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때였을까, 임산부 체험 경험이랍시고 이상하게 생긴 체험복을 입고 한 교시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임신을 하면 이렇게 몸이 무겁다, 배가 아프다, 뭐 그런 취지의 교육이었는데, 그 때 조장이랍시고 대표로 임부복을 입고, 수업을 듣고 청소를 해봤던 내가 느낀 솔직한 심정은 이랬다. 이거 별로 안 불편하네. 그냥 책가방 무겁게 멘것보다도 못한데?
좀 더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초등학생때, 역시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시각장애인 체험학습이랍시고 책상을
밀어 도로를 만들고, 안대를 끼고 교실에서 특정한 장소에서 장소로 이동하는 수업을 했었는데, 그것도 역시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안대를 쓰기전까지 주요 위치를 사실은 멀쩡한 내 두 눈으로 다 보고 외웠으니까, 그냥 무슨 술래잡기 놀이의 룰, 재미거리에 가까웠을뿐.
이때 나에게 누가 [이제 임산부, 시각장애인이 얼마나 힘든지 체험해보니 알겠지]? 라고 물어보면 나는 '그렇다' 라고 답했을것이다. 일단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다 했고, 체험해 본 결과 일상적인 나의 생활보다야 당연히 불편했으니까. 일단 나는 내 입장에선 그들과 공감한것이다. 아 그들은 이 정도 불편하겠구나, 하고 말이다.
물론 실제로는 그때 내가 겪은 불편은 임산부, 시각장애인들이 실제로 겪는것의 일만분의 일도 되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공감을 유일한 수단으로 삼을 경우, 애석하게도 나는 그 나머지 구천구백구십구를 채울 방법이 없다.
최근에는 임산부 체험복이 기술적으로 발전해서 태아가 발차기도 하고 역한 느낌도 준다고 들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실제 생명이 내 배속에 숨쉬고 있다는 사실과 엉망이 되는 호르몬 분비 등을 재현 할 수는 없다. 많이 쳐줘야 오백이나 될까 싶다. 시각장애인 체험도 이미 정상 시력으로 25년 넘게 살아온 내 입장에선 원래 어두운 세상이 얼마나 그들에게 공포스럽고 불편한것인지, 이제와 안대를 쓰고 1달을 산다고 해서 얼마나 그들과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역시나 택도 없다.
SF 작품에나 나올법한 감정 동기화 기계라도 발명되지 않는한, 공감이란 예시처럼 극단적이진 않아도 대체로 이런식으로 작동한다. 내가 겪은것에는 바다처럼 깊어지고 UHD TV처럼 선명하지만, 겪지 못한것은 옅기도, 흐리기도 할 뿐더러 아예 둥그런 꼴을 네모낳게 느끼기도 하고. 존재하는것을 모르기에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이것을 올바른 공감, 그릇된 공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천명이 있으면 천가지 삶이 있고, 느낌은 개인이 살아온것과 타고난것에 의해 다양하게 드러나는것이 당연한거니까.
그렇다면 나는 평생 임산부, 시각장애인들의 고통을 이십오분의 일로 축소시킨 불공평하고 이상한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 다행히 그렇지 않다. 우리는 공감이 아닌 이해를 통해, 그들의 실제 불편량인 일만을 거의 근사치까지 추측 할 수 있다.
다시 임산부 체험복을 입고 수업을 받는 나에게 돌아가보자, 수업시간 동안 초빙 교사님은 산모가 겪는 불편에 대해 이것저것 나에게 알려주셨다. 어떻게 아이가 생기고, 어떠한 신체적 정신적 변화가 생기고, 신경써야 할 것은 무엇이고, 그래서 이러한 점을 사람들이 배려해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시각장애 체험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헬렌 켈러의 이야기를 소개해주며, 시청각적인 장애가 있을 경우 무언가를 알게 되는것조차 쉽지 않다는 것, 우리가 가볍게 지나칠만한것에도 그들은 크게 당황하고 불편할 수 있다는것을 알려주셨다.
이러한 사실과 지식을 바탕으로, 나는 그들이 겪는 불편을 머리속에서 구성한다. '나도 당해보니 이렇더라' 정도의 역할뿐이던 체험복과 안대도, 공감이 아닌 이해의 과정에서는 구성 과정에서 대단히 큰 기여를 해낸다. 여전히 그들의 기분과 느낌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입장에 대해 아는것이 많아질수록,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의 서고에서 모양과 크기 비슷한것을 더 정확히, 많이 골라낼 수 있게된다.
그렇게 시작된 이해의 역사는 수업이 끝나고도 계속된다. 엄마의 배에 난 제왕절개 자국, 지하철의 툭 튀어나온 노란 레고 비슷한 블럭들을 보며 나는 그들을 더욱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게된다. 여전히 그것은 재구성된 사진일뿐 실제가 아니지만, 공감이라는 스케치북에 멋대로 그린 상상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디테일하고 선명하다.
공감에도 장점이 없는것은 아니다. 공감은 이해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르니까. 내 주위 가까운 사람의 심적인 변화에 대응하거나, 안타까운 비극을 위로하는데는 발 느린 이해보다는 공감이 더 효과적이고 필요할 수 있다. 이유가 무엇이 됐건 구슬피 우는 사람에게는 안아주고, 어깨를 두드려 주는것이 제일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경우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심도깊은 이해 과정 이전의 임시방편이 되어야 한다. 나를 위해서도 상대를 위해서도 어느 순간에는 이입의 고리를 끊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기 위해 사고의 방향을
조심스레 돌릴 필요가 있다.
감정은 항상 옳지도 않고, 그 방향이 일정하지도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파괴적인 힘을 숨기고 있다.
하물며 내 것조차 아닌 감정에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매몰된다면, 그래서 그것이 나의 행동의 유일한 근거가 된다면, 정신을 차렸을때 나는 이미 수십명의 사람들이 내 손에 의해 떠밀려 죽어간 절벽에서 돌이 킬 수 없는 마지막 걸음을 내딛고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