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첫 만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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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년, 여포가 왕윤과 손잡고 동탁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각과 곽사가 왕윤을 죽이고 여포마저 격파한 후 권력을 잡았지요. 천하는 극심한 혼란에 빠집니다. 허수아비 황제와 힘없는 조정은 더 이상 지방을 제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야심을 품은 자들은 저마다 사사로이 군사를 모아 자신의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영토와 사람과 물자를 얻기 위해 서로를 공격했죠. 힘이 곧 정의인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 때 천하의 크고 작은 군벌들 가운데서도 단연 손꼽히는 자는 북쪽의 원소, 그리고 남쪽의 원술이었습니다. 천하를 통틀어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가 출신이었던 데다 벼슬도 높았기에 정치적인 구심점이 될 수 있었거든요. 그러나 같은 가문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무척이나 나빴던 두 사람은 경쟁적으로 동맹 세력을 늘려 나갑니다. 원소에게는 형주목 유표와 연주목 조조가 있었고, 원술은 북방의 강자인 공손찬 및 서주목 도겸과 손을 잡았습니다. 특히 공손찬은 다른 이들처럼 한 주(州)를 통괄하는 주목은 아니었지만 세력은 원소보다 오히려 더 클 정도였습니다.
이런 혼란한 시대에 유비와 조조는 제각기 자신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우선 유비는 과거에 인연이 있었던 공손찬의 휘하로 들어갔지요. 원소와의 싸움에서 여러 번 공을 세워 마침내 평원상(태수급)까지 승진합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지는 못하고 여전히 공손찬의 수하로 있었습니다.
한편 조조는 원소를 도왔기에 유비와는 반대편에 섰습니다. 흑산적 토벌에서 성과를 내자 원소는 표를 올려 그를 동군태수로 삼았지요. 이후 연주 일대를 평정하고 연주목으로 추대되면서, 조조는 원소와 대등하다고 보기는 좀 부족하고 그렇다고 부하라고 치부하기에는 좀 더 높은 그런 애매한 위치까지 올라간 상황이었죠.
이렇게 천하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서로 격돌하던 때에 뜻밖의 일이 생깁니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서주에서 살해당한 겁니다.
사서들마다 조금씩 설명이 다릅니다만, 대체로 조조가 가족을 연주로 불러들였는데 도겸의 부하가 그들을 죽였다는 부분은 일치합니다. 다만 도겸의 의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리고 있지요. 상술하였다시피 당시 조조와 도겸은 대립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도겸이 일부러 조조의 가족들을 죽였다고 보는 사서가 있습니다. 반대로 도겸이 부하를 보내 조조의 가족들을 호위하는 호의를 베풀었지만, 하필 그 부하가 재물에 눈이 뒤집혀서 사람들을 죽이고 도망쳤다고 서술한 사료도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이 엇갈리는 데는 도겸이란 인물의 인간성이 워낙 형편없었던 걸로 비추어졌던 탓도 있을 겁니다. 도겸은 131년 출생으로 조조보다 한 세대 앞선 인물이었는데, 무슨 성인군자급으로 묘사되는 연의상의 이미지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꽤나 잘 노는 걸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동탁의 꼭두각시인 천자에게 일부러 공물을 바쳐 승진한 적도 있었고, 황제를 자칭한 반역자 궐선과 동맹을 맺어 함께 약탈을 다니다가 갑작스레 그 뒤통수를 쳐서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사 도겸전에서는 ‘도의를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선량한 사람들을 박해했다’는 식으로 대 놓고 비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이런 놈이라면 충분히 조조의 아버지를 죽일 만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도겸이 조숭의 살해를 지시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가 조숭을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그가 자신의 세력권인 서주로 피난을 와 있는 동안 언제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거든요. 게다가 조조의 아버지를 인질로 잡는다면 모를까, 굳이 죽일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아무래도 재물을 탐낸 부하가 눈이 뒤집혔다는 추측이 좀 더 사실에 가깝겠지요.
하지만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도겸의 부하에게 조숭이 살해당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조조는 크게 분노하여 도겸과의 전면전을 선언합니다.
서주를 온전히 지배하에 둔 도겸의 세력은 조조보다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또 도겸 자신도 꽤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수의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종군했고 황건적 토벌에도 참여하여 공을 세운 바 있었지요. 그 공로로 한 주(州)의 자사 자리를 꿰찰 정도였으니 군사적 재능은 검증된 셈입니다. 서주의 호족들을 절묘하게 휘어잡아 자신의 편을 들게 했으니 정치력 또한 수준급이었습니다. 동탁이 죽었을 때 조조보다 앞서서 천자를 맞아들이려 시도했을 정도로 대세를 보는 식견이 있었고, 지역 내의 치안을 확보하고 곡물을 충분히 비축하는 등 정사도 잘 돌보아 유랑민들이 서주로 대거 넘어와 정착할 정도였습니다. 이쯤 되면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을 군웅의 일원이었죠.
그러나 하필 상대가 최악이었습니다.
193년 가을. 조조는 도겸을 그야말로 무참할 정도로 박살냅니다. 서주의 십여 개 성을 단숨에 함락시키고 다시 전투를 벌여 도겸의 군사를 대파합니다. 얼마나 크게 패했던지 도겸은 담성에 틀어박힌 채 감히 응전할 생각조차 못하게 되지요. 그의 목을 베는 게 목표였던 조조는 다시 담성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린 도겸도 죽을힘을 다해 버텼습니다.
