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2번째 그랜드슬램 대회인 롤랑가로스(프랑스오픈의 정식 명칭)가 드디어 시작되었습니다.
시즌 초 하드코트에서 열린 중요한 대회 3개(호주 - 인디안웰스 - 마이애미)를 싹쓸이하며 부활한 페더러가 불참을 선언하였지만, 관심도는 대단히 높습니다.
1. 나달의 10번째 우승?
시즌 초 호주와 마이애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나름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지만, 그가 압도하던 페더러에게 3연패를 당했고, 헤비 탑스핀 포핸드의 강력함이 떨어지고, 짐승같던 활동량이 줄어든 모습을 보여, 나달도 전성기가 확실히 지났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클레이코트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몬테카를로 - 바르셀로나 - 마드리드를 휩쓸며 흙신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비록 로마에서 비교적 조기탈락했으나 본인이 너무 쉼없이 달려온데다가, 상대 역시 차세대 클레이 왕좌를 넘보는 티엠이었다는 점에서 그리 우려할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나이를 감안했을 때 로마에서의 조기 탈락으로 체력을 세이브할 여유를 챙겼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대회인 롤랑가로스를 대비하기에는 더 잘 됐다고 봅니다.
이번에 롤랑가로스에서 우승을 차지한다면, 전인미답의 단일 그랜드슬램 대회 10회 우승의 위업을 달성하게 됩니다. 처음에 나달 봤을 때 롤랑가로스 10연패를 예상했었는데, 그건 실패했죠(거의 달생했다는 건 함정....). 하지만 당연하게도 10회 우승은 전인미답의 영역이고, 이걸 달성한다면, 저의 이번 생애에서는 다시 못 볼 기록이라고 확신합니다.
어쨌거나 로마에서 일격을 당했지만, 이번 클레이 시즌 최고의 폼을 보이는 선수는 단연 나달입니다. 약해졌다지만, 그의 헤비 탑스핀 포핸드는 클레이코트에서 여전히 최고의 리셀웨폰이며, 그의 활동량은 전성기보단 못하지만 시즌초보다 확연히 좋아졌습니다. 나이를 고려한 플레이패턴의 다양화는 클레이코트에서 더 좋은 효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빠른 공격을 상당히 가미했음에도 하드에서 보단 클레이에서 더 효과가 좋아요.
나달에겐 페더러와의 에픽 결승 이후 가장 중요한 대회일 겁니다. 10회 우승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는 이상, 뛰어난 멘탈을 가진 나달에게는 승부욕을 더 끌어올리는 상승효과가 일어날 거라고 봅니다.
그는 과연 라 데시마를 달성할 수 있을까요?
2. 조코비치는 부활할 수 있을까?
작년 조코비치의 롤랑가로스 우승은 그야말로 화룡정점의 느낌이었습니다.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로드 레이버 이후 처음으로 4개 그랜드슬램 대회의 연속 우승을 달성하면서 역대 최고의 임팩트를 내뿜었죠. 15년부터 16년 중반까지의 모습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그가 역대 최고의 자리에 도전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전혀 그 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하락세에 접어들었습니다.
테니스에서 갑작스럽게 컨디션이 떨어지는 것도, 하락세에 접어드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경쟁상대인 머레이가 후반기에 완전히 펄펄 날았던 걸 감안하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죠. 롤랑가로스를 우승하며 커리어 그랜드슬램과 노박 슬램을 달성하면서 동기 부여가 안 된다며 하소연했는데, 인간적으로 이해가 갑니다.
