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투스는 고대 로마의 가장 유명한 역사가입니다.
그는 [연대기]를 저술하였고, [게르마니아]를 저술하였습니다.
도미티아누스 치세 당시 활동한 인물이며,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지 거의 50년이나 지나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화주의자]였으며,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제정]을 혐오했던 것 같습니다.
황제들의 권위를 부정한 그의 역사서가 당대 실제로 회람되었을지...
그의 [연대기] 첫장을 대충 의역해서 한 번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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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는 처음에 왕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하지만 루키우스 브루투스 때 자유와 집정관제도가 확립되었다. 때로는 독재관이 있었지만, 이는 한시적이었다. 10인위원회의 임기는 2년이었고, 군사통치권의 임기 또한 길지 않았다. 킨나와 술라의 전제정은 짧았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에게 권력을 양도할 수밖에 없었고, 레피두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에 권력을 이양해야만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세계를 혼란시켰던 내전을 종식시켰고 "프린켑스"라는 칭호 아래 통치하였다(Imperium). 과거 로마의 성공과 역전은 유명한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나, 훌륭한 지성인들은 그의 치세를 기록하길 원치 않았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역사는 그들의 치세 동안 공포에 의해 위조되었었고, 그들의 죽음 직후에는 증오에 의해 덧씌워졌다. 따라서 나는 그 어떠한 악감정이나 편견없이 아우구스투스의 행적에 대한 몇 가지 사실, 특히 최후의 순간에 행했던 것들을 이야기하고 티베리우스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2.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파괴된 이후 공화국의 군대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시칠리아에서 대패하고, 레피두스는 굴복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살해당한 후 오직 율리우스 가문의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만 남게 되었고 그는 삼두정치를 버리고 집정권과 호민관의 권한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그는 군인들에게 선물을, 백성들에게는 저렴한 곡물을,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면서 권력을 강화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원로원의 권한, 국가요직의 권한, 그리고 모든 법의 권한을 본인에게 집중시켰다. 그를 막을자는 더 이상 남지 않았다. 가장 용감한 이들은 전투에서 숨지거나 공직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은 기꺼이 노예를 자처할수록 더 많은 승진기회와 부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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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만 봐도 그가 어떤 입장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지요.
그의 저서들이 살아남은 게 용합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사후 1백년이 넘게 지나서도 공화주의자들이 남았다는 게 한편으로는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