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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04 18:13
왜 지금까지 파서를 하변지역으로 알고 있었는지.. 삼국지3일때 장비가 하변태수여서 그랬나.. 글곰님 덕분에 좋은 정보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17/12/04 18:18
근데 저 한중이, 유방이 항우와 천하를 건 일전이 가능하게 할 만큼 물량을 뽑아내는 원천이었던 한중이 맞을까요?
초한지를 읽을 때는 엄청난 땅이겠거니...했는데 (게임을 할 때나) 이렇게 지도를 볼 때는 그만한 지역은 아닌 것으로 보여서요 삼국지에서도 한중왕이라고 하면서 뭔가 엄청난 것 같기는 한데...잘 감이 안오네요
17/12/04 18:28
그 한중 맞습니다.
땅이 좁아보이지만, 실제로는 비옥한 분지지형이고, 물도 풍부합니다. 게다가 경상도 정도 되는 크기의 땅이 통째로 대평야지대라 생각보다 생산량이 꽤 되죠. (저 안에서만 백만 가까운 인구가 자급자족이 가능할 만큼...) 한중왕은 지위가 아니라 그 제스쳐가 가지는 의미가 대단한겁니다. 조조 넌 찬탈한 역적일 뿐이고, 나는 한실의 정통을 이어서 고조와 같은 길을 걷겠다는 소리니까요.
17/12/04 18:33
한중이 아니라 그 위에 장안이랑 그주변 관중평야가 노다지 땅이었습니다.
사실상 항우랑 싸울때 나온 물량도 옛날 진나라 땅인 장안과 관중평야에서 나왔고요. 한중왕 선언은 "나는 유방이고, 조조는 항우다"라는 정치적 제스쳐죠.
17/12/04 18:35
한중과 관중지방의 생산력이 좋기도 했고 거기다가 소하가 정비해놓은 행정력으로 군사력과 보급을 극한까지 쥐어짜냈죠.
거기에 한신이 하북과 중원을 완전히 휩쓸어버리기도 했고 애초에 봉건제로 재정비해놓은 항우이기 때문에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은 휘하의 신하들이 이탈해버리면서 생각보다 많지 않기도 했구요.
17/12/04 19:01
아니요. 다만 탕거 전투가 워낙 큰 성과일 뿐입니다.
그 외에도 익주 평정과 남군 공략 등에서 공적을 쌓았죠. 기록에 남지 않은 군공도 많을 겁니다.
17/12/04 19:16
장비와 마초가 하변에서 패퇴하게 된게 의아하네요. 승패는 병가지상사라지만, 말씀하신대로 한중 공격을 위한 견제에 불과했기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도 없었는데 장수 목이 날아갈정도로 패배하다니..
17/12/04 19:37
근데 조조는 왜 유엽의 말처럼 한중을 정벌하고 바로 촉을 치지 않았을까요. 순욱 사후에 가끔씩 이전까지 조조가 보여준 능력에 비해 뭔가 아쉬운 판단을 한번씩 보여주고는 했는데 유비 입장에서는 입촉부터 위-오 연합 시기를 통틀어 봤을때 이 타이밍이 최대 위기였다고 생각되네요.
17/12/04 21:25
근데 한중 정벌 자체가 워낙 빡세기 때문에 조조의 판단이 꼭 틀렸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이미 병사들 체력은 바닥상태였다고 보이고요(조조도 추호행에서 힘든 심정을 노래했죠). 장안 같은 곳에서 수송하기도 쉽지는 않았을 걸로 보입니다. 실제로 유엽은 7일 뒤에 자신의 의견을 수정했다고 하네요.
17/12/04 22:58
조조는 211년에 마초와 맞붙고 212~213년에 손권과 1차유수구전투, 215년에 장로 정벌, 216년~217년에 2차유수구 전투까지 쉴새없이 싸웠습니다. 나중에 보면 판단미스일순 있는데 당시엔 시기상조라고 봐도 크게 무리는 아니었죠. 유비도 부랴부랴 형주 절반을 손권에게 양도하고 한쪽문제를 일단 해결한 상태여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겁니다.
