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공짜로 많이 보았으니, 좀 갚기도 해야겠다 싶어 무거운 글쓰기 버튼을 처음 눌렀습니다.
음식에 관한 말은 어디고 넘쳐나지만, 정작 어디 가서 먹어 보았다는 콜렉터들만 넘칠 뿐,
'왜 맛있는지', '어떻게 해야 더 맛있을 수 있는지'를 묻는 이는 드물고, 그에 대한 답은 더욱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적어도 제 주식인 고기, 주력 요리인 구이에 대해서만큼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을 통해 '왜'와 '어떻게'에 대한 답을 내놓고 싶었습니다.
'왜 고기인가', '고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2편의 일반론을 지나,
고기가 식탁에 오르는 과정을 따라 품종 선별, 비육, 도축, 정형, 숙성의 순으로 작성될 본론 1,
그리고 많은 분들이 기대하실 '제대로 된 구이법'에 대한 본론 2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가능한 한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근거를 확인하고자 노력했습니다만,
워낙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다 보니, 비전문가의 자료 확인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요.
각 분야 전문가 여러분들의 많은 지적 부탁드리겠습니다.
외국 거주중인지라 시차 때문에 피드백이 느릴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럼 대하드라마(?) 구이학 개론,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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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비와 불고기의 나라, 회식이라면 삼겹살에 소주가 기본인 나라, 생일이면 돼지든 소든
갈비를 구워먹으며 행복해했던 추억을 만인이 공유하는 이 대한민국에,
고기에 대해, 구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글이 없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고기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할 기본 입문서를 찾고 싶은 분들,
고기를 지금보다 더 잘 굽고 싶은 분들, 더 건강한 고기를 찾고 싶은 분들,
그리고 맛있는 고기를 찾아 고깃집을 어슬렁거리는 모든 분들께 이 글을 바칩니다.
“요리는 습득이나 구이는 생득이다.” 백 년이 넘도록 미식가의 경전 역할을 해 온
『미각의 생리학』 중에서도 무려 ‘잠언’ 편에 나오는 말이다.1)
그러나 정말 그런가? 구제의 방법이 없는 요리치를 제외한다면, 구이 또한 습득이다.
섬세한 손길을 요하는 생선, 더 섬세한 손길을 요하는 채소라면 어려울 수 있지만,
비교적 쉬운 ‘고기’에 대해서만큼은 분명 교육을 통해 훌륭한 수준에 오를 수 있다.
“배우고 또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2000년 전 민물 회와 젓갈을 즐겨 드시던
숨겨진 미식가 공자님의 말씀이다.2)3)
그러니 구이의 원리에 대해 배우고, 실제 예들을 통해 익힌다면,
우리도 고기를 맛나게 구워 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선 고기에 대해 살펴보자.
열전달의 3가지 방법이나 비열과 열용량 따위를 먼저 설명했다가는
독자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 뻔하잖는가.
고기, 소화 잘되는 고기
1. 들어가며 - 왜 고기인가
남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매우 흡족한 일이다.
나와 비슷한 존재, 즉 동물을 먹는다는 것은, 나를 이루고 있는 각종 분자들 및
그 배열 구조가 유사한 존재로부터 영양을 섭취한다는 뜻이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나와 먼 존재를 먹어서 내 몸에 필요한 것을 얻는 것과,
나와 닮은 것을 먹어 내 몸에 필요한 것을 얻는 것 중 어느 편이 쉽겠는가?
온 세상의 식물들을 내 집에서 구해다 먹을 수 있는 21세기에도,
영양소 부족을 느끼지 않을 만한 완전 채식 식단을 짜는 것은
영양제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는 여전히 쉽지 않다는 것만 보아도 답은 명백하다.
필자가 농반진반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맛 3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뇌가 즐거워하는 단맛이요,4)
둘은 월급의 어원이 될 정도로 중요한 짠맛이요,
마지막 하나는 인간 진화의 원동력이었던 고기맛이다.”
단맛과 짠맛이야 워낙에 명백하니 그렇다 치고, 대체 고기에 인간 진화는 왜 갖다 붙인 것일까?
2. 원시인을 인간으로 - 고기, 소화 잘되는 고기
우선 진화 과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자. 필자는 가끔 후배들에게 진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을 해 줄 때면 RPG 게임의 예를 들곤 한다.
