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너무 많이 먹었나..식곤증이 눈꺼풀을 무겁게 내리누르던 나근한 오후. 매표 여직원의 지정휴무로 인해 역시나 땜빵을 하고 있던 나는 쏟아지는 졸음과의 전투를 승전으로 이끌기 위해 타 직원들과 나와의 지정휴무 시간 오류설을 진지하게 고민중이다.
한달에 한번뿐인건 죄다 마찬가지이건만 다른 직원들의 지정휴무는 눈만 감았다가 뜨면 돌아오는 것 같은데 왜 유독 나의 지정휴무는 이렇게도 지독히 돌아오지 않는 것인가! 한달에 한번 하는 머리카락 벌초는 엊그제 다녀온 것 같은데도 그새 봉두난발인데 왜 한달에 한번 받는 월급날은 체감 시간은 6개월도 더된 것 같은데 아직이란 말인가!
조금만 더 진지하게 생각해서 개소리닷컴에 등재할 논문이라도 한번 써볼까 하는 와중에 불쑥 매표창구 구멍으로 까무잡잡한 피부의 손이 편지봉투 하나와 함께 들어온다. 열차표를 끊으려면 신용카드나 복지카드, 그것도 아니면 현금이 들어와야 당연할텐데 웬 뜬금없는 편지봉투란 말인가?
“예 어르신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다른게 아니고 내가 자수를 하러 왔어요. 허허허” “??......” 어찌 반응을 해야할지 몰라 벙쪄있는 나에게 어르신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신다. “사실은..얼마전에 내가 너무 급해서 말이지. 기차표도 못끊고 기차를 타고와서는..” 곧바로 말을 잊지 못하고 내 눈치를 살피신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어르신” “그게.. 내려서라도 말을 했어야 하는건데 맘이 급해서 그냥 가버렸지 뭐야” “급한일이 있었다면 그럴수도 있죠 뭐.. 그런데 이건 뭔가요?” 봉투가 궁금했던 나의 질문에 어르신이 눈치를 보면서 하는 말씀이.. “그게.. 아들래미한테 물어봤더니 무임승차를 하면 벌금이 10배를 물어야 한다더라고..” “자식들한테 용돈타서 쓰는데 10배를 물면 자식들 얼굴보기 부끄러워서 말이야..” “그래서 oo에서 oo까지 얼마인데 5배만 넣어왔으니 이거만 받고 좀 봐주면 안될까?” 상황을 보아하니 그 아들이 근무중 사고를 당해 급한마음에 표도 제대로 못끊고 기차를 탔는데 내려서도 언넝 병원에 갈 생각에 계산할 생각도 못하고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달려가신 거였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계속 마음에 걸려 없는 형편에 5배라도 내면 안될까..하며 미안한 마음에 자수를 하러 오신거였으니 길지 않은 매표땜빵 인생에 있어 최초라고나 할까. 아니.. 요즘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가 겪는 최초이자 최후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드님은 좀 어떠시냐 물었더니 많이 다친건 아닌데 좀 더 입원을 하고 있어야 한단다. 편지봉투 내용물도 확인하지 않은채 다시 돌려드리며 “이거 걱정하지 말고 가지고 가서 아드님 맛난거 사드리세요 어르신” “아냐 아냐. 벌금도 제대로 못냈는데 그런소리 하지 말고 그냥 받아요. 이거 그대로 들거온거 알면 아들한테 혼난단 말이지. 허허허” “아닙니다 어르신. 이거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받아야 하는게 맞는데요. 어르신이 먼저 말씀해주신게 너무 감사해서 제가 드리는거니 걱정말고 받으세요”
몇분간의 실랑이 끝에 봉투를 돌려드리는데 성공~! 물론 그 어르신의 무임승차금액은 내 지갑에서 냈지만 이런 기분좋은 벌금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낼 수 있다 생각하기에 전혀 아까운 마음은 들지 않는다. 물론 퇴근 후에 집에가서 마눌님에게 용돈좀 더 달라해야겠지만.. 흐흐흐.
갈수록 양극화니 머니 먹고사니즘에 삶이 빡빡해진 요즘. 과연 나라면 저 어르신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니 괜히 쏘주 생각만 더욱 간절해진다. 오늘 외식은 글렀으니 마눌님에게 주안상이라도 봐놓으라고 큰소리 치...기는 개뿔. 순대에 튀김이라도 2인분 싸들고 들어가야지 헤헤헤.
마눌님 저 오늘 착한일 해쪄요~ 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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