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어느 정도 큰 지금은 이런 대화를 할 일이 거의 없지만,
어렸을 시절(초~중고등학교)에는 종종 부모님과 나와 동생의 영유아 시절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우리를 얼마나 애지중지 애쓰며 키웠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며
'아빠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기억 안 나? 엄마나 이모한테 물어봐 봐~'를 던지면
'아빠가 나 무등 태우다가 문턱 위쪽에 이마 박고 떨어진 기억은 나'라고 대답하는 게 단골 레퍼토리였다.
무려 말도 못 할 시절 딱 한번 일어난 사고였다는데, 고통이 매우 컸는지 선명히 기억나는 게 부모님도 나도 신기해했다.
지금도 선명하다.
1.
중학교 시절 친구의 자전거를 가로채 학교에서부터 집 근처 골목을 뺑뺑 돌며 잡힐랑 말랑 약 올렸던 적이 있었다.
그 녀석의 화가 점점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서로 늘 짓궂은 장난을 치던 사이였던 터라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 같다.
친구가 여러 번 지쳐 주저앉은 뒤에서야 나는 손잡이를 돌렸고,
친구에게 자전거를 돌려준 보답으로 나는 발로 복부를 아주 강하게 걷어차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친구의 뒷모습을 바닥에 뒹굴며 볼 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늘 함께 돌아다니던 가장 친한 내 친구. 그런 친구에게 처음으로 감정이 실린 발차기(?)를
맞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당황했고, 고통보다는 이 친구를 영원히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길거리 한복판에서 엉엉 울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귀여운 다툼이지만, 이때 처음으로 아무리 친한 친구끼리도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걸 어렷품이 느낀 것 같다.
요즘은 여자친구랑 알콩달콩 노느라 이 녀석 얼굴을 많이 못 본다. 마지막 치맥은 내가 샀는데. 나쁜 놈.
기억하고 있다
2.
중학교 3학년 반 회장을 맡았을 때, 반에 꼭 한 명씩은 있는 양아치(속칭 일진)에게 찍힌 적이 있다.
수업이 시작해도 선생님이 안 오시자 가지 말라는 일진의 말을 무시하고 선생님을 모시러 내려간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수업이 끝나자마자 벽에 강하게 밀쳐지며 학교 끝나고 보자는 아주 식상한 협박 멘트를 난생 처음 직접 듣게 되었고,
앞으로 남은 1년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학교 끝나고 끌려가서 맞게 되는 건가? 엄마한테는 어떻게 말해야 하지 친구들은 도와줄까? 공부는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죽고 싶다.
16년 짧은 인생에서 가장 큰 공포를 느끼며 동시에 가장 많은 생각을 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에 눈물이 찔끔 날 찰나, 다른 양아치가 나를 협박하던 아이를 진정시키며 데려갔다. 겁에 질려 대화를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이 한마디가 똑똑히 들렸었다.
'쟤 공부 잘하는 애야'
결과만 말하자면 남은 1년 별 탈 없이 중학교 시절을 끝마칠 수 있었다.
왜 그 말이 나왔는지 당시에는 몰랐지만 아마 학교 선생님들의 관심을 많이 받기 때문에 피곤해질 수 있다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당시 과학고등학교를 준비하며 나름 최상위권에 속했었다. 떨어졌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별게 아닌 일로 한순간에 인생이 박살 날 수 있었던 경험은 영 달갑지 않았다.
만약 내가 그저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주변을 통해 쉽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늪처럼.
세상이 마냥 공평하진 않구나. 나는 많은 특혜를 받고 있구나.
이 뒤로 따돌림을 당하는 다른 학우를 외면할 때마다 죄책감 뿐만이 아니라 어딘가 뒤엉킨 무언가를 더 느끼게 되었다.
매우 끈적이고 더러운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다.
* 첫 글이기에 가독성에 눈을 찌푸리실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