진화라는 게 어찌 보면 RPG 게임에서 스탯 찍는 거랑 비슷해. 전사를 하고 싶으면 힘에다 스탯을 찍고,
마법사를 하려면 지능에다 스텟을 찍어야 할 것 아냐. 간달프가 영화니까 멋있어 보이지,
너 같으면 힘법 망캐 키우고 싶겠냐? 총 스텟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으니,
힘에 스탯을 찍었으면 지능은 포기해야 하는 거고. 이건 어느 게임에서나 마찬가지인데,
주력 스킬에 스탯을 몰아 찍어야지, 이것저것 다 찍기 시작하면 쩌는 캐릭이 아니라 그냥 망캐잖아.
동물들도 똑같아요. 풀 먹는 애들은 날카로운 이나 강한 턱에 스탯을 찍는 대신,
풀을 소화시킬 박테리아들을 키워 줄 길다란 장하고 튼튼한 소화기관에 스탯을 찍은 거지.
고기 먹는 놈들은 사냥용 근육에, 씹어먹을 송곳니와 강한 턱, 그리고 단백질 소화용인 큰 위에다
스탯을 찍은 거고. 사람? 우리는 다 빼서 뇌에 몰빵한 캐릭인거고.
솔직히 우리는 머리 쓰는 것 빼고 잘 하는 게 없잖아. 그나마도 술 먹어서 망했지만.
아주 무식하게 표현하자면, 원시인이 사람이 되는 과정은 다른 곳에 찍혀 있던 스탯을
하나씩 빼서 뇌에다 찍어나가는 과정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엔 문제가 하나 있다. 게임에서는 맞아죽기 전에 물약만 빨면 그만이지만,
현실에서는 매일매일 ‘유지비’를 내야 한다는 것. 사실 뇌는 매우 유지비가 비싼 기관이다.
무게 기준으로는 몸무게의 3%도 안 되는 주제에, 기초대사량의 20% 가까이를 먹어치운다.
게다가 입맛도 더럽게 까다로운 녀석이라, 이걸 유지하려면 꽤나 잘 먹어야만 한다.
뇌는 성능은 끝내주지만, 고급 휘발유를 길바닥에 신나게 뿌리고 다니는
슈퍼카 같은 기관이라고 이해하면 쉽다.5)
그렇다면 인류는 어떻게 이 비싼 유지비를 감당하면서 ‘스탯 재분배’를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었을까? 리차드 랭엄 교수의 매력적인 가설은 다음과 같다.
① 오스트랄로피테신 (약 400만 년 전 / 뇌 용적 약 450 cm3)
사람보다는 침팬지에 훨씬 가까웠던 인류의 먼 조상은 나무 위에 살며
주로 과일과 나뭇잎, 그리고 영양 뿌리(카사바 등) 등을 먹고 살았다.
하지만 이들만 가지고는 커다란 뇌의 유지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냉엄한 진화의 법칙은 감당 못 할 슈퍼카를 할부나 리스로 지르는 행위 따위는
용납하지 않으므로, 이 시기 우리의 조상들은 작은 뇌로 만족해야만 했다.
② 호모 하빌리스 (발달된 뗀석기 사용 / 약 230만 년 전 / 뇌 용적 약 612 cm3)
이 상황을 타개한 것은 우리 몸과 닮은 영양 공급원, 즉 고기였다.
몸의 구조가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직 스탯 재분배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나,
영양가 있는 고기가 유지비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면서 뇌의 크기가 확 늘어날 수 있었다.
물론 초보적인 도구로 고기를 자르고, 찢고, 두들겨 고기를 연하게 만들어
소화를 도왔던 점도 간과하면 안 된다.
우리 인간은 그 때나 지금이나, 야생에서 얻은 날고기를 소화하기에는
성능이 부족한 소화 기관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6)
③ 호모 에렉투스 (나무에서 내려옴 / 약 170만 년 전 / 뇌 용적 약 950 cm3)
풀이든 고기든 야생에서 구한 것은 소화가 어렵다.
다시 말해 내장에 찍은 스탯을 함부로 빼서 뇌에 찍었다가는
소화를 시킬 수 없어 유지비를 감당 못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
여기에서 바로 ‘구운 고기’가 등장한다.
요리란 따지고 보면 ‘내장이 할 일을 아웃소싱하는’ 행위이다.
자르고, 다지고, 익히는 과정들 모두가 소화를 빠르게 하고
영양소의 흡수를 돕는 과정이지 않은가.
특히나 열에 의해 변성된 단백질은 매우 높은 흡수율을 보인다.
쉽게 말해 구운 고기란 곧 소화 잘되는 고기다.
