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월여만에 써보는 리뷰 7탄입니다.
원래는 <응8> 신드롬에 묻어가고자, 80년대 영화에 접근해보고자 했으나
그 시기엔 제가 아직 알맹이였기 때문에, 부득불 10년 더 붙였습니다.
평은 늘 그렇듯 주관적, 신뢰도는 0에 수렴합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1992)
감독 : 박종원
출연 : 홍경인 고정일 최민식
동명의 이문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자,
'제대로 된 영화화'의 견본으로 삼을 만한 고전입니다.
규칙 위에 군림하는 절대권력의 아이콘, '엄석대'를 중심으로 한 갖가지 인간군상과
천태만상을 같은 반 아이들의 모습을 빌려 담담히, 그리고 적나라하게 그려내죠.
홍경인(엄석대 역)을 비롯한 꼬맹이들의 -그야말로- 열연 덕에, 2015년인 지금
다시 봐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오히려 더 와닿는 구석이 다분한 명작입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95)
감독 : 박광수
출연 : 홍경인 문성근 김선재
근로기준법 준수를 뇌까리며 산화한 전태일의 삶을 재조명한 작품으로,
여기에도 홍경인이 나옵니다. 엄석대에 이어, 홍경인 커리어의 리즈시절이랄까.
당시 가장 지적인 배우로 꼽히던 문성근이 운동권 지식인 '김영수' 역을 분하는데,
이는 <전태일 평전>의 저자 조영래를 모티브로 합니다. <변호인>의 송우석처럼 말이죠.
김영수가 도망다니던 군사정권 시절의 삼엄함, 그로부터 불과 몇 년 전에 분신했던
전태일의 일대기가 다큐에 가깝게 그려지는데, 보고 있자면 그냥 먹먹합니다. 무겁고요.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상전벽해란 말을 쓰기에 주저된다는 점이, 우울함을 더하죠.
투캅스 (1993)
감독 : 강우석
출연 : 안성기 박중훈 지수원 김보성
극장까지 갈 것도 없이, 집에 TV가 있다면 한 번씩은 봤을 법한 영화입니다.
그만큼 대흥행했고, TV에서도 자주 방영됐고, 그때마다 재밌게들 봤었죠.
한석규가 붐업하기 전, 90년대 중후반까지 충무로 최고의 스타는 누가 뭐래도
박중훈이었습니다. 그리고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 <할렐루야> 등으로 이어진
박중훈식 코미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요, 흥행공식이었죠.
지금은 올드함의 상징처럼 돼버린 강우석 감독의 작법도, 당시로선 신선하고
속시원하게 느껴졌었습니다. 딱 <공공의 적>까지가 마지노선이었지 싶어요.
올가미 (1997)
감독 : 김성홍
출연 : 윤소정 최지우 박용우
귀신도 연쇄살인마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 어느 공포영화보다도 살떨리는 영화죠.
풋풋한 최지우도, 잘생긴 박용우도 그저 들러리일 뿐,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윤소정 선생의 미친 연기력이 모든 걸 장악합니다. '삐뚤어진 모성애'라는
키워드 하나만으로 이정도 이야기를 펼쳐낸 김성홍 감독도 대단하고요.
장르에 필수적인 긴장감, 연기, 기승전결까지 요새 작품들과 비견해도
전혀 뒤쳐질 것 없는, 한국영화 대표 스릴러 명작이라 생각합니다.
며느리 머리끄댕이 잡고 물고문 하는 장면은 아직도.. 허허
비트 (1997)
감독 : 김성수
출연 : 정우성 고소영 임창정 유오성
간지영화의 끝이자, 가장 꽃같던 시절의 정우성이 영상으로 박제된 영화입니다.
천하의 장동건도 90년대 화면에선 살짝 촌스러웠고, 원빈 또한 <광끼> 무렵엔
느끼한 구석이 있었지만, 정우성은 자비가 없습니다. 바야흐로 비주얼의 끝.
원작은 허영만의 만화 <비트>였고, 이를 '남자영화'의 대가로 정평난 김성수 감독이
정말 '뽀다구 나게' 찍어냈습니다. 특히 정우성이 혼다 CBR-600F 위에서 두 팔 벌리며
질주하던 씬은 전국의 여성팬들은 물론, 일만이천 폭주소년들의 로망이었죠.
아직도 회자되는 임창정의 어록(17대 1)들도 깨알지며, 여러모로 낭만의 영역에
들어선지 오래인, 청춘영화의 클래식입니다. 김성수 감독, 그리고 정우성의 인생작.
