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먼저 이 글은
https://cdn.pgr21.com/?b=10&n=317484 링크 글의 댓글에 달린
https://www.google.com/maps/d/viewer?mid=1BO4HBVkJ3lpXbZ3igQBpZiLfPpc
삼국시대 지명을 링크해놓은 지도에 감명받아 중국 삼국시대에서 제가 가장 몰랐었던, 그리고 알게되면서 가장 놀랐던 성과에 대해 같이 나눔하고자 글을 씁니다. 이 글은 정사 삼국지와 그를 풀어놓은 웹상의 많은 문서에서 그 지식을 빌려왔음을 미리 밝힙니다. 그리고 사서의 공식 표현은
[ ] 처리하겠습니다. 번역은 웹상의 문서를 교차검증하여 기재하겠습니다.
2. 제갈량 생전 왕평의 활약 : 대 장합 카운터
1) 등산가와 함께한 나날 : 1차 북벌
기산으로 진출한 제갈량은 위에서 진창을 통해 넘어올 기점이 될 가정으로 마속을 파견하며 왕평을 달려 보냅니다. 우리 모두가 알듯 저 험지 가정 어딘가에서 길목을 지키고 있었어야할 마속은 산으로 올라가 버립니다. 여기서 중요한건
[먼저] 가정에 왔음에도 산으로 올라갔다는 것이겠지요. 여기서 이 글의 주인공 왕평은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결국 올라갔고
[나중에] 도착한 장합이 보급을 끊고 마속은 패퇴합니다. 이 후 여러 사서는 왕평에 대해 씁니다.
[가정의 군사들은 모두 무너져 흩어졌으나 왕평이 거느리고 있던 1천 군사가 북을 울리고 자리를 지키니 장합은 복병을 의심하여 접근하지 아니하였다.]
이 전에도 무수한 전과를 쌓아와서 위국에서 그 이름에 위에 놓일 장군이 드문 장합과의 직접적 전투는 아닐지라도 전투 심리전에서 승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2) 장합 죽기 전 또 패배 : 4차 북벌
다시 기산으로 진출한 제갈량의 4차 북벌은 사마의와의 대결의 승패가 사서상으로 분명하지 않은채로 끝납니다. 이 4차 북벌에서는 제갈량과 사마의, 왕평과 장합의 매치업이 있었는데 하나 명확한건 왕평과 장합의 매치업에서 또 왕평이 그 장합을 이깁니다.
[장합은 왕평을 공격하였는데 왕평이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않으니 장합은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고 군량 문제로 촉이 퇴각하는 상황에 사마의가 장합으로 하여 추격하게 하고 장합은 죽게 됩니다. 하북에서부터 수많은 전공을 올려 위명이 높던 장합에게 마지막 패배를 안겨준 왕평이었습니다.
3. 제갈량 사후 왕평의 활약 : 촉의 수호신
1) 제갈량 사후 수습
https://cdn.pgr21.com/?b=10&n=317484
위연의 반란을 수습한 왕평입니다. 위 글로 갈음합니다. 요약하자면
[제갈량이 죽어 그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너의 놈들이 감히 이처럼 구느냐!]
라는 일갈로
[위연이 난을 일으키자 한번 싸움으로 패퇴시킨 것은 왕평의 공이었다.]
로 제갈량 사후를 수습합니다.
2) 독한중 왕평 : 촉의 수호신
왕평은 위연의 난 진압 후 한중에 태수로 있게되고 독한중(한중의 감독 : 사견으로는 도독을 저렇게 부르는게 아닐지.)으로 한중을 지켜 대위 방어선을 지키게 됩니다.
표시된 3로로 244년 위가 한중을 침공합니다. 기산로로 곽회, 당낙도로 조상과 하후현, 자오도로 하후패가 진격합니다. (다만 하후패의 진격은
다소 설명이 불분명합니다. 하후현이 조상과 출전했으니 하후패도 함께했을 가능성도 있다고도 하고 명확한 진격의 기록이 없기도 하구요. 일단 전투에 큰 기록이 없으니 사실상 큰 의미는 없습니다.) 이 공세의 배경은 위국의 정치상황과도 맞물려 있지만 일단
[위나라의 대장군 조상이 보병과 기병 10여만을 거느리고 한중 일대로 향하였는데 그 선봉이 이미 낙곡에 있었다. 이때 한중을 지키는 병사는 3만이 되지 못하여 여러 장수들은 크게 놀랐다.]
