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를 운영하는 부부는 개를 두 마리 키우고 있다. 덩치가 산만한 삽살개와, 그보다 좀 더 작은 갈색 개인데 이름은 각기 호중이와 호두라고 한다. 동물을 좋아하는 딸아이는 이 숙소에 도착한 그날부터 호중이와의 사랑에 빠진 모양이다. 틈만 나면 호중이를 찾아 달려가서는 곁에 쭈그리고 앉아 털을 쓰다듬는다. 처음에는 호중이가 귀찮아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잘 지켜보니 자기보다도 덩치가 작은 이 부산스러운 꼬맹이를 귀찮아하기보다는 아예 무시하기로 한 모양이다. 아이가 자기를 쓰다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바닥에 드러누워서는 혀를 빼물고 멍하니 있기 일쑤다. 나도 호중이를 따라 바닥에 누워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지만, 아내의 눈길이 무서워서 관두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만두기를 잘한 것 같다.
아침을 먹으러 1층으로 내려오자마자 딸아이는 다시 호중이부터 찾아 달려간다. 원래 아침식사 때는 개들을 다른 공간에 두지만 다행히도 지금은 숙박 손님이 우리 가족뿐인 모양이다. 덕분에 딸아이는 아침마다 호중이를 만나서 행복해한다.
숙소에서 차려준 아침을 맛있게 먹으며 오늘부터 며칠 동안은 내가 아침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는 현실에 감사해한다. 보름 살기가 끝나고 나면 다시 밥을 차려야 하겠지만, 그날이 적어도 오늘은 아니다. 집에 돌아가면 매일 밥을 차리고 다시 설거지를 하고 때때로 가스레인지를 닦는 나날이 반복되겠지만, 그날이 적어도 오늘은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오늘을 행복해하기로 하자.
다만 아침 시간이 빡빡해서 평소보다 거의 두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야만 했다. 그런데도 아침 식사 후 느긋하게 준비를 마치고 숙소를 나설 때 시계가 가리킨 시각은 11시 20분이다. 아무래도 숙소 안에 시간과 공간의 방이 있거나, 혹은 거대질량의 블랙홀이 근처에 있어서 시간의 흐름이 뒤틀린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저 잠시 바닥에 누워 있었을 뿐인데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갈 리가 있나.
어쨌거나 아침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종종 거칠어지곤 하는 아내를 위해 카페에 갔다.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이 휴일이라 옆에 있는 [카페 유나]에 들어갔는데, 무슨 건축대상인가를 받았다는 안내가 입구에 붙어 있다. 나야 건축에는 눈 뜬 장님이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뭔가 멋이 느껴지기는 한다. 하지만 건물보다 더 마음에 드는 건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위미 해변의 풍경이다.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초여름 바다는 모든 것을 잊고 멍하게 바라보기에 아주 딱이다. 아이와 함께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만.
원래 아이들이란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걸 버티지 못하는 존재들인지라, 대략 십여 분만 있어도 몸이 쑤심을 호소하며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한다. 물론 신께서는 그런 존재를 키우는 부모들을 가련하게 여기사 스마트폰과 유튜브라는 하해와 같은 은혜를 내려주신 바 있다. 하지만 무슨 약이든 간에 남용하면 부작용이 생기는 법인지라, 그런 수단을 가능한 한 안 쓰려 하다 보니 아이를 달래는 건 언제나 지난한 일이다. 하필이면 시켜준 아이스크림도 입에 안 맞는 모양인지 한 입 먹은 후 옆으로 제쳐두고는 어서 밖으로 나가자고 난리다. 가볍게 분위기를 잡아 보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우리는 다시 차로 돌아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서귀포향토오일장이 마침 장날이기에 잠시 들렀다가 쇠소깍으로 갔다. 쇠소깍은 바다로 흘러가는 작은 계곡인데 검은 색 현무암과 푸른 나무들이 뒤섞여 있어 좋은 경치를 이루고 있다. 도로 한쪽에 줄지어 있는 촌스러운 관광지 상점들과 무슨무슨 보트니 하는 것들로부터 눈을 돌릴 수만 있다면 한 번쯤 와 봐도 후회가 없을 만한 곳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이들 대부분은 경치에는 관심이 없다. 사실 아이를 데리고 여행한다는 건 고행에 가깝다. 아이들이란 대체로 체력이 약하기에 걷기 싫어하고, 즉각적인 자극이 없으면 쉽사리 지루해하며, 어른들보다 더위나 추위에 훨씬 취약하다. 그렇기에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이란 대부분 부모의 욕심이다. 여행지가 멀수록, 일정이 빡빡할수록 더 그렇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꿈꾸었던 우아한 가족 여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아이는 아이대로 힘들어하고 어른은 어른대로 불만이 쌓이는 일정을 반복하다가 결국 뻥 하고 터지는 경우가 잦다.