그러는 동안 조조는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퇴각할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조조는 그냥 돌아가는 대신 화풀이를 합니다. 연주로 돌아가기 전에 굳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취려, 수릉, 하구 등 여러 현들을 공격하였고, 십만 명에 달하는 무고한 백성들을 도륙했으며, 개나 닭조차도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여러 성읍들은 폐허가 되어 버렸고 사수는 시체로 인해 흐름이 막혀 강물조차 흐르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이 끔찍한 살육을 흔히 1차 서주 대학살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조조는 이듬해가 되자 또다시 군사를 일으켜 재차 서주를 침공합니다. 이번에도 연전연승하여 다섯 성을 함락시켰고 도겸의 근거지인 담현까지 밀어닥쳤죠.
하지만 도겸도 이번에는 무작정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혼자 힘으로 조조를 막아낼 수 없다는 게 이미 증명되었기에 동맹인 공손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겁니다. 공손찬이 사사로이 임명한 청주자사 전해가 도겸을 돕기 위해 남하했습니다. 이 때 전해는 전투 경험이 많은 유능한 장수와 함께 오지요. 바로 평원상 유비였습니다.
이 때 유비가 스스로 거느린 병사는 천여 명에다 오환족 기병 약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먹고 살 길이 없었던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이 그에게 합류했고, 서주에 도착하자 도겸이 다시 자신의 직속병력 사천 명을 내줍니다. 그만큼 유비라는 인물이 이미 상당한 인지도를 쌓았다는 의미입니다.
유비는 도겸 휘하의 장수 조표와 협력하여 조조를 요격합니다. 조조와의 두 번째 만남이었지요. 한때 힘을 합쳐 거대한 적에게 대항했던 두 사람이 이번에는 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전투에서 승리한 쪽은 조조였습니다.
조조는 담현 동쪽에서 유비와 조표를 격파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어진 조조는 또다시 서주의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죠. 이른바 2차 서주 대학살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었던 보루마저 무너지자 도겸은 급기야 서주를 버리고 고향인 단양으로 도망치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만큼 조조의 기세는 무시무시했고 서주는 금방이라도 조조의 손에 넘어갈 것만 같았습니다.
도겸의 목숨을 구원해준 사람은 한때 조조의 절친한 사이였던 장막이었습니다. 그가 딱히 도겸을 돕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조조가 본거지를 비운 틈을 타 진궁과 짜고 여포를 맞아들여 조조의 뒤통수를 친 것이었죠. 이 때 놀랍게도 대다수 군현들이 죄다 장막의 편에 섭니다. 서주 대학살을 통해 드러난 조조의 막장성 때문에 그랬다는 주장이 있는데 꽤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조조가 자행한 학살극은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었으니까요.
여하튼 장막 때문에 본거지인 연주를 잃을 위기에 처한 조조는 황급히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주에 겨우 평화가 찾아오게 된 거지요. 하지만 기뻐하기에는 서주의 상황이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조조가 두 차례에 걸쳐 닥치는 대로 백성들을 살육했기에 여러 지역이 황폐해졌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도망쳤죠. 특히 남쪽인 양주나 형주 쪽으로 피난을 간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훗날 형주에서 유비와 만나게 되는 제갈량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도겸은 조조가 또다시 쳐들어올까 봐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선택은 유비였죠. 도겸은 표를 올려 유비를 예주자사로 추대하고 소패에 머무르게 합니다. 소패는 예주의 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곳으로, 연주의 조조가 서주를 침공하려면 통과해야 하는 위치였습니다. 유비에게 자신을 지켜 달라 부탁한 셈입니다. 유비는 응낙하고 마침내 공손찬의 밑을 떠나 도겸의 객장(客將)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겸의 목숨은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조조가 물러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병석에 눕습니다. 벌써 환갑이 넘은 나이까지 겹쳐서 그는 자신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란 걸 직감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도상과 도응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지요. 원한다면 자식들에게 서주를 물려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도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서주의 주인으로 그가 지목한 사람은 바로 유비였습니다.
유비는 사양합니다. 그러나 미축과 진등이 간곡히 요청하고 또다시 북해상 공융까지 곁에서 거들자 결국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공융이야 예전에 유비에게서 은혜를 입은 적이 있으니 그렇다 쳐도, 미축과 진등 두 사람이 모두 유비를 지지한 건 무척이나 의미가 컸습니다. 그들은 서주에서도 손꼽히는 대호족이었거든요. 즉 서주의 토착 호족 세력이 유비 편에 선 겁니다. 게다가 백성들마저도 유비를 환영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엄청난 일입니다. 유비가 서주로 온 건 194년입니다. 193년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설령 그 추측을 받아들이더라도 유비가 서주에 있었던 건 길어야 1년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고작 그 짧은 시간 안에 원래 일면식도 없었던 서주의 지배자가 서주를 통째로 넘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대로 서주에 터 잡고 살아온 여러 호족들까지 나서서 백성들과 함께 그를 추대했지요.
대체 유비는 어떤 인간이었기에 이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단 말입니까.
심지어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진등은 원소에게 사자를 보내 유비를 서주목으로 추대했다고 알립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유비는 공손찬의 휘하에서 원소와 몇 번이나 치고받은 사이였습니다. 악연이었죠. 그런데도 원소는 ‘유현덕은 성품이 고아하고 신의가 있는 사람이니 실로 내 뜻에 부합합니다.’라는 답장을 보내어 유비가 서주를 차지하는 것을 추인합니다. 여러 모로 대단한 일이지요.
이렇게 하여 유비와 조조는 자연스레 다시 같은 편이 되었습니다. 원소-유표-조조 연합에 유비가 합류한 셈이었지요. 그리고 유비와 조조의 인연은 또다시 이어지게 됩니다.
(언젠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