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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엄마씨는 세상 그 어떤 엄마보다도 걱정이 많은 분이다. 오랜만에 집으로 내려온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았을 때도 "무슨 일 있니? 회사에서 잘린 거니? 혹시 여자친구랑 헤어진 거야?"라고 말할 정도였다. 나엄마씨의 아들 왕태평군은 너스레를 떨며 "아니, 그냥 집에 안 간 지 오래돼서 엄마 보고 싶어서 가는 거야."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아들의 목소리가 혹시 말 못 할 고민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특히 평소에는 내려오는 당일 아침이 되어서야 연락을 하던 아들이 구태여 일찌감치 내려오겠다고 연락을 하는 것까지, 도리어 걱정이 앞서는 나엄마씨였다. 이런 나엄마씨의 성격을 알기에 왕태평군은 집에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다.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서울까지 올라오는 엄마의 지극정성이 부담스러운 왕태평군은 연락 좀 자주 하라는 나엄마씨의 잔소리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변명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지난번에 집에 내려왔을 때 맛난 음식을 준비하지 못했다며 자책하는 어머니의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떠올라 이번에는 일찍이 내려간다고 연락을 전한 것이다. 엄마가 음식 준비한다며 고생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더 안쓰러운 왕태평군이었다.
왕태평군이 서울에서 고향 집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KTX를 타면 3시간이 조금 못 된다. 하지만 비싼 푯값이 부담스러운 왕태평군은 조금 일찍 일어나 고속버스를 타기로 했다. 새벽의 파리한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시간에 일어났음에도 왕태평군은 출발시각이 다 되어서야 터미널에 헐레벌떡 도착할 수 있었다. 새벽 공기처럼 한산한 평일 아침의 고속버스에 올라탄 왕태평군은 자리에 앉자마자 의자를 뒤로 한껏 젖혔다. 편의점에서 산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고, 핸드폰은 무음으로 맞춰 놓고, 안대를 착용한 뒤 그대로 벌렁 자빠졌다. 5시간은 걸릴 지루한 여행길 최고의 전략은 역시 숙면이라고 생각하는 왕태평군이었다.
왕태평군이 버스를 탔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는 나엄마씨는 아들이 기차를 탔을 것 같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연락이 없자 이런저런 걱정에 사로잡혔다. 핸드폰에 전화를 걸어도 받지를 않자 아들놈이 늦잠 자느라 기차를 놓쳐버린 게 아닐까, 푯값이 꽤 나갈 텐데, 놓치면 안 되는데 하며 또다시 전전긍긍하기 시작한 나엄마씨였다. 이렇게 푯값을 아까워하는 것으로 시작한 나엄마씨의 걱정은 점심때가 다 되어오는데도 연락이 닿질 않자 아들의 신변을 걱정하는 것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혹여나 내려오다 사고가 난 건 아닐지 뉴스 채널을 틀어놓고는 사고 소식만 목을 빼고 살펴보던 나엄마씨의 입술은 각종 끔찍한 사고소식을 볼 때마다 더욱 파랗게 질려갔다. 혹시 보일러 이상으로 일산화탄소 중독에 빠진 건 아닌지, 혼자 사는 집에 강도가 들어와 아무도 모른 채 칼 맞고 죽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심각한 일이 있어 침울한 마음에 자살을 한 건 아닌지... 나엄마씨의 끔찍한 상상은 갈수록 나래를 펼쳐가며 그녀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들을 위해서라면 언제나 용감한 나엄마씨는 이대로 주저앉아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을 거부하기로 했다. 급기야 아들을 구하기 위해 서울까지 올라갈 생각을 하는 나엄마씨였다.
