이 보기 싫었던 곽자흥 역시 업무는 거의 보지 않고 집에만 머물며 거의 두문불출했다.
따라서 조직 내의 힘겨루기를 생각한다면 주원장 같은 유능한 부하는 일찌감치 많이 포섭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주원장도 곽자흥의 그런 속내를 알아차리고 곽자흥과 다른 네 명 사이를 앞장서서 적당히 중재하면서도 따로 곽자흥에게 이런 경고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자들이 날이 갈수록 서로 합쳐지며 우리를 고립시키니,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필시 제압 당하고 말 것입니다.” (彼日益合,我益離,久之必為所制) (3)
그렇게 같은 배를 탄 동지들끼리의 눈치 싸움이 벌어지던 무렵, 상황을 바꾸는 외부적 요인이 발생하게 되었다.
주원장이 홍군에 투신한지 몇 개월이 지나, 달도 9월이 되어 여름도 지나가고 점차 초가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런 호주를 찾아온 두 명의 이방인이 있었으니, 바로 팽대와 조균용이었다.
이 두 사람은 전날 서주에서 지마이와 함께 군사를 일으켰던 반군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탈탈이 이끄는 진압군에게 세력이 모조리 괴멸 당했다. 그 두목인 지마이는 살해당했고, 남은 둘만 간신히 호주로 도망치는데 성공한 신세였다. 측근 및 얼마 되지도 않은 거렁뱅이 병사만 가진 채 비참한 꼴이 된 그들은 호주성의 홍군에게 도움을 청했다. 호주성에서는 의논 끝에 이들을 받아주었다.
다섯 명이나 되는 동등한 원수에 외부에서 온 팽대와 조균용까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호주는 금세 북적북적 해졌다. 사람이 많다 보면 그 안의 인간관계 역시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곽자흥이 새로 들어온 두 남자를 가만히 살펴보니, 팽대는 제법 머리도 있어 보이고 평소의 행실도 호걸스러워 한번 사귈만한 사람이었다. 반면 조균용은 무례하고 아는 것도 없는 인물이라, 별로 가깝게 대해서 좋을 게 없을 듯했다.
그래서 곽자흥은 팽대와는 제법 친하게 지냈지만 조균용은 무시하면서 별로 얽히려 들지 않았다. 이런 곽자흥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사람이 있있다. 바로 손덕애(孫德崖)였다.
손덕애는 호주성의 5원수 중에 한 사람으로, 곽자흥에 반감이 있는 네 명의 원수들 중에서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사사건건 곽자흥을 매장시켜버릴 음모만 꾸미던 그는 상황이 쓸만해 보이자 바로 조균용에게 달려가 바람을 넣기 시작했다.
“곽자흥은 오직 팽 장군만 알 뿐이지, 장군이 있는 건 알지도 못하오.” (子興知有彭將軍耳,不知有將軍也)
안 그래도 곽자흥이 은근히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느끼고 있던 조균용은, 이런 손덕애의 부추김까지 듣게 되자 완전히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르게 된다. 더구나 손덕애를 비롯한 4원수가 은근히 자신의 뒤를 받쳐주고 있으니 자신이 곽자흥을 치더라도 엄밀히 따지면 반란도 아닌 셈이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거리낄게 없어진 조균용은 휘하 친병을 동원해 바로 곽자흥을 습격했다.
때마침 곽자흥의 최측근인 주원장은 다른 곳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보호해줄 사람도 없이 기습공격을 당한 그는 제대로 반항도 못해보고 사로잡히고 말았다. 조균용은 혹시나 뒷일이 켕겼는지 당장 곽자흥의 목을 베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사로잡은 곽자흥을 형틀에 묶어 손덕애의 집에 던져놓았다. 곽자흥을 죽이는 공을 손덕애에게 넘겨서 후환을 없애려는 판단이었다.
