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7/18 23:19:22
Name 꿀꿀꾸잉
Subject [일반] [9] 휴가를 보내고 계신 당신께 (수정됨)

휴가를 보내고 있을 당신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것은 처음입니다.

좋은사람,

누군가 당신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아마도 나는 이렇게 답할 겁니다.  

진부한 표현을 쓰는걸 용서하세요.
그러나 이것 만큼 적절한 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당신을 좋아했습니다.
싫은 내색하나 하지 않던 당신은,
언제나 양보를 하던 당신은,  
이기적인 우리 사이에서
조그맣게 빛나곤 했습니다.  

* * *

그렇기에  '불행'이 닥쳤을때
모두가 놀라고, 슬퍼했습니다.

하루에 두 번,
당신이 누워있는
중환자실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겨우 그것뿐이었습니다.

난폭하게 빡빡 밀린 머리와
통통 부어버린 당신은
깊은 잠에 빠져서 깨어날 줄 몰랐습니다.
모두가 우울함에 빠졌고,
누군가는 울었습니다.

어째서 일까.
손해를 보는 것은 당신이었고,
참고 참았던것도 당신일텐데.

당신도 분명.
우리가 당신에게 풀어냈던 만큼의
걱정과 괴로움을 가지고 있던거겠죠.

조금 더 즐거운 시간을 공유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신이 그랬던 것 만큼
힘이 되어 줄 수 도 있었는데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마음속의 짐을 가진채
한동안 짓눌린채 시간을 보냈습니다.  



* * *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어느샌가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단톡방에서 사라지고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누군가는 떠났습니다.

내리던 빗줄기가 눈으로 바뀌고
슬픔이 무색하게 봄이 오고
어느샌가 꽃들이 피었습니다.

떠나간 빈자리는 채워지고 사라지길 반복하고
당신이라는 연결점을 잃어버린 우리는
어느샌가 미아가 되어렸습니다.

표류하는 일상의 나선 속에서
당신의 존재는 어느샌가 이리저리 휩쓸려
사라져 버렸습니다.


짧게 잘린 머리와 하얀 환자복을 입은 당신은
치료사의 양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고 있었습니다.

행여나 넘어질새라
조심 조심 걷는 발걸음이
여리고 어렸습니다.

짧디 짧은 머리에 안경을 쓴 당신은,
그저 어린 아기 같았습니다.

할머니라고 하기엔
아직은 너무나도 어린데.
지치고 지쳤던 당신은
어린날의 그때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시간 개념이 사라진 당신의 기억 속,  
남아 있던 얼마 안되는 조각들은
행복했을 어린시절의 단면과
어린시절 불렀을 동요들 뿐이었습니다.

뭐가 그리 웃긴지
내가 몇마디를 하면 웃고
말을 따라하면서 키득거렸습니다.

곱던 목소리는 사라져, 약간은 긁히고,
아기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목에는 무언가를 뚫었다가
봉합한 흔적이 보였습니다.

"힘내"

그 말이 그리 웃긴지,
당신은 아기 처럼 내말을 따라하고
그것이 웃겼는지 키득키득 웃었습니다.

"힘내 ! 힘내!"



길게는 2년, 짧게는 몇달
모두가 회복될거라는 기댸를 가지고
지치지도 않고 새로운 사람들이 병원에 도착합니다.

시설은 깨끗하고, 사람들은 친절하고, 맛있는 음식들이 있고.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푹 쉬고, 모든것이 건강해서 퇴원을하고
그러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
마치 휴가를 다녀온것 같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당신의 휴가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습니다.

행복한가요?
그곳에는 당신을 향해 험담하던 사람들도
무리인걸 알면서도 일을 맡기던 사람들도,
돈문제도, 기대도 압박도 성적도,
모든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휴가는,
당신의 일상은
어제 처럼 오늘도
행복하게 이어지겠지요.


하나 둘 모이던 술자리가
연례행사처럼 만나던 친구들이 뜸해지기 시작했어요
어색하기 짝이없는 새로운 관계의 끈들이
팽팽하게 밀리다가 어느샌가 뚝하고 끊어졌습니다.