진짜 문제는 올 시즌입니다. 올시즌 첫 대회인 도하 오픈을 우승하며 재정비를 하는 듯 했으나, 그의 텃밭이랄 수 있는 호주오픈, 인디안웰스에서 줄줄히 조기 탈락했고, 마이애미는 몸상태를 이유로 기권하면서 시즌 전반을 날려버렸습니다. 올 시즌의 부진이 더 커보이는 이유는, 작년 후반기의 정신적인 문제에 기인했다면, 올해의 부진은 피지컬과 기량적인 면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조코비치의 플레이는 단순히 들쭉날쭉한 게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기량 자체가 확연히 떨어졌습니다. 엔드라인 끝에 실수없이 기계처럼 꽂히던 스트로크는 약해지고 짧아져서 상대방을 제압하지 못하고, 범실은 늘어서 허무하게 포인트를 잃는 경우가 늘었습니다. 그의 풋워크 역시 활기가 떨어져 보이며, 전성기 때 몰라보게 좋아졌던 정크샷이나 넷플레이도 다시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조코비치는 코치진을 모두 갈아치우는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그리하여 롤랑가로스를 앞두고 선임된 새 코치는 바로 안드레 아가시입니다. 아가시는 그야말로 조코비치의 프로토 타입이라고 할 정도로 두 사람은 많이 닮았습니다. 분명히 역대 최고의 리터너를 꼽으라면 조코비치와 아가시가 1, 2위를 다툴 것입니다. 양손으로 백핸드를 치며 역대 최고급 백핸드를 가지고 있죠. 처음에는 컴팩트하고 플랫한 히터였으나 탑스핀 포핸드도 가미하였죠. 어쨌든 최고의 베이스라이너들입니다. 화려한 공격보다는 인내심을 가지고 랠리를 진행하며 서서히 압박하는 타입의 게임을 선호하죠. 여기서 아가시의 장점을 추가하자면, 아가시의 놀라운 체력입니다. 아가시는 이미지와 달리 체력왕이었으며, 노익장을 과시한 선수였습니다. 28세까지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3개를 땄지만, 29세 이후 무려 5개를 추가했죠. 조코비치 역시 글루텐 프리 다이어트 이후 체력적인 문제를 보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조코비치는 갑자기 기량이 급락했고, 노후 관리(?) 면에서 아가시에게 조언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연 디펜딩 챔프는 타이틀을 방어하면서 아직은 조코비치의 시대임을 재확인시켜줄 수 있을까요?
3. 랭킹 1위는 대체 뭐하고 있냐?
작년 후반기의 앤디 머레이는 가히 환상적이었습니다. 윔블던에서 2번째 우승을 차지하였고, 마스터스컵 우승으로 시즌1위를 확정지었습니다. 비로소 그 동안의 빅4라는 별칭에 어울리는 성적을 드디어 내준 겁니다.
하지만, 올시즌의 머레이는 조코비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처참합니다. 조코비치는 그래도 호주오픈에서 이스토민(117위)에게 뜬금없이 졌던 경우를 제외하면, 라파엘 나달이라든가, 차세대 왕좌의 재목들인 키르기오스와 동생 즈베레프, 탑텐 플레이어인 고팡에게 졌습니다. 이스토민에게 졌을 때도 토탈 포인트에서는 앞섰고, 그저 타이브레이크에서 진 게 켰던 경우죠. 그런데 머레이는 동생보다 못한 형 즈베레프(당시 50위), 포스피실(129위), 비놀라스(24위), 코리치(59위), 포그니니(29위)들에게도 졌습니다. 티엠이나 조코비치에게 진 건 그렇다고 쳐도 이들에게 계속 깨지는 건 엄청난 문제죠.
호주오픈 당시 형 즈베레프에게 머레이가 지는 바람에 페더러가 덕을 봤다는 말도 나왔는데, 요즘 폼 보면 당시 머레이가 페더러 만나서 안 쳐발린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합니다. 머레이는 항상 카운터펀쳐 마인드로 게임을 하면서도 체력과 멘탈이 못따라주는게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노쇠화가 일찍 오는 건지, 멘탈이 흔들리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조기 탈락을 자주 하니 경기 보기도 싫네요.
지금 머레이의 문제는 뭘까요? 하긴 늘 뭔가 문제를 달고 있던 선수라 예측하기도 귀찮을 지경이네요.
4. 눈여겨볼 다른 상위권 선수들은?
로마에서 약관의 나이로 마스터스 우승을 차지한 신성 즈베레프를 가장 주목해봐야겠지요. 나이가 깡패라는 이유로 항상 차세대 왕좌를 차지할
인물에 첫 손가락에 꼽히던 선수인데, 이제 성과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198의 장신임에도 꽤나 날렵하고 스트로크 랠리 싸움에서 상당한 파워를 자랑합니다. 아주 깊게 꽂히는 백핸드가 일품인데, 이번 로마 결승에서 백핸드로 조코비치를 압도하더군요. 물론 조코비치 백핸드 상태가 좀 거시기 합니다만. 포핸드는 그에 반해서 파워나 코스나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차세대 클레이 마스터로 손꼽히는 티엠 역시 주목해야만 하는 선수입니다. 올시즌 클레이코트에서 유일하게 나달을 이긴 선수입니다. 마드리드 결승에서는 나달에게 졌지만, 로마 8강에서 나달을 물리쳤습니다. 그러고 나서 4강에서 조코비치 상대로 자멸 오브 자멸하긴 했지만요. 작년 롤랑가로스 준결승, 올해 마드리드 준우승, 로마 4강 등 성과도 점차 나오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뛰어난 베이스라이너로 솔리드한 탑스핀 포핸드와 높이 튀는 공도 어렵지 않게 처리하는 쌈박한 원핸드 백핸드를 가진 티엠은 롤랑가로스에서 우승할 만한 충분한 기량은 가졌습니다.
