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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12/17 16:04:22
Name happyend
Subject [일반] 조계사 24일의 소도
1.

그 날.....
정말로 흰 피가 그의 목에서 솟구쳤을까요?

2.

어둠을 틈타 힘센 사내 한 무리가 숲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무리들은 질서정연하게 숲 앞에 망을 서고, 풀을 베어 길을 내고, 낫으로 커다란 나무를 찍어 내려갔습니다. 일사분란한 움직임에 맞춰 하나 둘 나무가 쓰러져갔습니다. 아주 오랜 동안, 어쩌면 수 천 수 만 년을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나뭇잎을 떨구었을 나무들이 베어진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곧 나무는 수북이 쌓였습니다. 달빛과 별빛만이 그들을 비추고 있을 뿐, 모두가 잠든 밤. 무리는 바람처럼 베어낸 나무를 어디론가 옮겼습니다.

이튿날.
잠에서 깬 경주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신성한 숲. 하늘과 소통하는 곳, 천경림. 그 숲의 나무가 사라졌습니다. 숲은 나무가 있기 때문에 숲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신성했습니다. 하지만 나무가 없는 숲은 숲이 아니고 신성함 또한 없는 법. 경주사람들은 눈앞에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넋이 나가버렸습니다.

그 누구보다 벌어진 사태에 혼이 빠진 것은 천경림의 사제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누군가요. 사로 6국을 이끌던 제사장들이었고, 칸 위의 칸인 마립간 시대 신의 나라 사로국의 신성한 숲을 지키는 신라의 심장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져서는 소리쳤습니다.
‘당장 신성한 숲의 나무를 벤 자를 벌하라!’

물론 그 소리는 경주 월성안 궁궐 안에도 닿았습니다. 신라의 임금 법흥왕은 곧 진상을 조사했고, 그 불경죄의 주모자가 이차돈이란 걸 알게 됩니다. 이차돈은 곧 온몸이 칭칭 묶여서 끌려왔습니다.
이차돈은 신성한 숲을 범한 죄로 목이 베였고, 하늘로 하얀 피가 솟구쳤습니다.

3.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불교의 포교 도중 순교한 이차돈은 이름이라 성은 이씨가 아닙니다. 일설에 의하면 박씨가문이라고도 하고 김씨가문이라고도 합니다. 둘 다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박씨가문설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박혁거세로부터 시작된 박씨가문의 영화가 끝을 맺은 것은 아달라 이사금 때입니다. 이때의 일은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로 남겨져 있습니다. 박혁거세, 즉 빛나는 거수인 혁거세가문은 무기의 힘이 아니라 ‘덕’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는 제사장가문입니다. 이들이 가진 신성한 힘은 연오랑과 세오녀가 신라를 떠나면서 사라집니다. 이것을 설화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고 표현합니다.

하늘의 일을 예측하지 못하는 제사장 가문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결국 이날 이후로 더 이상 박씨가문은 이사금에 선출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몰아내고 이사금에 오른 것은 석탈해가 신라에 온 이후 호시탐탐 노려오던 야망을 성사시킨 손자 벌휴입니다. 벌휴가 왕위에 오른 일을 역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람과 구름을 점쳐 홍수나 가뭄 및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알았고, 또 사람의 정직한 것과 마음이 바르지 않은 것을 알아맞히니 사람들이 성인이라 하였다.”

이 이사금시대를 끝낸 이는 내물왕입니다. 그는 충격적인 선택을 합니다. 당시 선진문물을 수입할 유일한 길이 고구려였으므로 고구려의 내정간섭을 받아들인 대가로 칸중의 칸인 마립간에 오르게 되며, 이후 주변 소국들을 지배하게 됩니다.
(당시 만들어진 황남대총 전시회에 가보면, 고구려의 무덤인지 신라의 무덤인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

그러나 마립간은 고구려와 왜에 시달리며 시름시름 앓았습니다. 왕자가 볼모로 고구려에 끌려갔고, 심지어 살해될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토록 치욕스런 시대에 김씨가문을 지켜낸 것이 박씨가문입니다. 그것이 박제상설화로 나타납니다.

당시 삼국의 정세는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광개토왕과 뒤이은 장수왕의 팽창정책과 남하정책으로 백제는 개로왕이 아차산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등 수세에 몰렸습니다. 바로 이때 이 정세를 한방에 역전시킨 것이 백제의 비유왕입니다.

겉모습도 수려한데다 말솜씨도 일품이어서 사람을 설득하는 재주가 남달랐던 비유왕은 천재적인 외교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의 상황은 중국 남쪽의 송나라, 북쪽의 북위, 그리고 고구려가 팽팽한 힘의 균형을 맞추고 있었는데요, 비유왕은 송나라와 손을 잡아버렸습니다. 고구려로서도 함부로 할 수 없게 만든 얼음장같은 판단력이었지요. 거기에다 고구려 군사가 코앞에 주둔하고 있고 왕실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고 있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성사시킵니다. 이렇게해서 송나라, 왜나라, 신라, 백제가 한편이 되어 북위와 고구려가 한편인 북방의 강자와 맞서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비유왕이 죽기까지 30년간 한반도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노벨평화상감이 아닌가요?