17/12/05 09:08
유비의 복귀가 생각보다 빨랐습니다. 당장 손권과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태세로 공안까지 직접 갔던 유비는, 조조가 장로를 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당장 형주를 반 갈라서 손권에게 주고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강주까지 회군합니다. 그 판단력이야말로 유비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었지요. 형주 절반을 내준다는 게 말이 쉽지, 실질적으로 전재산의 1/4 가량을 그냥 준 것이거든요.
17/12/04 21:45
제가 어디서 보기로 장비가 장합한테 이기긴 했는데 위나라 입장에서도 완전 나쁜 입장은 아니었던게 그 지역쪽에 있는 백성들을 거의 위나라로 데리고 가서 가뜩이나 촉나라 백성들 숫자가 적은데 그때문에 더 적어졌단걸 봤는데 이거 맞는 얘기인가요?
17/12/05 09:22
우선 장합이 파 일대의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긴 건 맞습니다. 그러다 장비에게 흠씬 후드려맞고 도망쳤지요. 가이다이 님이 언급하신 일은 이후 유비가 한중을 공격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유비가 결국 승리하여 땅은 얻었지만 백성은 얻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촉서 주군전). 또 조조가 한중을 차지하고 있을 때 8만 명이나 되는 엄청난 백성들이 업이나 낙양으로 이주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위서 두습전). 물론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하지만 그건 택도 없는 소리고, 걍 반강제로 끌고 갔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하튼 유비가 한중을 탈환하기에 앞서 조조가 한중의 백성들을 빼돌린 건 사실입니다.
[(촉서 주군전) 유비가 촉군을 평정한 후에는 주군을 유림교위로 임명했다. 유비는 조조와 한중을 다투려고 할 때 이에 관해 주군에게 물었다. 주군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땅은 얻을 수 있지만 그곳의 백성은 얻지 못합니다. 만일 일부의 군대만 출정시킨다면 틀림없이 불리한 것이니, 경계하고 신중을 기해야만 합니다." 당시 주의 후부사마였던 촉군의 장유(張裕) 또한 점술에 밝았으며 천부적인 재능은 주군을 뛰어넘었다. 그는 유비에게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조조와 한중을 다툴 수는 없습니다. 군세가 반드시 불리할 것입니다." 유비는 결국 장유의 의견을 듣지 않았는데, 과연 땅은 얻었지만 백성들은 얻지 못했다. 유비는 장군 오란, 뇌동 등을 파견하여 무도군으로 들어가도록 했는데, 전멸하여 돌아오지 못했으며, 전부 주군의 말처럼 되었다. 그래서 주군을 무재(茂才)로 천거했다.] [(위서 두습전) 후에 두습은 승상장사를 겸임하게 되었고, 조조를 수행하여 한중으로 가서 장로를 토벌했다. 조조는 수도로 돌아와서 두습을 부마도위로 임명하고, 남아서 한중의 군사를 통솔하도록 했다. 그는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계도하였으므로, 백성들은 스스로 기뻐하며 고향을 나와 낙양과 업성으로 옮기려는 자가 8만여 명이나 되었다.]
17/12/04 21:47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출사는 언제쯤 마무리하실 수 있을 것 같나요?
이제 한중전 다루고 계시면 오장원까지는 대체 몇 년을 더 기다려야 (...) 나중에 몰아서 보려고 기다리고 있는 1인이라 질문드립니다.
18/03/26 13:44
예전 글 찾아보다 뒤늦게 답변드립니다만......
댓글 달아주신 때에서 3개월이 지났는데 이제야 겨우 한중공방전이 끝났습니다. 허허허. (굽실굽실) 오장원은 언제가 될른지 진짜 모르겠네요.
17/12/05 06:14
익주의 비옥함은 현기증이 날 정도네요. 대체 저 평야 안에 나라가 몇개가 들어갈지.... 그러니까 1주만 먹고도 싸움이 된 거였겠죠.
17/12/05 08:09
장비가 장판파에서 만인지적으로 유명해졌지만 탕거 전투에서 그의 전술적인 능력도 잘 드러나죠. 탕거 전투 부분은 읽은지 오래되서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장비가 파서와 탕거 지방 백성들을 통해 길을 전부 파악하고 꿰뚫었을 정도로 굉장히 세밀하고 조심성 있던걸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하변에서는 왜 그러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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