그러니까 나도 이렇게 이론으로는 잘 아는데, 이론만으로는 하해와 같은 아량을 지닌 너그러운 아빠인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오늘도 아이는 걷기 싫어 칭얼댔고, 음료수를 마음껏 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뿔이 잔뜩 났다. 그러다 결국은 숙소를 나선 지 세 시간 만에 숙소로 돌아가서 쉬자고 보채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좋은 말로 달래고 하다가, 언제나 그렇듯 대화가 자꾸만 같은 곳을 맴돌게 되자 결국은 내가 먼저 폭발해버릴 지경이었다. 다행히도 위기를 감지한 아내가 아이디어를 낸다. [휴애리]라는 곳에 가자고. 뭔가 예쁜 휴양림이라는데 사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동물 먹이를 줄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게 핵심이다. 아이는 당연히 콜을 외치고, 나는 아내의 희생정신에 감탄한다. 왜냐면 아내는 짐승들 특유의 냄새에 무척이나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직 아이를 위해서 자기가 먼저 그쪽으로 가자고 하니 어머니의 모성애란 실로 대단한 모양이다.
휴애리 내부의 산책로에는 아름다운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불어오는 향긋한 바람에는 짐승들의 똥과 오줌 냄새가 짙게 배어들어 있었다.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는 안쪽까지 들어가자 그런 냄새는 더욱 심해졌고, 말과 염소와 토끼를 지나 흑돼지가 있는 곳까지 가자 냄새에는 둔감한 편인 나조차도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마침내 돼지우리 옆에 서자 정말이지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아내는 먼저 밖으로 도망쳐서 주차된 차 안에 숨어 있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아이와 함께 먹이 주기를 마친 후 뒤늦게 밖으로 나왔다. 어쨌거나 아이는 만족했다. 한동안은.
그런 의미에서 저녁은 [천짓골]이라는 돔베고기 집에 갔다. 돔베고기란 삶아서 나무도마 위에 올려 나오는 돼지고기를 의미한다. 이 가게는 수요미식회인가에 나왔다 하여 유명해졌다는데, 그래도 비성수기에 주중이라 그런지 빈자리가 군데군데 있었다. 고기를 주문하면 한덩어리로 도마 위에 올려져서 떡하니 나오는데 아주머니가 구수한 입담을 섞어 가며 즉석에서 썰어 준다. 삶은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이곳은 꽤나 맛있었다. 다만 이곳의 메뉴는 오직 백돼지와 흑돼지 둘뿐이다. 밥이 존재하지 않는 식당이라는 점은 꽤나 놀랍다.
오늘도 하늘이 흐려서 천문대에 가기는 틀렸다. 이제 제주도 보름 살기도 거의 끝나 가는데, 결국 천문대는 못 보고 가는가 싶어서 꽤나 아쉽다. 마지막 밤인 내일은 날이 밝기를 기원하며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물론 그 전에 아이 목욕시키는 중대한 임무가 남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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