호주에서 변란이 일어날 때 회북(淮北) 지방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던 주원장은 돌아와서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4) 천만다행으로 아직 곽자흥이 죽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손덕애의 손아귀에 있으니 생선이 도마 위에 오른 모양새가 아닌가.
“내가 곽 씨에게 깊은 은혜를 입었다. 그런데 어떻게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吾受郭氏深恩,可不赴乎) (5)
당장 곽자흥을 구해내야 하겠지만, 일개 부장에 불과한 주원장으로서는 5원수 중에 한 사람인 손덕애와 정면 대결을 하기엔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고민 끝에 그는 곽자흥의 아들인 곽천서(天敍)와 곽천작(天爵)을 데리고 팽대를 찾아갔다. 곽자흥이 팽대를 편애하다가 지금의 이 사간이 일어난 것이니, 잘 대해줬던 그를 설득해서 곽자흥을 구하려 하는 계산이었다.
곽자흥에게 좋은 대접을 받기도 했고, 주원장의 설득과 더불어 곽자흥의 두 아들이 서로 제발 아버지를 구해 주십사하고 빌고 있으니, 강호의 의리도 있고 사나이의 자존심도 자극받은 팽대는 화통하게 그러겠다 대답했다.
“내가 여기 있는데, 감히 어떤 놈이 다진 고기(魚肉) 꼴이 되고 싶어서 설쳐댄다는 말인가!” (吾在,孰敢魚肉而翁者) (6)
기세등등한 팽대는 그 즉시 손덕애의 집으로 달려가 대문을 때려 부쉈다. 수비병들도 놀랐는지 감히 달려들지 못하고 있던 찰나, 팽대를 따라온 주원장은 재빨리 집으로 난입해 갇혀 있던 곽자흥을 구하고 형틀을 깨부순 후 그를 사지에서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주원장이 구하지 않았다면 필시 목숨을 잃었을 곽자흥이다. 서로가 대놓고 죽이려 들 정도였으니, 이제 더 이상 서로 같은 방에 누워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곽자흥 일파는 곽자흥 일파대로, 손덕애 일파는 그 일파들대로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칼을 들어 올리며 욕설을 퍼붓고 금방이라도 싸움을 벌이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상상조차 못했던 소식이 들려왔다.
“적이 쳐들어왔다! 관병이 몰려왔다!”
놀란 성 내의 여러 사람들은 방금 전까지의 분쟁도 잊어버리고 다투어 성 밖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 말대로 수많은 원나라 병사들이 새까맣게 올려오고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원나라 군대의 정체. 이 군대의 정체는 지난 9월 서주를 공략해서 초토화 시켰던 탈탈의 병사들이었다. 비록 탈탈은 조정의 명령을 받고 대도로 돌아갔지만, 군사들은 아직 남아 근처의 도적을 소탕하고 있었다. 이들을 이끄는 대장의 이름은 가로, 지난날 탈탈의 명령으로 황하 치수 공사를 감독했던 그 인물이었다.
서주 홍건군의 대장 지마이를 잡아 죽인 그들은 도망친 잔당을 쫓아 호주까지 오게 되었다. 즉 이 군대는 팽대와 조균용이 불러들인 셈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관군에게 있어 홍건군은 모두 토벌 대상, 눈앞에 홍군이 있으면 모두 죽이려고 할 테니 따로 원망하고말고 할 것도 없었다.
드라마 주원장 中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상대를 욕하며 죽이려고 했던 호주성의 여타 호웅(豪雄)들은, 쭈뼛거리면서도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수비 태세에 나섰다. 성이 함락되면 내편 네 편을 떠나 모두 몰살이다. 여기서는 빌릴 수 있다면 숙적이 아니라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만 했다.
