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많아서 오랜만에 업데이트 하는 점 용서바랍니다. :)
그리고 어쩌면 좀 따분한 주제를 성의껏 읽어주신 여러분께 또 감사인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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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공인
주희가....이겼습니다.
역사가 늘 그랬듯, 살아서 받은 탄압은 죽어서 훈장이 된다죠.
주희는 상당히 강력한 학술탄압 속에서 오래 고생하다 죽었고
결국 이러한 개인사는 후에 주희의 학문이 국가공인을 받는 데에 상당한 힘이 됩니다.
이미 남송 말기인 1240여년 경에 슬그머니 황제의 칭찬을 공개적으로 받기 시작하더니
결정적으로 몽골의 점령과 원나라 성립 후(약 1270년대 중반)에는 국가 공인학문이 됩니다?
....?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김용의 영웅문 삼부작, 특히 사조영웅전을 읽어보신 분은 중국 유교의 민족주의적 성격, 그것도 상당히 비분강개한 톤의 반 이민족 정서를 간접적으로 느껴보셨으리라 믿습니다.
그 외에도 현재 한국인의 상식상 유교는 반외세 반이민족, 어떻게 보면 상당히 갑갑한 우파논리의 온상처럼 여겨지고
이러한 인상의 상당부분은 실제로 주자학에서 기인한 면이 많습니다.
주희 본인이 금나라 여진족들에 대해 굉장한 강경파였고, 북벌을 공공연히 주장할 만큼 이민족에 대해서는 이를 갈았거든요.
우리나라로 치면 이항로 류의 위정척사파를 생각해보시거나, 아니면 안중근이나 김구 등 유교 소양을 꽤 많이 쌓았으면서도 또 외세에 대한 군사행동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을 떠올려보시면 좀 비슷할 겁니다.
비분강개하지요.
그런데
원나라 정권은 이 주자학을 정신없이 물고 빠는 걸로도 모자라서 그냥 유일의 공인학문으로 박아버립니다.
1314년, 주자학 텍스트들을 과거시험의 공식 답안지로 선포해버린거죠.
.......?
얼핏 이해가 안가는 조치입니다.
더 재밌는 건 청나라 역시 주자학을 공인했다는 겁니다.
.....-_-;;
정작 한족 정권인 송나라 때나 명나라 때 주희가 저평가를 받았던 것과 비교해본다면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죠.
한 술 더 떠 역시나 "이민족"에 해당하는 조선에서 그렇게 열정적인 사랑을 받았던 걸 보면 주자학에 뭔가 이민족에게 어필할 만한 은근한 매력이 있는 게 아닐까요?
이부분은...흐흐.. 제 연구 주제 중 한 부분입니다.
나중에 뭔가 더 잘 알게되면 요 부분만 떼서 다시 자게에 올리겠습니다(한 5년 쯤 뒤에...음..^^)
2. 조선 성리학
고려말부터 슬금슬금 조선반도로 흘러들어오던 주자학 텍스트들은 이 동방의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환영을 받습니다.
이 부분이야 연구가 되고 되고 또 된 부분이라 제가 따로 첨언할 거리가 없습니다만,
몇가지 재밌는 부분을 말씀드리자면, 고려말 성리학이 들어오게 된 데에는 원나라 정권의 공이 크다는 건데요.
원나라에서 열심히 주자학 텍스트들을 인쇄하고
그 인쇄된 텍스트들을 고려의 문신-학자들이 하나 둘 가져와서 연구한 것이 그 시작이 됐죠.
여러모로 몽골족들은 본의(?) 아니게 동아시아 사상계에 지대한 족적을 남기게 된 셈입니다.
자 그러다가, 조선이 건국이 됩니다.
조선의 건국이념은 분명 주자학입니다.
조선을 사실상 설계한 정도전이 주자학에 상당히 해박했고,
자신의 학업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주자학 국가를 실험하고자 했습니다.
