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7/12/05 03:34:19
Name 부끄러운줄알아야지
Subject [일반] 어느 역무원의 하루 - 회상(1)
지금으로부터 벌써 40여년 전,,제가 5살 꼬꼬마 시절 이야기입니다.


6살때 부모님을 전부 다 잃고 국민학교도 채 다 마치지 못하신 우리 아버지가 그나마 돈좀 벌어보겠다고 남에 땅을 빌려
반 머슴격으로 수박, 감,포도, 도마도 등등 여러 과수원을 하시다가 결국에 모두 망해 과수원에서도 쫒겨나시고는,
결국엔 리어카 하나를 끌고 하루종일 고물을 줏어다가 팔아 어머니와 누나, 저, 그리고 막내 등 우리 다섯 식구를
먹여살리던 시절..

남에 집 셋방살이,,한겨울에도 연탄 한장으로 하루를 버텨야 하는 우리집에 테레비가 있을턱이 만무했죠.

그래서 생각해 낸 꾀가..나랑 동갑이었던 주인집 아들래미와 친하게 지내기.
저녁 다섯시 반(이시간부터 테레비에서 만화를 했던게 맞나요? 기억이 가물가물..)부터 시작하는 만화 몇편을
같이 보기위해 말이 친한척이지 요즘말로 하면 거의 따까리라 불려도 무방할만큼 대장처럼 모시고 지냈더랬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말처럼 쉬운게 아니라서..
술래잡기, 망까기, 다방구,,등등 무슨 놀이를 하건 져줘야만 했던 그 상황..가끔 우리 편이 너무 잘해서 본의아니게
놀이에 이기기라도 하는 날엔 뒤끝이 장난아니었던 그놈은 주인집 방문을 꼭꼭 끌어닫은채 마치 약을 올리듯이
소리만 왕창 켜놓고선 혼자 테레비를 봅니다.

소리라도 안들리면 좋으련만 크게 틀어놓은 볼륨에 머리속으로는 엄청나게 재미있을듯한 상황이 마구 마구 상상이 되고
보고싶어 안절부절하다가,,끝내 참지 못하고 주인집 안방 문 앞으로 조용히 다가갑니다.
그당시엔 지금처럼 원목으로 만든 문이 있을리가 없죠. 한지를 붙여만든 양쪽으로 밀어서 드나드는 한지 문짝..

신혼 초야를 훔쳐보는 하객도 아닐진데 혹여나 들킬새라 최대한 조심조심 다가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창호지에 구멍을 한개 내고서는 전투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썩소를 지으며 만화를 훔쳐봅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더군요.
밖에서 훔쳐볼것이란걸 예상이나 했다는듯이 바로 저는 응징을 당합니다.
제가 내놓은 구멍으로 손가락을 찔러넣어 지금 시대로 따지면 최소 전치 2주에 해당하는 테러를 가한거죠.
눈의 아픔도 아픔이지만 그 재미나는 만화를 볼수 없다는 실망감에 목놓아 엉엉 울며 엄마에게로 달려갑니다.

자초지종을 듣고나신 우리 엄마..
장롱 어딘가를 뒤지는가 싶더니 저를 업고 30분이 넘도록 걸어가야하는 읍내를 한달음에 달려가십니다.
영문도 모른체 아픈 한쪽눈을 만지며 업혀가던 제가 '비가 오는가?'착각했던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소리없이 우시던 엄마의 눈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암튼 이렇게 해서 장만하게 된 흑백 테레비.

하늘을 날듯 기뻣고, 동네 친구를 만날 때마다 자랑을 해댔으며, 그 후 보름정도를 김치와 간장뿐인 밥상에도
불평한마디 없이 한 공기를 맛나게 비웠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테레비가 생겼다는 흥분에 잠도 제대로 오질 않아 내일 아침엔 어떤 만화부터 볼까 하며 나름 고민을 하던 오밤중,
우리 형제들 몰래 끌어앉고 우시던 부모님은 왜 저렇게 우시나..하며 이해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요.

세월이 흘러 그 다음해 딸랑 이불 한채만을 가지고 서울로 상경할때도 재산목록 1호였으며.
서울 상경 13년만에 무당이 살던 집을 사서 새 칼라테레비를 들일까지도 저를 울고 웃게 만들었던 그 흑백테레비.