이로서 신라는 고구려의 내정간섭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벗어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고, 마침내 박씨가문과 김씨가문의 연립정권이 탄생합니다. 그것이 고대 왕국 신라입니다.

4.

그런데, 왜 신라만이 불교를 도입하면서 순교자가 나온 것일까요? 그 해답이 천경림 속에 있었습니다.

숲은 하늘과 소통하는 곳이므로 천경림이라 불렀습니다. 하늘과의 경계. 따라서 이곳은 속세의 인간들이 감히 들어갈 수 없는 치외법권적인 소도입니다. 이곳에 범죄자가 숨어도 잡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죄인은 신의 품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 죄인을 벌할 수 있는 권리는 속세가 아니라 신이었던 것이지요.

백제와 고구려와 달리 신라는 이사금, 마립간 시대 내내 신성한 숲의 힘은 위력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신라의 출발점인 사로6국은 6개의 부족 모두 이주민들로 이들은 저마다 하늘의 자손이라는 신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신성한 숲을 숭배하고 있었고, 천경림은 그런 그들에게 신과의 소통장소였습니다.

그 결과 신라에는 불교가 들어왔지만, 천경림의 위세 앞에 기를 펴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묵호자가 들어와 소국의 공주를 치유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지만 포교에는 거의 실패한 채 비밀스런 종교집단으로 존재해야 했습니다. 그가 머물던 집이 ‘모례’네 집인데, 이 毛가 털의 한자어이므로 ‘털례’네 집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모례네 집은 미추왕 때 아도화상이 머물며 비밀포교를 했던 법당이기도 하므로 절이란 뜻이었던 것이죠. ‘털례-->절’로 바뀌고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털례-->테라’ 즉 절의 일본어가 되기도 했습니다.

소국들의 힘을 제압하고, 경주 내 다른 귀족들의 힘도 제압하려면 그들의 숭배하는 신보다 더 우월한 신의 존재 즉 보편적 종교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세계사가 공통적으로 통과했던 단계이기도 합니다. 신라 역시 자신들 왕실이 다른 왕실보다 신성하고 우월한 절대적 힘을 가진 것을 보여주려면 보편종교인 불교의 힘을 빌어야 했습니다. 바로 법흥왕이 이런 요구 앞에 놓여있었던 것이지요. 이차돈은 김씨가문의 조력자인 박씨가문 사람답게 스스로 천경림의 나무를 베어서 그곳에다 그 나무로 버젓이 ‘흥륜사’라는 절을 세우는 불경을 범하고 순교합니다.

그날, 하얀 피가 솟구쳤는지는 저로선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종교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순교의 결과 천경림은 사라지고 그곳의 사제들은 흥륜사로 옮겼으며 신라는 공식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입니다. 이후 중고기는 부처의 힘으로 왕권의 정당성을 정당화해냅니다. 불교식 왕명, 부처가 될 수 있는 혈통적 존엄성을 가진 성골, 장육존상과 황룡사9층석탑, 첨성대 등이 이 시대에 만들어지며 왕실을 보호하는 신화적 장치들로 사용됩니다.

법흥왕은 불교를 받아들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죄를 용서받고 복을 빌 곳이 필요했다.’

(고려시대에 삼국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신라를 상고-중고-하고로 나눴습니다. 왕의 이름이 신라고유의 이름이었던 때를 상고기, 불교식 왕명으로 이어지던 때를 중고기, 그리고 중국식 시호시대가 하고기입니다.)

5.

신라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화려하게 궁중에 들어온 불교는 자신들이 몰아낸 천경림의 사제들보다 더 까칠하고 독단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여전히 전통신앙이 존재하는 일반 대중들사이에선 마찰이 빚어졌습니다. 그것이 ‘원광과 검은여우 설화’입니다.
(이에 대한 글은 이전에 쓴 적이 있더군요.
https://cdn.pgr21.com/pb/pb.php?id=recommend&no=1716&divpage=1&ss=on&sc=on&keyword=아버지와 아들)

천경림의 사제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한 신라 불교는 스스로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어가며 왕실의 정당성을 재생산하고 귀족의 복을 빌어주는데 급급합니다. 아마 그렇게 계속 머물렀다면 백제와 고구려에서 그러했듯이 일반 대중들에게서 외면 받았을 것입니다.

검은여우 설화에서 보듯이 신라 불교의 아집과 독단을 극복하고 사회통합을 이룰 길로 원광은 통합에서 찾습니다. 유교,불교,도교는 물론 전통신앙마저 아우르는 사상적 통합과 포용력의 결과 오로지 신라만이 수도이외의 곳에서도 절이 만들어졌고, 그 절에는 다양한 불상과 함께 산신각이 모셔지게 됩니다.

그리고 삼국 중 유일하게 학교가 없었던 신라의 젊은이들의 수양과 교육을 위해 세속오계를 만듭니다. 복잡한 경전이나 엄격한 계율보다 간단한 ‘세속오계’를 통해 몸과 마음을 단련하도록 함으로써 일부 승려들이 어려운 경전을 통해 독점하던 신성한 하늘의 비밀을 세속으로 도입합니다.