불을 다루어 무언가를 구울 수 있게 됨으로써,
그리하여 ‘소화 잘되는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의 조상은 비로소 내장에 찍었던 스탯을 본격적으로 뇌로 재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인류는 불로 자신을 보호함으로써 나무에서 내려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게 되었고,
불에 구운 고기를 먹음으로써 더 가벼운 몸과 더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미래를 향해 걸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7)8)
그 ‘미래’에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다. 백만 년 전 인류는커녕
100년 전 사람들이 보더라도 마술로 여기기에 충분한 기술을 가지고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미래’의 존재들이다.
이 모든 것들은 두개골이라는 호두껍질 속에 든 작은 우주 덕택이며,
조금 더 정확히 말해 우주,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 - 즉, 과학 덕택이다.
이제 행성이 고정된 중력의 법칙에 따라 돌고 도는 동안 다양하게 진화되어 온,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맛진 존재들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해해 보도록 하자.
과학의 눈으로 바라본 고기는 어떤 모습일까?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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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 저, 홍서연 역, 『브리야 사바랭의 미식예찬 (원제: 미각의 생리학)』
2) 『논어』 학이편. 회는 향당편. 젓갈 이야기는 자로가 젓갈로 담가지는 형벌을 받아 죽자, 충격을 받은 공자가 평소 즐겨 먹던 젓갈을 끊었다는 고사 (예기).
3) 젓갈에 얽힌 고사를 잘못 이해하여 ‘공자가 사람 젓갈을 즐겨 먹었다’는 괴담을 퍼뜨리는 이들이 있으나,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틀렸다. 사람을 젓갈로 담아 각지에 배달하는 것은 경고의 의미를 담은 특별한 처벌의 방식이지 요리법이 아니다. 공자가 즐겨 먹었던 것은 일반적인 젓갈이다. 사람을 순장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상징적인 의미로 인형을 순장하는 것만으로도 대가 끊길 것이라고 한 것이 공자인데 (맹자) 그런 사람이 인육을 먹었을 리가 없다.
4) 뇌세포가 소비하는 에너지원은 딱 두 가지로, 포도당과 케톤체 뿐이다. 그나마 후자는 단식 등으로 포도당이 부족한 경우에 사용하는 비상 에너지원인 만큼, 정상적인 상황 하의 뇌세포는 포도당만 먹는 지독한 초딩 입맛을 지닌 셈이다. 설탕도 밥도 밀가루도 모두 ‘당류’에 속하며, 그 분해 산물로 포도당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설탕은 한 번 반으로 쪼개면 포도당을 얻을 수 있지만 (2당류 2당류), 다당류인 밥이나 밀가루는 신나게 분해해야 겨우 포도당을 얻을 수 있다. 설탕의 맛을 달게 느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사실 없다. 우리가 달다고 느끼는 것은 입이 설탕을 받아들였을 때 뇌가 그것을 달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며, 이는 진화적으로 만들어진 뇌의 선호를 반영하는 현상일 뿐이다.
5) 사실 소화기관도 많이 움직이는 데다, 소화액을 분비하기 때문에 ‘유지비’가 매우 높은 조직으로 분류된다. 내장이라는 ‘비싼’ 조직을 줄여서 뇌라는 다른 비싼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가설을 “비싼 조직 이론 (Expensive tissue hypothesis)”이라 부른다.
6) 호모 에렉투스로의 진화에 있어서도 불의 사용보다 도구의 사용이 더 큰 영향을 주었을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관해서는 Zink & Lieberman, Nature, 2016 을 참조할 것.
7) Richard Wrangham, 『Catching Fire-How Cooking Made Us Human』, Basic Books, 2009
8) 이 이론은 고고학적 뒷받침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호모 에렉투스가 불을 사용했다는 고고학적 근거들이 추가됨으로서 완전한 정설로 취급되고 있다. 더 늦은 시기에 인간이 불을 사용했다는 이론들은 카사바와 같은 영양 뿌리의 섭취, 도구의 사용, 사회적 교류 등에 큰 비중을 두어 뇌의 진화를 설명해 왔다.
9) 인용해 짜깁기한 원전들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충분히 발전한 기술은 마술과 구분할 수 없다.” 아서 C 클라크
스티븐 호킹, 『호두껍질 속의 우주』
다윈, 『종의 기원』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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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재는 총 15~20부작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근육의 과학 - 살아서 근육' 편이 이어집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도) 다음달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