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생각 없이 아침에 1화를 시작했다가, 한 번도 끊지 못하고 8화가 지금 끝났어요. 마지막 정주행이 루머의 루머의 루머 시즌 1이었으니까 무척 오랜만이네요. 흡입력이 대단합니다.
우선, 말로만 듣던 인물과 시대를 생생히 볼 수 있다는 점이 문에 들어서게 하는 지점이예요. 트로츠키, 레닌, 스탈린 세 주연과 고리키나 프로이트에 프리다 칼로까지. 볼셰비키, 10월 혁명, 붉은 군대 등. 산 너머에 있다는 막연한 시공간에 발 딛고 그들을 따라다니는 느낌입니다. 제작, 자본, 주연 모두 순수한 러시아 콘텐츠라는 점도 흥미롭고요. 할리웃이 만들지 않은 러시아 영웅들의 모습은 어떨까.
유태인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이 트로츠키로 이름을 고치고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가 되기까지, 드라마는 트로츠키에게 끊임없이 달라붙습니다. 집요해요. 왜, 누구를 위해, 무엇을 이루려고 그랬는가를 희생자의 입을 빌어 묻지요. 과연 문호의 나라 러시아라고 할까요. 그야말로 ‘일이관지’, 하나로 모두를 꿰뚫는다는 말처럼 그의 가치관은 모순되지도 허점이 드러나지도, 찌질하지도 않게 표현됩니다. 이 내가, 이 대단한 영웅인 내가 이 나라와 민중을 공산주의 낙원으로 이끌겠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구조와 비슷합니다. 전성기를 지난 주인공에게 인터뷰어가 붙어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극을 전개해요. 인터뷰어는 계속해서 늙고 추방된 지도자의 업적 혹은 행적을 깎아내리려 안달하고, 인터뷰이는 때로는 의연하게 젊은 애송이를 논파하기도 하고 환영에 휘둘리며 괴로워하기도 하면서 극은 과거와 현재를 교묘하게 짜깁습니다. 그 바느질 자국은 설원을 거침없이 달리는 ‘붉은 군대의 기차’ 이미지로 표현되는데, 이 기차가 바로 트로츠키 본인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지요. 골방의 사상가에서 창고의 선동가, 카페와 광장의 연설가, 전장을 달리는 지휘관을 거쳐 망령에 시달리며 회한에 휩싸인 늙은 영웅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에 흠뻑 빠진 채로 여덟 시간이 훌쩍 지나 마지막 장면이 첨부한 이미지입니다. 혁명의 열차에 삶의 모든 걸 바친 트로츠키의 삶을 보여주는 장면이지요.
미장센도 훌륭합니다. 1898년 5월 오데사, 1902년 파리, 브뤼셀, 1차 대전이 끝날 때의 러시아, 1940년의 멕시코 등지를 구도와 빛깔 모두 잘 살려냈어요. 그 시대를 살지 않았으니 살려낸 것같다고 해야겠지요.
주연 콘스탄틴 하벤스키의 연기는 뭐 하나 아쉽거나 흠 잡을 데가 없구요. 나탈리야 역의 올가 수툴로바는 연기도 잘하지만 정말 아름다워요. 그런데 배우들의 정보를 구글에서도 쉽게 얻을 수가 없어요. 그 점도 흥미롭지요.
더 많이 쓰고 싶은데, 쓸 재주도 없고 스포도 자제할 겸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히 일감을 권해봅니다. 추천해주신 aurelius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