원광은 복잡한 불교계율이 아니라 단순하면서도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실천법을 통해 사람들을 계몽시키는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이 파괴한 천경림의 소도 속에 스스로를 가둬놓았던 신라불교는 세상으로 내려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치료하게 되었고 서울과 지방간에도 강한 통합력을 보여주며 삼국통일전쟁과정에서도 일사분란한 대응을 해냅니다.

6.

원광과 더불어 신라불교가 통일전쟁과정에서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게 해준 데는 약사여래신앙집단(밀교) 힘 또한 컸습니다. 약사신앙집단은 의술치료집단이었습니다. 중고기 신라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모두 고달플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통신앙이 불교에 의해 해체되어 가면서 마을의 무당이 마을사람을 치료하던 전통도 위협받자 이들은 의료사각지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약사신앙집단이 그들을 치료하는 대중의료를 시작합니다.

약사신앙집단은 그들의 의술을 약사여래가 고쳐주는 치료술이라고 하였습니다. 약사여래는 질병을 치료하는 부처로 그 모습을 보거나 그 이름을 부르거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기만하여도 치유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약사여래를 만지거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면서 병이 낫기를 빌었다고 합니다.

약사여래의 모습은 차츰 의술의 부처, 의사들의 모습을 형상화하는데요 약을 담은 사발이나 병을 들고 있곤 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사발에 수북하게 들어있는 약은 바로 쌀이었습니다. 이 사발이 등장하는 것은 8세기 후반으로 자연재앙이 가장 극심했던 때였습니다. 무려 14년간 10차례의 기근과 한발, 심지어 메뚜기떼까지 몰려들었죠. 이정도면 지옥이 따로 없었을 것이고. 아마도 사람들은 모두 환자나 다름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최고의 약은 쌀이 아니었을까요?
(일본에도 약사여래신앙이 전파되어 야마구치현 주방국분사 약사여래상의 약단지의 성분을 분석해본 결과 전체의 40%정도가 곡물이었다고 합니다. 조사자는 그 해 가을 에도에 곡물이 부족하였다는 것을 근거로 오곡을 넣어 풍작을 빌기 위한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이렇게 신라불교는 고구려나 백제불교와 달리 백성들의 다양성을 흡수하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췄고, 또한 고통받는 백성들 속에서 그들의 몸과 마음을 치료함으로써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숱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살아남는 한국적 불교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7.

지난 11월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이슈의 한가운데에는 조계사가 있었습니다.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이 그곳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현대판 소도라 불리며 공권력으로부터 사회의 소외된 다양한 목소리를 지켜주겠노라는 승려의 호언장담도 나왔고, 신성한 경내를 어지럽힌다며 강제로 끌어내리겠다고 나선 신도회 간부와의 몸싸움도 있었습니다.

어찌되었든 24일간 한상균 위원장을 지켜 준 조계사는 체면치레를 했고, 한 위원장은 스스로 걸어나와 옥에 갇힘으로써 상황은 일단락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때 민주화의 성지였던 명동성당이 그렇듯이 조계사의 문도 앞으로는 굳게 닫힐 것입니다.

천경림의 소도를 없애고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고 복을 빌어주기 위한 법당을 만들기 위해 이차돈의 순결한 피를 바쳤던 불교는 정말로 그 피의 순결을 앞으로도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정신적 통합을 위해 과감하게 절의 문을 열어 전통신앙을 절간 내로 받아들인 원광의 정신과 대중과 함께 하며 그들의 아픔을 치유했던 약사여래신앙집단의 고결한 사상은 여전히 오늘날의 불교 안에도 있는 것일까요?

자승과 도법은 정말로 우리사회 소외된 자들,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한상균 위원장을 24일간 절간에 머무르게 해주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천경림의 소도처럼 자신들의 신성한 공간을 지키려고 했던 것일까요?

이슈는 식었고, 모든 이들의 기억의 저편으로 스러져가는 ‘조계사 24일의 소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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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리워냐
15/12/17 16:4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happyend
15/12/22 18:42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안군-
15/12/17 16:57
수정 아이콘
글쓴이를 안 보고 글을 읽다가 누가 쓴 글인지 알아챘다면, 피지알 생활을 오래 한 회원일겁니다.
happyend님의 글은 언제나 따뜻한 시선이 느껴져서 좋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happyend
15/12/22 18:42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많은 시간이 흐르다보니...여기도 변화가 많고, 글쓰기도 글읽기도 벅차네요.
15/12/17 18:5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happyend
15/12/22 18:42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15/12/18 02:30
수정 아이콘
이런, happyend 님 글을 지금에야 보다니!!!
happyend
15/12/22 18:43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잘지내시겠죠?
The Greatest Hits
15/12/18 08:49
수정 아이콘
제목보고 그냥 클릭했다가 옛날이야기라서 한번 놀라고
담담하고 묵직한 이야기에 두번 놀라고
글쓴이 아이디보고 세번 놀랐습니다

선생님 글로 역사를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
happyend
15/12/22 18:43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정말...많은 시간이 흘렀네요. 잘지내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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