휴가를 가려고 했습니다.
돈을 쓰고 맛있는것을 먹고,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러면 분명
무언가 나아질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나는 이미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힘들고 고단했던 지금의 일상이야 말로
순수했던 존재와 함께할 수 있었던 마지막 휴가입니다.
분명히 나는 시간이 지나고 지나면, 이때를 그리워 하겠지요


시간은 흐르고 흐릅니다.
끝날거 같지 않았던 휴가가 끝나려고 하고 있어요
끝날것 같지 않은 길고 긴 휴가가 끝나고 나면
당신을 더 이상 만나러 가지 않을거에요

우리가 일전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처럼



기나긴 휴가를 보내고 계신 당신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이 편지는 전하지 못할 거 같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치열하게
19/07/19 13:43
수정 아이콘
태풍이 아직 오지 않아 날은 밝고 해볕은 쨍쨍한데도 먹먹해지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1903 [일반] [9] 갑작스레 떠난 5박6일 뚜벅이 제주도 여행!! [7] 천우희6484 19/07/20 6484 8
81902 [일반] 영웅(英雄)의 조건 [29] 성상우7621 19/07/20 7621 12
81901 [일반] 형이상학 - 번역, 의미. [4] skkp5740 19/07/20 5740 8
81900 [정치] 일본 측 무례함이 선을 거듭 넘고있네요. [258] 길잡이25012 19/07/20 25012 15
81898 [일반] 러시아어 필기체, 한국인이 알면 재미있는 '퍼즐' [49] Farce19014 19/07/19 19014 23
81897 [일반] [뻘글] 야밤의 서재 자랑 [9] aurelius6923 19/07/19 6923 4
81895 [정치] 바른미래당 내분 근황 (손학규 vs 유승민) [45] Davi4ever11182 19/07/19 11182 0
81894 [정치] 내분이 격화되고 있는 민주평화당 (정동영 vs 박지원) [47] Davi4ever9784 19/07/19 9784 0
81893 [일반] [연재] 그 외에 추가하고 싶은 이야기들, 에필로그 - 노력하기 위한 노력 (11) [24] 228832 19/07/19 8832 21
81891 [정치] [뉴스] 정부,"日수출규제 대응 특별근로연장, 인허가 단축, 예타면제 등 검토 [45] aurelius11960 19/07/19 11960 4
81890 [일반] 3진법 반도체 [55] 삭제됨17771 19/07/19 17771 4
81889 [일반] 또 만들어 온 비즈 [13] 及時雨6508 19/07/19 6508 15
81888 [일반] 주차장 사고로 아이를 잃은 사고가 안타까워서 공유합니다. [33] 마법거북이9770 19/07/19 9770 6
81887 [정치]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이승만 추모식에서 '물세례' [64] Davi4ever12239 19/07/19 12239 9
81886 [일반] 뚜루뚜루, 죠스가 나타났다? [22] probe6861 19/07/19 6861 2
81884 [일반] [역사] 스페인 유대인들의 역사 [8] aurelius8936 19/07/19 8936 14
81882 [일반] 일본대사관 건물 앞 차에서 불…70대 온몸 화상 [185] 나디아 연대기18359 19/07/19 18359 1
81881 [일반] 라이언킹 - 실사화의 장점과 단점을 그대로 보여준 리메이크. [34] aDayInTheLife9039 19/07/19 9039 2
81879 [일반] [9] 휴가로 일본에 다녀온 이야기 [26] 기사조련가8457 19/07/19 8457 78
81878 [정치] 오늘 한은에서 금리인하를 발표했습니다 (feat. bloomberg) [81] 14208 19/07/18 14208 25
81877 [일반] [9] 휴가를 보내고 계신 당신께 [1] 꿀꿀꾸잉4419 19/07/18 4419 5
81876 [일반] 태풍 다나스가 북상 중입니다. [47] 아유9173 19/07/18 9173 1
81875 [일반] 피자나라 치킨곶주가 너무 좋습니다. [131] 닭장군14074 19/07/18 14074 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