마스터스 우승은 하나 밖에 없는 주제에 그랜드 슬램은 3개나 잡수신 바브린카는 이번 클레이코트 시즌에 상당히 부진했습니다. 16강이나 32강에서 광탈하는 중인데요. 전반기에 페더러에게 연속으로 잡힌 충격이 컸는지 정신을 못차리네요. 어쨌거나 작두탄 바브린카는 항상 요주의 대상이죠.
악마의 재능이라고 불리우는 키르기오스는.... 클레이에서는 별 기대가 안 되네요. 오히려 고팡이나 푸이 아니면 차라리 스페인 국기가 앞에 붙은 부스타, 비뇰라스 등등이라든가 남미 국기가 앞에 분은 쿠에바스라든가가 좀 더 활약해주지 않을까요? 이들이 우승할 거란 생각은 딱히 들지 않습니다만...
5. 대진운
메레이는 무난한 대진을 받았습니다. 본래 실력대로라면 8강에서 니시코리나 즈베레프를 만나는게 첫번째 위기가 될 겁니다. 하지만, 지금 본인이 위기 그 자체인지라 대진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본인 실력을 얼마나 회복하는지가 관건입니다.
즈베레프는 1라운드 경기 중 경기가 지연되었는데, 3라운드에서 만날 확률이 높은 쿠에바스가 약간 걸리고, 그 이후론 8강까진 무난할 겁니다. 같은 섹션에 있는 니시코리 폼이 요즘 너무 안 좋아서요. 만약 머레이가 여전히 정신 못차린 상태라면 최초의 그랜드슬램 4강도 가능해 보입니다. 만약 바브린카까지 바보형 모드라면? 가정은 여기까지만.
바브린카는 대진은 무난한 편이나, 역시 문제는 본인이죠. 작두를 타느냐, 바보형이 되느냐. 본인이 적정 컨디션만 유지해도 4강까진 무난할 겁니다.
나달은 대진운도 아주 괜찮습니다. 4강까지는 그냥 괜찮을 것 같네요. 물론 공은 둥글지만, 4강까지 그를 괴롭혀줄 사람이라곤 스페인 국기붙은 부스타나 아굿??? 뭘로 보나 나달의 4강은 무난해 보입니다.
조코비치는 어찌보면 가장 대진이 안 좋습니다. 3라운드까지는 괜찮으나 4라운드에서 홈코트의 푸이나 스페인의 비뇰라스를 만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 문제는 8강이죠. 8강 상대로 가장 유력한 선수가 티엠, 그 다음이 고팡으로 보이는데,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티엠은 가장 유력한 차기 클레이 마스터 후보이고, 고팡은 이미 올해 조코비치를 이긴 바가 있습니다. 상위 선수 중에선 가장 대진이 안 좋아 보입니다.
6. 정현은 어디까지 갈까?
이번 클레이 시즌의 정현은 마치 각성한 듯 날뛰었는데요, 바르셀로나와 뮌헨에서 괄목할만한 성적을 거뒀습니다. 대진운이 좋아서 그리 된 것도 아니고 상위 랭커들을 때려잡으며 이뤄냈죠. 그런데, 이후 챌린지 출전을 위해 한국에 왔다가 몸이 안 좋아서 쭉 쉬었씁니다. 그리곤 리옹에서 베르디흐를 만나 니가 이겨라를 시전하다가 졌죠. 일단 리옹에서의 경기를 보면 바르셀로나와 뮌헨에서의 폼은 아직 아니었습니다. 서브가 굉장히 솔리드했었고, 약점이었던 포핸드도 비교적 안정적이었는데, 그게 싹 날아가버렸죠. 그의 강점인 백핸드를 전혀 뒷받침해주지 못했어요. 오늘 저녁 경기인데 밸런스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 때의 폼을 찾는다면 16강에서 니시코리를 만난다든가, 8강에서 즈베레프랑 대결해보는 것도 상상만은 아닐텐데 말입니다. 일단 오늘 어려운 상대인 퀘리와 경기를 하는데, 서브와 포핸드의 밸런스를 잘 찾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