만,
위로부터의 이런 국가설계가 저 아래쪽까지 내려가는데는 사실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을 우리는 최근 100년간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나요.
자유, 평등, 민주주의, 삼권분립 등을 전 국민이 절실하게 흡수할 때 까지 걸린 시간은 음... 이미 100년이 넘게 흘렀지만 여전히 불만족스럽지 않은가요?
그 많은 피를 보았고, 또 그 많은 사건을 겪었는데도요.
조선조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조는 조선이 혹 불교국가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불교를 우대했었고
조광조는 궐 안의 일종의 도교 기도소(소격서)를 제거하는 문제 하나로 3일 밤낮을 퇴근 안하고 엎드려 중종(재위 1506~1544))에게 탄원해야 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혁파했던 소격서는 바로 이듬해 조광조가 실각한 뒤 중종이 곧바로 부활시켜버렸더랬죠.
소격서가 비로소 궐 내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임진왜란(1592) 이후, 즉 17세기가 된 뒤였습니다.
불교나 도교에 대한 공격과 같은 "네거티브"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도 그렇지만,
사상의 발전이라는 "포지티브"의 측면에서 보아도 성리학이 비로소 조선을 온전히 접수했던 것은 임진왜란 전후였습니다.
임란 직전 사상적 성숙에 있어 거의 전성기를 맞이했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해줍니다.
3. 퇴계와 율곡
음...흠...
여기까지 오고 나니 제가 왜 이 글을 쓰려고 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옵니다.
감당하지 못할 거였으면 시작을 하질 말 걸 ㅠ.ㅠ
여기서 본격 이기론 이야기를 다룰 수는 없으니 몇 가지 곁가지 이야기나 해볼까 합니다.
3.1. 주리론 주기론?
사실 이부분을 전공하다 보면 "주기론"이란 말이 얼마나 이상한 말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명색이 성理학인데, "리"냐 "기"냐를 놓고 어떻게 기 위주의 학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성리학의 알파요 오메가는 이 "리"의 이해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퇴계와 율곡도 이 리가 무엇인지를 놓고 부딪혔던 거구요.
주리파와 주기파라는 구분 도식은 조선 말 일제 초 다카하시 토오루라는 조선유학 전공자에 의해 도입된 것으로
요즘은 강려크한 비판을 받고있습니다.
3.2. 이기일원론? 이기이원론?
주희의 명제는 "둘이자 하나, 하나이자 둘"이었습니다.
모순어법은..... 사실 모순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합니다. 다만 레토릭의 하나로써는 다양한 쓸모가 있죠.
예컨대 "작은 거인"은 형용모순이지만, 하나의 시어로써 겉은 작지만 속은 큰, 내실이 단단한 어떤 야망과 패기로 가득찬 인물의 심상을 떠오르게 하는 것처럼,
"둘이자 하나"라는 말 역시 그의 사상체계 내에서 리와 기의 관계에 대해 강려크한 시사점을 갖습니다.
따라서 이걸 '일원파와 이원파'와 같은 도식으로 구분하는 건 사실을 왜곡할 소지가 큽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요즘 학계에선 이러한 구분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3.3.
사실 하나의 형이상학으로서 퇴계와 율곡이 제시한 체계의 모양새만 놓고 보면 율곡의 것이 더 정교하고 잘 굴러갑니다.
천재죠.
그런데 구수한 맛이 좀 덜합니다.
퇴계는 일견 모순적인 그림을 제시하고 있고, 이것이 논리 정연한 젊은이들, 기대승과 이이를 자극하긴 했습니다만,
그런 모순점을 접어놓고 퇴계의 말을 계속 들어보면 아주 강렬한 시적-영적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작은 거인" 처럼요.
율곡에겐 이런 맛이 없습니다.
3.4.
율곡은 명나라 유학에 조금 더 우호적이었습니다
퇴계의 경우는 원나라 유학에 더 후했습니다.