태양은 없다 (1999)
감독 : 김성수
출연 : 정우성 이정재 한고은 이범수
이정재가 출연한 영화들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거의 다 봤는데, <태양은 없다>에서의
연기가 단연 최고였다 생각합니다. 이정재의 인생작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요.
(이걸로 청룡영화제 주연상까지 탔으니, 마냥 편향된 평은 아닌 듯)
가진 건 없고, 꿈은 멀고, 일은 자꾸 꼬이는 두 젊은이의 팍팍한 삶이 주 뼈대이며,
거기에 찌질함과 얍삽함까지 더한 홍기(이정재) 캐릭터가 너무나 생생히 살아 날뜁니다.
제가 살아온 꼬락서니도 비슷했던 탓인지, 특히나 감정이입이 더 되더군요.
정우성은 <비트> 때만큼 멋있게 나오진 않았으나 예의 그 기럭지와 꽃남방으로 어필하고,
사채업자로 분한 이범수의 단발머리는 또다른 악역상의 한 샘플을 제시합니다.
한고은의 발연기는 뭐.. 이쁘니까 용서하는 걸로.
넘버 3 (1997)
감독 : 송능한
출연 : 한석규 최민식 이미연 송강호
혜성처럼 나타난 송능한 감독의, 무려 데뷔작입니다. 이 영화 한 편으로 대중+평단을
모두 사로잡으며, 장선우에 이은 또 한 명의 서울대 출신 천재감독으로 급부상하죠.
(당시의 장선우는 그런 대접 받았었습니다. 성냥팔이 소녀 전..)
제목부터가 넘버 쓰리, 즉 3류 인생만을 담아낸 이 영화는 다소 낯설면서도
돌직구스런 연출로, 소시민들이 통쾌해 할 메시지들을 시종일관 날려댑니다.
거기에다 곳곳에 코믹적인 요소까지 잘 섞어내죠. 한석규의 백조 이야기라던가,
지금은 전설이 된 송강호의 헝그리/무대포 정신 강의, 랭보의 문학개론과
방은희와의 보충수업 등등.. 시종일관 감을 잃지 않는 대단한 내공을 발휘합니다.
배고픈 연극배우였던 송강호는 <넘버 3>에서의 활약으로 인생역전을 맛보게 되고,
박상면 역시 '재떨이' 캐릭터로 각광받으며 제2의 연기인생를 맞이합니다.
'중구 형님' 박성웅은 이 영화에서의 단역으로 배우 커리어를 시작했다 하죠.
하지만 그 성과에 너무 취한 탓인지, 2년 후 내놓은 신작 <세기말>은 대중+평단 모두에게
외면받으며 처참히 묻혀버립니다. 올곧은 비판의식은 여전했으나, 힘이 너무 들어갔죠.
철학이 과해 현학이 되면 후까시 취급밖에 못받음을 보여준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맛본 송감독은, 두 편의 영화만을 남긴 채 영화판을 떠났고요.
쉬리 (1999)
감독 : 강제규
출연 : 한석규 최민식 김윤진 송강호
근래 <응답하라 1988>에 푹 빠져계신 71년생 삼촌 따라 극장 가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보면 레알 으리으리한 출연진이 아닐 수 없네요. 특히 한석규의 주가가 정점이던..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했고, 당시로선 굉장한 규모였던 30억원이 제작에 쓰였습니다.
내용 자체야 그전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익히 봤음직한 이야기의 한국 버전이었습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면 잘 찍었네"가 관객들의 중론이었고, 저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흥행 스코어 또한 <친구> 개봉 전까진 국내 원탑이었으며, OST까지 대 히트하여
원곡 가수가 직접 방한했던 기억도 나네요. 그때만 해도 다소 경직돼있던
송강호의 진지한 연기를 지금 다시 보면 피식하게 되고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1999)
감독 : 이명세
출연 : 안성기 박중훈 장동건 최지우
영화라기보단, 그림 한 편을 빚어내는 듯한 이명세 감독의 작가주의적 고집이
본격적으로 투영되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흥행쪽으로도 대박을 쳤지만요.
그 유명한 40계단 살인씬과 진흙탕 싸움만으로도, 본작의 존재가치는 충분합니다.
그냥 너무 멋있지요. 그 외의 스토리며 대사들은 사족으로 느껴질 만큼.
이후 <형사>와 M으로 이어지는 노선에서 호불호가 심하게 갈려버렸지만,
지지층에게만큼은 절대적인 호평을 얻는 데엔 이유가 있습니다.
충무로에 이런 감독님도 계셔야죠. 신작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런지.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1999)
감독 : 유상욱
출연 : 김태우 신은경 이민우
시나리오는 기가 막힙니다. 이상(李箱)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모티브로
일제 강점기, 이토 히로부미, 심지어 박정희까지 엮어가며 썰을 푸는데,
그 짜임새가 촘촘하여 상당한 설득력을 뿜어내죠. (공모전 대상작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걸 영화로 내놓기엔, 90년대 충무로의 기술력이 다소 모자랐지요.
