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년 음력 4월 16일 오의 황제 손권이 사망합니다. 향년 71세.
(....저사람에게는 황제의 죽음을 뜻하는 붕崩을 쓸 생각 없습니다. 훙薨? 안씁니다. 폐를 안쓰는것도 많이 봐주고 있는거에요...)
시호는 대황제犬皇帝(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신다면 맞는 겁니다.)고 묘호는 태조.
손책이 죽고 손권이 뒤를 이었지만 손권의 입지는 매우 약했습니다. 강표전에 손책은 항상 손권에게 여기 있는 장수들이 네 장수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손권은 15살 양성현장으로 있을 당시 양성현의 관고에서 공금을 횡령해서 부하 주곡이 장부를 조작해 손권을 비호해줬습니다. 하지만 초반에 주곡은 손권의 총애를 받지만 나중에 손권이 오를 통치하면서 주곡을 임용하지 않죠.
그렇다고 해서 전공이 있는것도 아니어서 손책이 원정을 나간 사이 천명도 안되는 군사로 진영을 지키다가 적군에게 기습을 받았고 주태가 심각한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손권을 구해내죠.
주태 입장에서는 손책 동생만 아니었으면 한대 쥐어패고 싶었겠죠. 하지만 이 일로 주태는 춘곡현장이 되었고 이후 손권대에는 유수구의 방어를 전담하는 유수구의 사령관인 유수독이 되는 등 손권이 통치하는 기간 미천한 출신임에도 고위 관직을 섭렵합니다.
손책이 죽고 난 뒤에 그 뒤를 이어받았지만 손권의 위치는 불안했습니다. 손책의 아들은 어렸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대호족들이 손책의 정책에 반발을 가졌어도 오의 군권을 비롯한 많은 실권들은 손책의 심복인 주유와 장소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지지가 없을경우 손권은 대권을 이어받기 전에 자신의 목숨을 걱정해야 했을 정도죠. 손권이 그 전에 많은 전공을 세워서 자신의 입지가 강했느냐,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여강 공략전에서 원술의 잔여세력인 유훈을 격파하고 황조군을 격파했지만 이는 대부분 손책과 주유가 모든 판을 짜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손권이 주유와 장소의 지지와 지원을 받았지만 손권의 위세는 매우 약했습니다. 마둔과 보둔의 둔전병들이 손권의 명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손책이 임명한 여강태수 이술이 반손권 세력을 받아들여 세력을 불렸죠. 하지만 가장 큰 타격은 손권의 사촌형이자 손책이 강동평정시 많은 공을 세웠던 손보의 배반이었습니다. 손보는 손권이 대권을 장악하자 조조에게 항복하려다가 적발되어 손보 자신은 살아남았지만 측근과 부하들은 점술가 유돈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당했고 손보가 거느린 병력은 모두 흩어져 다른 장수들에게 재편성되었고 손보는 거의 귀양이나 마찬가지로 동쪽으로 갑니다. 하지만 이런 반란은 차후에도 지속적으로 벌어져 강하를 손에 넣기 직전에도 심한 반란때문에 퇴각했고, 항상 반란 문제때문에 일부 병력을 본국에 주둔시켜야 했습니다. 이는 적벽대전이나 촉오전쟁때도 마찬가지였죠.
인재 문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손책은 고대가 무례하다 해서 죽이긴 했지만, 인망이 높던 전 오군태수 성헌은 손을 대지 않았는데 손권은 성헌을 어떠한 죄도 없음에도 처형했고, 이는 결국 동생 손익의 죽음으로 되돌아옵니다.
군사적 면에 있어서는 손권은 형인 손책에게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적벽대전이 끝난 이후 손권은 항상 자신의 주력을 끌고 합비를 공격했지만 항상 패했습니다.
장료의 경우는 워낙에 장료가 사기캐였다는 변명이 먹힐지 몰라도-결국 그 사기캐를 만들어준 건 손권 자신이었습니다만-장패에게도 패했고 만총에게도 패했으며, 거기에 문관이자 행정관인 장제에게 박살나기까지 한 것을 보면 손권의 군사적 재능은 아주 좋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2중 전선 때문에 오가 남군 강릉을 차지했음에도 지키기만 했고, 합비 쪽은 있는데로 박살나는 상황이라 적벽대전 이후 계속 몰아쳐 조조를 몰아쳐야했지만 이는 결국 조조가 세력을 회복하고, 유비가 파촉으로 진출하는 시간을 벌어주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어진 형주 공방전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던지 간에 촉오전쟁으로 이어졌고, 촉오 동맹이 회복되었지만 촉은 항상 오의 배반과 소극적 행동을 경계하게 됩니다.
내정에 있어서도 손권은 삽질을 계속합니다. 손권은 장온을 글염과 엮어 숙청했고 인사정책에 관해서도 모든 사람이 추천하던 장소를 승상에 임명하지 않을 정도로 사감에 휘둘리는 정책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사섭이 죽자 멀쩡히 오에 복종하던 교주를 들쑤셔서 이후 248년 교주의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죠. 거기에 남방의 하이난, 타이완 섬의 원주민들을 병력으로 삼기 위해 몇번이나 이 지역을 들쑤셨다가 실패하기만 해서 위온과 제갈직 같이 실무자들을 그 책임을 뒤집어 씌워 죽이기까지 했죠. 거기에 후반부에는 이궁의 변을 일으켜 오의 인재들을 거의 파탄냈고 권력욕만 가득하고 능력이 없던 전씨 일족과 손씨 방계들이 고위직을 차지하면서 오를 분탕질하기까지 하죠.
거기에 손권의 개인적인 성향으로 술을 좋아하고 주사가 심해 술에 취하면 매우 폭력적이되었습니다. 고옹, 우번 등이 이러한 손권의 주사벽에 걸려 곤욕을 치르기까지 하죠.
거기다 손권은 말년에 신을 자칭하는 왕표라는 자를 중서랑 이숭을 파견해 보국장군 나양왕의 직위를 주고 그를 궁으로 불러들이게 합니다.
진수는 손권을 이렇게 평합니다.
손권은 몸을 굽혀 치욕을 참으면서 재능 있는 자를 임용하고 지혜로운 자를 존중했고, 구천(句踐)과 같은 비범한 재능이 있었으니, 영웅 중에서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혼자 강남의 땅을 차지하여 삼국정립의 세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의심이 많고 사람을 죽이는데 있어서 주저함이 없었으며 만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했다. 그는 참언을 듣고 믿어 인성을 멸하는 일을 하여 아들과 손자를 버리고 죽었다. 어찌 자손들에게 평안한 책략을 남기고, 신중하게 자손의 안전을 계획한 자라고 말하겠는가? 그 후대가 쇠미하여 결국은 국가를 멸망시키게 되었는데, 틀림없이 이러한 원인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배송지는 이렇게 평하죠.
손권이 죄 없는 자식을 (세자에서) 폐하여 그것이 비록 어지러움의 징조가 되고 나라가 기울어 졌다 해도 (오나라의 멸망은) 처음부터 포악한 손호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손권이 손화를 폐하지 않았다면, 손호가 적자가 되어 황제 자리를 이었을 것이니 결국은 망했을 것이다.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는 즉 나라의 멸망은 어두움과 잔인함에서 비롯된 것이지, 누구를 폐출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손량이 임금 자리를 보존하고 손휴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손호가 제위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손호가 오르지 않았다면, 즉 오나라도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mlbpark의 phenom님의 번역입니다.)
손권에 대한 평은 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그만 쓰겠습니다. 이 이상 쓰다간 제 혈압이 폭발할 것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