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국가를 건설하고 유지시켜나가는데 있어서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후계자 선정 문제죠.
후계자 선정 문제가 잘 나가던 나라를 일거에 말아먹는 상황을 유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후한 말부터 시작된 각 군벌들의 난립(사실 제후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호족이고 군벌이죠.)은 후한이라는 나라를 사실상 조각조각 찢어놨습니다. 원소, 조조, 유표, 손견, 공손찬 등의 거대군벌들과 마등, 이각, 도겸, 원술, 여포 등의 중소군벌 세력, 그리고 유비와 같은 유랑, 혹은 소세력등의 난립이 있었기 때문이죠. 이 세력들간의 각축으로 인해 2~30년의 분쟁을 거친 후에야 위촉오의 삼국으로 중원이 3분되었습니다.
각 군벌들이 패망한 이유는 제각각이었습니다. 원술처럼 알아서 망트리 타주다가 스스로 꼬꾸라진 군벌도 있었고, 여포처럼 주변과의 대외관계가 어그러지는 바람에 집중공격을 받아 망한 군벌도 있었으며, 장로처럼 힘의 압박에 못이겨 항복해 없어지는 군벌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조조보다 세력이 더 컸던 원소와 유표가 멸망한 이유는 다름아닌 후계자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후계자 문제에 있어서 가장 정답은 "유능한 자식을 후계자로 삼아 나라를 발전시키도록 한다"인데.....이게 말처럼 쉽나요.
삼국지 게임처럼 통솔 얼마, 무력 얼마, 지력 얼마, 정치력 얼마, 매력 얼마, 특기 뭐...이렇게 정해지고 이게 단순화 시킬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능력이 있어도 성격이 개차반 같으면 또 문제죠. 이래서 나온게 "적장자 우선 원칙"이죠.
1부인에게서 태어난 큰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 가장을 이어받는 것이죠. 그러나 이거도 문제가 있었죠.
중국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는 왕 뿐만 아니라 지배층들은 일부일처제를 따랐습니다. 즉 남자 한명이 거느릴수 있는 "정처"가 한명이라는 거죠. 그런데 "정처"가 한명이지 첩은 몇명을 두어도 상관은 없죠. 왕가에도 황제나 왕에게는 많은 후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일반적으로 서얼이 되는 반가나 민가의 첩과는 달리 이 군주의 후궁들이 생산한 아들들 역시도 왕비의 아들과 우선권이 밀리긴 하지만 왕위계승권이 존재했습니다. 실제로 후궁 출신 황제나 왕도 있었죠.
원소의 경우를 살펴보죠. 원소에게는 우리에게 알려진 아들이 셋 있습니다. 장남인 원담, 차남인 원희, 삼남인 원상.
원담과 원희는 원소의 전부인 출신이었습니다. 삼남인 원상은 연의에서는 원소의 후처인 유씨 소생이라고는 하지만 정사에서는 원상이 유씨의 아들인지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상은 후처인 유씨의 편애를 받았고 원소에게 항상 상을 칭찬했죠. 원소전에는 원상이 원소를 많이 닮았고 미소년이라 아버지인 원소와 유씨의 총애를 받았다고 합니다.
장남인 원담은 공손찬의 세력권 내에 있던 청주를 공격해 원소의 세력권에 넣는데 성공한 군공이 있었고 이후 청주자사로서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황건적과 해적들을 평정해 흡수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196년 4월 북해태수 공융을 공격해 공융을 쫓아내고 그 가족들을 사로잡죠. 이때 후한서에는 원담이 폐적되어 원소의 형의 양자로 들어갔고, 원담은 친아버지를 삼촌으로 부르고 원소는 친아들인 원담을 조카로 부릅니다.
원담폐적론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 하도록 하죠. 폐적되긴 했지만 적장자인 원담과 실세인 원상의 후계문제에 원소의 모사진이 서로 갈라서면서 원소 진영은 점차 내분양상이 격화되기 시작합니다. 관도대전에서 대패한 원소가 병상에 들면서 이러한 내분은 심하게 격화되었고, 원소가 죽자마자 이 두형제는 주적인 조조가 앞에 있었음에도 내분을 벌였고 하북 전체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하북 원가는 알아서 멸망해주는 대삽질을 벌이게 됩니다.
유표의 경우 역시 살펴보죠. 유표 역시 부인이 둘 있었습니다. 유기의 어머니는 진씨입니다. 이 진씨가 언제 죽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유표가 형주로 오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유표가 형주로 오면서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혼인 정책을 쓰게 되는데 이때 맞아들인 사람이 채부인입니다.
채부인의 가문인 채씨가문은 괴월의 괴씨 가문과 함께 형주의 거대호족이었습니다. 유표가 형주의 지지기반이 없다가 채씨 가문의 채모와 괴씨 가문의 괴월, 괴량이 유표를 지지하면서 형주의 지배자로 군림했다는 점을 본다면 이 두 가문의 힘은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유표가 고령이 되면서 유표의 뒤를 이을 후계문제가 수면위로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208년 황조가 손권에게 죽고, 조조의 대남정이 시작될 무렵 유표가 사망합니다. 장남인 유기는 유비와 형주의 외부 인사들과 대호족들에 반발을 가졌던 중소호족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강력한 세력을 다지고 있던 대호족들은 유기를 강하로 쫓아내고 차남 유종을 후계자로 받듭니다. 유기와 유종 둘 다 본부인인 진씨 소생이었지만 유종은 채부인의 조카(채모의 딸인듯 합니다.)에게 장가들어 형주 대호족들과 연결되어 강력한 커넥션을 형성해 형주를 이어받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얼마 안가 내려온 조조에게 항복하고 고향인 형주에서 쫓겨나듯 청주로 가죠.
원소의 경우, 아들들에게 군권과 힘을 기를 영지를 주었기 때문에 장수와 참모들 간에 파당을 형성해 서로 내분을 벌이다가 알아서 망했고, 유표의 경우 세력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접근한 대호족들을 제어하는데 실패하는 바람에 유표 본인의 뜻과 관계없이 대호족들로 인해 후계가 정해졌고 이 대호족들의 발호로 인해서 여론이 분열되 조조에게 어이없이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원소와 유표의 경우를 봤던 조조는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조조의 수많은 아들 중 조비, 조식, 조창은 후계권에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중 조비와 조식이 가장 손꼽히고 있었죠. 조조는 위왕이 되자 조비를 세자로 삼습니다. 그리고 조식파인 양수를 숙청하죠. 조조 입장에서는 유표처럼 미리 후계자를 정하지 않아 이 후계자 해석을 모호하게 해 내분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거했고, 원소처럼 장수와 참모들이 계파를 나눠 후계자 내분이 중신들간의 내분으로 인해 나라가 공중분해 되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조비는 조식과 그를 따른 사람들을 모두 숙청하면서 혹여 있을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의 앞을 닦아줍니다. 도태되었던 조식이 다시 올라올 가능성을 밟아버린 것이죠.
손책은 자신의 아들을 두고 손권에게 나라를 맡겼고, 주요 중신들인 주유, 장소 등은 손책의 유조를 따릅니다. 손권은 황제가 되었고 장남인 손등을 태자로 삼습니다.
일견,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241년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죠.
본편은 1주일? 2주일? 후부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