지난날 호주성 근처에 주둔했던 원나라 장수 철리불화는 하라는 전투는 하지 않고 민간인을 홍건적 포로로 위장시켜 전공을 속이는 사기극이나 저질렀다. 하지만 탈탈의 심복이던 가로는 그런 협잡질이나 하는 소인배와는 질이 다른 장수였다. 그는 헛생각 따윈 하지 않고 성실하게 공격에 나섰다. 호주성을 포위한 원나라 군사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성내의 곽자흥, 손덕애, 주원장, 팽대, 조균용 등은 ‘죽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맞서 싸웠다.
그들에겐 다행스럽게도 견고한 성벽에 해자가 있는 호주성은 어지간한 공격으론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때마침 계절은 곧 겨울이 되어 날씨까지 매서워졌다. 원정군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곤란한 싸움이었다.
호주 공성전은 무려 7개월을 넘게 끌었다. 전투가 길어지며 원나라 군도 점차 지쳐갔고, 포위가 유지되는 호주성 내 역시 양식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어느 쪽이건 더 이상 전투를 오래 끌긴 힘들어졌다.
관병을 이끄는 대장 가로 역시 슬슬 결판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적당한 날을 잡아 전투에 앞서 평장 월극찰아(月可察兒) 및 다른 부장들을 모두 소집했다. 그리고 그날의 싸움으로 전투를 끝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아군이 어명을 받들어, 8위 한군을 통솔해 호주를 포위한 지 7개월이나 되었다. 이제 모든 제장들은 마음을 하나로 하여 오늘은 반드시 성을 점령해야 한다. 최소한 점심까지 성곽과 해자를 함락시킨 후 안에서 점심을 먹도록 하자!” (吾奉旨統八衛漢軍,頓兵于濠七日矣。爾諸將同心協力,必以今日巳、午時取城池,然後食)
연설을 마친 그는 말을 타고 직접 성벽 아래까지 나아가 군사를 통솔하며 전투를 개시했다. 그 모습에서 오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부어 성을 함락시키겠다는 기백이 넘쳐 흘렀다.
그런데 그 순간, 말에 타고 있던 가로는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며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지휘를 하던 그가 비틀거리며 말에서 떨어지듯 내리니, 주변의 장교들이나 병사들은 깜짝 놀라서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가로는 어질어질하며 앞이고 뒤고 분간할 수 없는 와중에서도 거의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흩어지지 말라!” (且戒兵馬弗散)
그리고 그게 마지막 말이 되었다. 말을 마친 그는 바로 기절해서 자리에 쓰러졌다.
지휘관이 쓰러졌으니 전투는 당연히 이어지지 못하고 유야무야되었고, 가로는 곧바로 군중으로 실려와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급한 대로 용하다는 의사를 데려와 탕약을 만들어서 먹게 했으나 제대로 넘기지도 못했다. 땀을 비 오듯 흘리던 가로는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곧 사망하고 말았다. 실로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7)
평장 월극찰아는 죽은 상관의 시신을 수습하고 직접 초상 도구를 마련한 뒤 군사를 시켜 그 유해를 호송해 안전한 곳에서 장례를 치렀다. 지휘관이 죽어 초상이 나자 관군은 전투를 계속할 동력을 잃었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포위를 풀고 돌아가버렸다.
믿을 수 없는 운명의 장난으로 호주는 구원받았다. 호주 성 내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명운도 좀 더 이어지게 되었다.
때는 1353년 5월이었다. 어느덧 겨울이 물러가고, 들판에서는 생글거리듯 만발한 봄철의 꽃과 지저귀는 새소리가 가득했다. 주원장이 홍군에 투신한지 꼬박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1) 명사(明史) 권 113 태조효자고황후 열전
(2) 위와 같다
(3) 명사 권 122 곽자흥 열전
(4) 태조본기에서는 주원장이 임무 수행 중 소식을 듣고 놀라 달려왔다고 기록되어 있고, 곽자흥 열전에서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주원장이 그때서야 소식을 듣고 움직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5) 명사기사본말
(6) 명사 권 122 곽자흥 열전
(7) 원사(元史) 권 187 가로 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