영화 중반까진 상술한 음모론이 사뭇 탄탄한 전개와 연기력(신은경 제외)으로
흥미롭게 펼쳐지다가, 후반부 난데없는 용가리급 CG와 인디아나 존스 짝퉁스런 연출이
끼얹어지며 와르르 무너져 내립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아까운 영화에요.
그 많은 여배우들 중 왜 신은경을 썼는지는 아직도 미스테리고요.
동명의 소설도 있습니다만, 문장력이 좀 조악하여 권하진 않겠습니다
체인지 (1997)
감독 : 이진석
출연 : 정준 김소연 이경영 이승연
이거 동네 초중고딩들은 거의 다 봤습니다. (저희 동네만 그랬는지도)
몇몇 웃긴 대사며 장면들도 학교에서 많이들 따라했었어요.
박중훈, 김혜수, 김민종 등 까메오들도 화려했던 기억이 납니다.
주인공들도 틴에이저 스타들이었고, (다만 김소연은 지금 모습과 별 차이가 없..)
여러모로 학생들을 타겟으로 신경을 많이 썼죠. 결과도 좋았고요.
뒤늦게 일본 드라마 베낀 것 들통나면서 작살날 뻔 했다가,
부랴부랴 판권계약으로 무마했던 해프닝도 있었죠.
엑스트라 (1998)
감독 : 신승수
출연 : 임창정 나한일
<할렐루야> 신승수 감독의 블랙 코미디물로, 그렇게 알려진 영화는 아닙니다.
임창정이 <비트>로 무명생활을 벗어난 직후 처음 선택한 작품이기도 하죠.
고만고만한 단역 연기자로 입에 풀칠이나 하던 임창정-나한일 콤비가,
우연히 손에 얻은 검사 신분증으로 온갖 사칭을 하고 다니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이 주 내용입니다. 배우들 연기도 훌륭하고, 갖은 부조리가 판치던
당시의 시대상도 잘 반영되어, 꽤나 청량한 카타르시스를 안겨다 주죠.
<비트>때완 또다른 양아 연기의 지평을 연 임창정의 극중 대사를 옮겨봅니다.
"(냉장고에 붙여둔 안성기 사진을 보며)
안성기.. 국민배우지.. 넌 다 좋은데, 이름이 성기가 뭐냐 성기가?"
주유소 습격사건 (1999)
감독 : 김상진
출연 : 이성재 유오성 유지태 강성진
진정 밑도끝도 없는 스토리로 밑도끝도 없이 흥행한 작품이죠.
몇 년 지나 많이들 하던 말이, "저 영화가 어떻게 그렇게 떴지"였으니.
그래도 당시로선 제법 시원시원한 맛도 있었고, "나는 한 놈만 패" 같은
대사들도 입에 착착 붙었었지요. 또 김상진 감독 영화 아니랄까봐 마지막엔 꼭
주조연 다같이 정모를 가집니다. 이 양반만의 클리셰랄까요.
이 영화로 가장 큰 수혜를 본 배우는 단연 유지태입니다. 하얗게 탈색한 머리에다
반쯤 정신나간 듯한 무표정이 포인트였죠. 이듬해 <동감>까지 연타석으로 터지면서
최근의 박서준 이상의 아이콘으로 떠올랐고요. (골뱅이 CF가 생각나네요)
여자들이 그렇게 유지태한테 빠져있을 무렵, 저는 이요원 누님한테 반했..
해피 엔드 (1999)
감독 : 정지우
출연 : 최민식 전도연 주진모
이건 개봉 후 몇 년 지나서야 뒤늦게 봤습니다.
인정하죠. 전도연 베드신 보려고 봤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스토리 자체에 몰입하게 되었고, 중후반쯤 가니
최민식과 제가 동시에 빡이 쳐있더군요. 그 잔학한 짓거리도 다 이해가 갔습니다.
각본의 힘이 이런 것일까요.. 흡입력이 대단했던 작품이었습니다.
* 제가 기억하는 90년대 한국영화는 이정도입니다.
<서편제>나 <장군의 아들>은 보긴 봤는데 내용이 가물가물 하고,
<박하사탕>, <공동경비구역 JSA>,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같은 영화들은
2000년 개봉작이라 넣을까 말까 하다 결국 뺀 것이 아쉽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멜로물은 거의 안보기에 <접속>, <미술관 옆 동물원> 등은 안봤고요.
자, 여기에 아재들의 추억을 보태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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