이니 승산 판단에 부족함은 없었겠지요. 이렇게 불리한 수세에 몰린 한중의 제장은
양평관으로 비의의 성도군이 오고있으니 한성과 낙성에서 수비를 하여 버티자는
[지금 힘이 부족한데 적을 막아야 하니, 마땅히 한성과 낙성을 굳게 지키고 도적(위군)들을 만나면 깊이 들어오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는 사이에 성도의 군대가 양평관을 족히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견을 냅니다. 이에 왕평은
[그렇지 않소, 한중에서 성도까지 가면 거의 1천리요. 위군이 만약 양평관을 얻는다면 곧 화가 되는 것이오. 이제 의당 유민의 군과 두기의 군을 먼저 보내어 흥세산을 점거하게 하고 왕평은 뒤에서 막을 터이니 만약 적이 군사를 나누어 황금곡으로 향하면 왕평이 1천명을 거느리고 내려가 그들을 맞아 싸우겠소. 이러는 사이에 성도의 군대가 도착 할 것이니 이것이 계책의 으뜸이오.]
라고 말하는데 이 계책에 위에 언급된 유민이라는 장수만 뜻을 함께했다고 나옵니다. 바로 위 지도와 그 위 지도를 함께 보면 한중의 제장들이 내세운 전략은 정말 수비적이겠지요. 양평관보다도 안쪽에 있는 한성. 그리고 당낙도와 자오도를 다 지나 한중지방 내부에 사실상 들어오게하는 낙성. 이 두 군데에서 수비를 하자고 했으니 10배의 병력도 감당 가능하다는 수성의 입장이라지만 양평관의 방어선이 한성 밖에 있고 성도의 증원군보다 곽회군이 기산로에서 먼저 도착해 양평관을 타격하게 된다면 왕평의 예상되로 흘러가게 되겠지요. 그래서 한발 앞서 야전으로 막아내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렇게 흥세산에서 유민군과 조상군이 대치하게 되고 압도적인 산맥을 넘어오는 동안 조상의 군은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그 해 관중과 저족, 강족이 군수품을 대지 못해 소와 말, 노새와 나귀가 다수 죽었고 백성과 이민족이 도로에서 울부짖었다. 낙곡으로 들어가 수백 리를 행군했을 때 적이 산에 의지해 방비하자 진군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평은
[촉의 장군 왕림(王林)은 밤에 군영을 기습했는데 사마소는 병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로 조상군을 야습 등의 방식으로 요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왕림이라고 표기가 되어있는데 이는 정설로는 왕평(平)의 오기로 추정하는 것으로 압니다.) 또한 추정으로 왕평이 하후패를 위에 언급된 황금곡같은 곳에서 요격하여 패퇴시켰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튼 흥세산에서 조상의 군세를 보급을 어렵게 만들며 버티는데에 성공한 왕평의 한중군은 성도군을 이끌고 온 비의(강유)와 함께 조상군을 토벌합니다.
[조상 등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갈때 비의는 과연 3령(낙곡의 심령, 아령, 분수령)까지 쫓아왔는데 험난하게 다툰 끝에 위나라 군대는 겨우 통과 할 수 있었다. 소, 말과 군량을 수송하던 자들 중 거의가 죽거나 실종되어 강족과 호인들이 원망했고, 관서지방이 거의 텅텅 빌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어 7-8만에 달하는 조상군은 전멸에 가까운 패퇴를 하게되고 곽회군은
[촉을 토벌하자, 곽회는 군사들을 지휘하여 선봉이 되었다. 곽회는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즉시 군사를 적지에서 탈출시켰기 때문에, 크게 패하지는 않았다.]
형세를 판단하며 진격하다 타이밍상 조상군의 진격이 늦어지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퇴각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렇게 왕평은 수하 부장 단 한명만 지지하던 전략으로 한중을 지키고 거시적으로는 촉을 수호해내게 됩니다. 244년에 조상군을 패퇴시키고 기록대로 관서지방의 자원을 마르게 할 정도로 위의 장안 지방은 힘을 잃게 만들어 위는 대촉전을 이전과 같이 방어전으로만 수행하게 되고 대촉 공세는 이로부터 약 20년뒤 낙곡전에도 참여했던 사마소가 263년 촉한멸망전을 시행하기까지 없게 됩니다. 이 낙곡전의 의미를 조금 과하게 표현한다면 제갈량 사후 10년을 한중에서 수호하던 왕평이 낙곡전을 계기로 20년간 촉한을 지키게 된 근 30년간의 대위방어를 해낸 촉의 수호신이 되었다라고도 평가할 수 있지않을까 생각합니다.
4. 결
유게 글과 저 지도를 보고 써봐야지 했다가 저 지도 훑어보느라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네요. 삼국지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저 지도는 진짜 소중한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