퇴계의 명저 성학십도의 3할은 원나라 유학자 임은 정복심에게서 나온 것이었고,
율곡은 퇴계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며 정복심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기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반면 퇴계는 나정암, 왕양명 등 최신 명나라 유학을 상당히 격하게 공격했습니다.
3.5.
이상에서 느낄 수 있듯, 둘의 차이는 사상적 차이이기 이전에 캐릭터의 차이라고 보면 좋습니다.
한쪽이 시인이자 은자, 종교인, 인문학자였다면
다른 한쪽은 유능한 정치인이자 사회학자였던 거죠.
4. 자주성(?)
단재 신채호가 그랬습니다.
조선의 주자가 됐어야 하는데 주자의 조선이 되어버렸다.
통렬한 비판이긴 한데, 그렇다고 꼭 맞는 말도 아닙니다.
요즘 한국의 사상계를 보시면, 서양 학계에서 유행하는 게 한 10~20년 텀을 두고 슬금슬금 들어와서 뒤늦은 유행을 형성하고, 기존의 유행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곤 하죠.
서구식 학술 시스템이 정착한 역사가 워낙 천근해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학문 권력의 주변부, 변방에서 자주 보이는 현상이기도 하구요.
문화적으로도 마찬가지죠.
헐리우드 스타일이 쵸큼 변하면,
한국 영화계는 확 따라가고
아메리칸 팝이 쵸큼 변하면,
한국 음악계가 또 확 따라가고
그렇지 않나요?
조선은 조금 달랐습니다.
명나라 학계에서 주희를 주구장창 걷어차던 때에도 애지중지 주희를 연구했고
청나라가 들어선 후에도 그랬고
뭐 계속 그랬습니다.
문화와 학술의 역량에 있어 중국과 비교도 안됐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본토"에서 발생한 최신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갔죠.
기존에는 이러한 현상을 수구꼴통들의 주자학일변도라고 까고 또 까고 깐데 또 까곤 했었는데,
최근에는 이런 점이 조선의 주자학 연구역량과 그 축적된 성과물의 수준을 반증해주는게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운 시각도 있습니다.
주자학 연구가 어떤 임계점을 넘어가서, 완전히 토착화되어 정착하면서
본토의 변화에 저항할 만큼 숙성된 게 아니냐는거죠.
더 나아가 약간의 자주정신이 있지 않았나 하는 시각도 있구요.
퇴계가 당시 명나라 학계를 까는 모습을 보면
묘하고 야릇한 뉘앙스가 하나 있습니다.
"야... 늬들 조상님들은 이렇게 훌륭했는데 요즘 늬들 하는 꼴을 보니 참 못난 자손 같구나."
이렇게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좀 그래요 흐흐. 분명 이런 느낌이 읽힙니다.
비유하자면
한국 음악인들이 전부 롹 매니아가 돼서
200년간 롹만 판 결과
드디어 롹에 도통하게 된 거죠.
그리곤 200년 전의 레전설 라커들의 영혼을 울리는 기타리프를 재연하면서
동시대의 미국 롹의 변화를 비판하는 겁니다.
"요즘 미국 락은 상업화의 영향으로 영혼을 완전히 잃어버렸어. 기집애들이나 좋아하는 락이 되어버렸지. 하지만 우린 달라! 우리야말로 메탈리카와 너바나의 진정한 후예라고"
뭐... 그렇습니다 -_-;;
5. 마치며
어휴... 부족한 실력으로 이것저것 찾아보며 쓰느라 힘들었는데
이제야 마음의 부담을 놓게 됐네요.
이보다 훨씬 정교한 기획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쑥쑥 뽑아내시는 눈시님이나 sungsik님, 신불해님 같은 분들이 정말 존경스러울 뿐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혹 의심스러운 점이나 궁금한 점, 글에서 잘못된 곳이 보인다면 가감없이 질정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