어린시절 최고의 친구였으며 세상 무엇과도 바꿀수 없던 그 테레비젼..

울 아부지 하루종일 힘들게 고물모아 팔아모든 두달치 댓가인것을 알았더라면 과연 그래도 그렇게 기뻐하며 즐거워했을지
궁금해집니다.

철없는 아들래미 쥔집 테레비 몰래 훔쳐보다 손가락에 찔려 벌겋게 충혈된거 보시곤 앞뒤 생각안하신채 바로 저를 업고
한달음에 읍내까지 달려가셨던 우리 어머니.

그 추운 한겨울에 하루종일 얼은 손,발 비벼가며 힘들게 고물모아 모은 돈을 상의한마디 없이 테레비 산거 아신 후에도
오히려 타박보단 없는자의 설움에 어머니 끌어안고 자식들 몰래 소리없이 흐느끼시던 우리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파르티타
17/12/05 07:59
수정 아이콘
어휴... 아침부터 눈물이.
원해랑
17/12/05 16:19
수정 아이콘
요즘 들어 자꾸... 그 때 부모님이 그랬구나 싶은 생각이 자주 듭니다.
문득 기억 속 그 시절의 부모님이 지금의 나보다 어렸었다는 걸 안 다음부터는
더더욱 많은 생각이 들더군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4861 [일반] [뉴스 모음] 이국종 소령님의 관등성명과 '대통령 각하' 외 [13] The xian13688 17/12/05 13688 32
74860 [일반] 국회 의사당은 지금 + 수정 예산안 통과 [54] 길갈9793 17/12/05 9793 4
74859 [일반] 시인의 싸움 [46] 써니10099 17/12/05 10099 17
74858 [일반] 다이어트에 대한 소고 [28] 영혼6478 17/12/05 6478 4
74857 [일반] 국민의당 최명길 의원 의원직 상실 - 내년 6월 보궐선거 [31] 사업드래군9794 17/12/05 9794 2
74856 [일반] "여성 없는 천만 영화" 기사를 보고 [79] 마스터충달14236 17/12/05 14236 50
74855 [일반] 다이어트 후기 [33] The Special One7123 17/12/05 7123 8
74854 [일반] 지도로 보는 낙곡대전 [10] 유스티스12860 17/12/05 12860 3
74853 [일반] (교육) 우리 동네는 왜 세계사 수업을 늘 설렁설렁 나가는 건지 [22] 9년째도피중6002 17/12/05 6002 2
74852 [일반] 공감을 넘어서 이해가 필요한 이유 [9] VrynsProgidy5519 17/12/05 5519 12
74851 [일반] 정부의 폐쇄적인 비트코인 방향성 [54] Ko코몬8876 17/12/05 8876 1
74850 [일반] 문득 든 생각인데 군필자에 대한 세제혜택을 주는건 어떨까요? [151] Chandler10304 17/12/05 10304 2
74848 [일반] 박진성 시인은 죄가 없습니다. [114] 써니13965 17/12/05 13965 22
74847 [일반] 오프라인 강연 정보, 어디서 얻을까? [11] 윌모어9268 17/12/05 9268 18
74846 [일반] 1호선은 고통입니다 [16] 다크템플러7842 17/12/05 7842 1
74845 [일반]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광고를 보며 [26] 717107232 17/12/05 7232 1
74844 [일반] 어느 역무원의 하루 - 회상(1) [2] 부끄러운줄알아야지3676 17/12/05 3676 21
74843 [일반] 북한의 핵보유국를 용인하려는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의 고민 [73] 군디츠마라11681 17/12/04 11681 5
74842 [일반] 어느 역무원의 하루 - 자수 [14] 부끄러운줄알아야지5372 17/12/04 5372 40
74841 [일반] 공공기관의 신뢰도와 이미지 지형도가 나왔습니다. [62] 아유12505 17/12/04 12505 11
74840 [일반] 귀여운 단편 애니 하나 'The Summoning' [7] 인간흑인대머리남캐6405 17/12/04 6405 2
74839 [일반] (삼국지) 탕거 전투 - 장비 일생일대의 대승 [38] 글곰16943 17/12/04 16943 30
74838 [일반] 어느 페미니스트의 글에 대한 생각 [37] 로빈9231 17/12/04 9231 2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