나엄마씨의 외출 준비는 언제나 부산하며, 그것은 오늘처럼 마음이 급할수록 더욱 심하다. 어제 감은 머리에서 아직 좋은 냄새가 나기에 나엄마씨는 머리를 감지 않고 세수만 마치고 나왔다. 눈가와 이마는 자글자글한 주름이 많지만 나 정도면 쭈그렁 할머니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엄마씨는 화장대에 앉아 목살이 얼마나 쳐졌나 두리번댄 후 화장품을 바르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머리는 대충 올려묶은 채 아들 걱정에 깊이 파여가는 주름은 파운데이션으로 가리고, 파랗게 질려가는 입술은 립스틱으로 덮었다. 서울까지 갈 생각에 가장 아끼는 외출복을 입고, 작년에 왕태평군이 선물한 코트를 걸쳐 입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 차려입었어도 관절염 걸린 무릎 때문에 구부정한 나엄마씨의 자태는 고귀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전형적인 아줌마 그 자체였다. 굽 낮은 구두를 꺼내 신은 나엄마씨는 조급함이 느껴지는 종종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나엄마씨는 가스 밸브를 확인하지 않고 외출한 것을 깨달았다. 아침에 국을 끓였던 기억은 떠올랐지만, 가스 밸브를 잠갔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 나엄마씨였다. 설마 불이야 나겠냐 싶기도 하지만, 정말 불이라도 나면 큰일이 아닐 수 없기에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나엄마씨는 결국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나엄마씨가 헐레벌떡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주방을 살펴보니 아뿔싸 정말로 가스 밸브가 열려있었다. 다행히 가스 불을 켜놓지는 않았지만, 가스가 새어 나왔다면 폭발이 났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하는 나엄마씨는 가스 밸브를 잠그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도도 잠시, 다시 아들 걱정에 마음이 급해진 나엄마씨는 아까 꺼내 신은 구두를 신고 종종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 정류장까지 도착하였으나 이번에는 가스 밸브를 잠그고 나오면서 문을 잠갔는지 확인하지 않은 일이 떠오르는 나엄마씨였다. 버스가 도착하여도 타지 못하는 나엄마씨는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자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빠른 걸음걸이로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에 도착한 나엄마씨가 손잡이를 잡고 힘껏 돌려보았으나 굳게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단속을 확인한 나엄마씨는 다시 버스 정류장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나섰다. 집에서 정류장까지 500m의 거리를 몇 번이고 왕복하는 동안 나엄마씨의 호흡은 거칠어졌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삐걱거리는 무릎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눈 밑은 시커메졌으며, 가쁜 숨에 벌어진 입술이 바짝 말라버려 잠깐 사이에 10년은 더 늙어버린 나엄마씨였다.
터미널에 도착한 왕태평군은 바로 집으로 오지 않고 시내에 들르기로 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과일 케이크를 파는 유명한 빵집에 들러 케이크와 자기가 좋아하는 슈를 한 봉지 산 왕태평군은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 고향 경치를 둘러보며 옛 상념에 빠진 채 슈를 하나씩 집어먹었다. 그렇게 집 앞 정류장까지 도착한 왕태평군의 눈에 길 건너 정류장에서 그가 사준 옷을 입고 버스를 기다리는 나엄마씨의 모습이 들어왔다.
"엄마!"
불안한 마음에 땅바닥만 쳐다보던 나엄마씨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길 건너 정류장에 있는 아들을 발견하자 잿빛이던 나엄마씨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거기 있어. 엄마가 갈게."
횡단보도를 건너는 걸음걸이는 평소와 같은 종종걸음이었지만, 이번에는 조급한 걸음이 아니라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화색이 도는 얼굴과 가벼운 발걸음이 무색하게 나엄마씨의 입에서는 구박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너는 왜 전화를 안 받니? 엄마가 얼마나 전화를 했는데!"
"어헣↗ 무음으로 해놓은 걸 깜빡했다. 미안해 엄마. 이럴 수도 있지 뭐."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하는 왕태평군이 괘씸하다 해야 옳겠지만, 시달리던 걱정이 사라져 기분이 좋아진 나엄마씨는 별다른 질책을 하지 않았다.
"엄마, 근데 어딜 가는데 이렇게 차려입었어? 나 온다고 나온 거야? 외식하려고? 우리 어디 갈까?"
그러나 지칠 대로 지친 나엄마씨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며 왕태평군의 팔을 감싸 안았다.
"에구... 우리 아들 팔이 왜 이리 말랐어. 일하는 게 많이 힘든가 봐."
왕태평군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며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근데 문단속은 잘하고 내려온 거지?"
"에이~ 자췻집에 뭐 훔쳐갈 게 있다고..."
끝내 나엄마씨의 등짝 스매시를 얻어맞고야 마는 왕태평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