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7년, 한반도의 새해는 음울하게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전 해는 음울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고려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고, 사람들의 생활을 지옥으로 이끌고 있던 왜구의 침입은 이미 수십년째 이어지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1376년, 최영은 노구를 이끌고 '홍산전투' 에서 왜구를 상대로 악전고투하며 승리를 거두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적의 기세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76년 10월, 왜구는 매복작전을 펼치던 고려군의 계획을 알아차려 오히려 역공을 퍼붓어 고려군을 패퇴시켰습니다. 11월, 경남 거제로 침입해온 왜구들은 함안(咸安)ㆍ동래(東萊)ㆍ양주(梁州)ㆍ언양(彦陽)ㆍ기장(機張)ㆍ고성(固城)ㆍ영성(永善)를 모두 불바다로 만들어버렸습니다. 12월, 경상남도 합포의 고려군영이 왜구의 침입으로 불타올랐습니다.
당시 원수로 있던 인물은 김진(金縝)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적을 막기는 커녕 늘 얼굴이 반반한 기생을 뽑아 군중에서 주색잡기만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늘 '소주' 를 마시고 취해 휘하 군졸들에게 극도의 모욕을 가하기 일쑤였는데, 왜구가 쳐들어오자 병사들은 "원수의 '소주패' 를 내보내 적을 막으라. 우리는 싸울 생각이 없다." 며 태업 행위를 벌였고, 이로 인해 의창(義昌)ㆍ회원(會原)ㆍ함안ㆍ진해ㆍ고성ㆍ반성(班城)ㆍ동평(東平)ㆍ동래ㆍ기장 등은 제대로 된 싸움조차 해보지 못하고 모두 노략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연간 왜구의 침입 숫자 <경인년 이후의 왜구>와 마쓰라토(松浦黨) 中 ─ 이영
끊도 없는 왜구의 숫자, 갈수록 강력해지는 적의 군세, 지방 장수들의 한심할 정도의 무능, 부패. 이 모든 악재가 혼재하는 상황 속에서 1377년의 해는 비틀거리듯 한반도에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첫 해가 지기도 전에 왜구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경남 합포 지역 지도. 훗날 이순신이 이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습니다.
77년 1월, 왜구는 다시 한번 합포의 고려군영을 향해 쳐들어왔습니다. 합포는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일본 본토나 대마도 등에서 바다를 건너온 왜구가 남해를 거쳐 서해안으로 가기 위한 관문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십년 왜구의 침입 동안 셀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침입을 받았고 헤아리기도 힘든 수준으로 피해를 받았습니다. 1374년에는 합포의 고려군영이 습격 당해 무려 5,000여명이 전사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입은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고려군도 바보가 아닙니다. 적이 셀수도 없을 만큼 쳐들어왔으니, 그만큼 대비를 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자 왜구는 합포의 고려군과 직접 맞대결을 펼치는 대신, 회원창(會原倉)을 털어갔습니다. 회원창은 달리 석두창(石頭倉)이라고 했는데, 경상도 동남부지방의 세곡을 수납하여, 남해안·서해안의 해로를 이용, 예성강 입구의 경창(京倉)에 납부하는, 고려 13조창(漕倉) 중 하나였습니다.
즉 경상도의 세곡을 보관한 곳이었고, 조정의 재정을 담당하는 곳이자 병사들의 군량을 담당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곳이 적에게 약탈 당한 것입니다. 분명히 고려군은 자국에서 싸우고 있고, 왜구는 바다를 건너 쳐들어오고 있지만, 고려군은 자기 땅에서 식량이 부족해 굶주리고 왜구는 적의 땅에서 배불리 먹으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내륙으로 끝없이 진군하는 왜구
2월, 왜구는 신평현(新平縣)을 공격했습니다. 신평현은 오늘날의 충남 홍주에 해당합니다. 이 곳을 침공한 왜구는 양광도 도순무사였던 홍인계(洪仁桂)에게 패퇴 당해, 홍주를 휩쓰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침공이 저지되었다고 하면, 적이 다시 바다로 물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았습니다. 홍주에서 저지 당한 왜구는 오히려 더욱 더 고려 내륙을 향해 진군했고, 경양(慶陽)을 쳤습니다. 경양은 오늘날의 충남 천안 시 입니다. 오늘날 충청남도 최대의 도시도 왜구에게 유린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왜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급기야 평택현(平澤縣)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평택은 말할것도 없이 오늘날의 경기도 평택시입니다. 양광도 부원수였던 인해(印海)가 적을 막기 위해 나섰으나 되려 적에게 패배했고, 이 지역은 송두리째 적에게 불타오르고 백성들은 도륙되었습니다.
3월, 왜구는 다시 한번 서해의 바다에서부터 침공해왔습니다.
왜구의 군대는 강화도를 공격했는데, 강화도는 왜구의 공세 때 가장 많이 적에게 공격을 당한 지역 중 하나로써, 그때그때 고려군이 다시 회복하곤 했지만 중간중간 바다를 건너온 왜구들이란 왜구는 다 모여있는 '왜구 소굴' 로 변모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때의 침공 당시, '고려사 최영전' 의 기록에 따르면 강화도에는 큰 전함 50여척과 전투병 1천여명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왜구가 쳐들어오자 만호 김지서(金之瑞), 부사 곽언룡(郭彦龍) 등은 싸움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허겁지겁 강화도에 있는 마니산으로 도망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지서의 부인이 왜구에게 납치 되었고, 왜구에게 강간 당하지 않으려고 도망치던 처녀들 여러명이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마니산. 당시 산으로 피했던 사람들은 이 위치에서 저 아래의 마을, 밭이 불타오르고 노략질 당하는 광경을 지켜봤을듯 합니다.
한반도 본토와 코앞인 강화도가 불타오르고 있을때, 강화도와 내륙 사이를 잇는 착량(窄梁) 어귀에는 50여척의 고려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담당하는 장수의 이름은 손광유(孫光裕) 였습니다.
당시 고려의 군사 작전을 주재하던 최영은, 애초에 손광유에게 단단히 일러 둔 참이었습니다. "절대로 착량 어귀에서 벗어나지 말라. 해당 근처에서 주둔하며 적에게 위엄만 보이며 공격을 방지하는 역할만을 하라. 큰 바다로 나가지 말아라." 고 말입니다. 당시는 최무선의 화포가 전투에 실전배치 되기 이전이었고, 고려 수군은 왜구와의 수차례 대결에서 끊임없이 졸전을 거듭하는 형국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인천 앞바다는 조금의 과장도 없이 '왜구의 소굴' 이었습니다. 이미 재해권을 모조리 상실한 고려 수군의 상황을 생각하면, 큰 바다로 나가서 왜구와 대결하는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최영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손광유는 착량 어귀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술을 잔뜩 마시고 곯아 떨어졌고, 그대로 날이 점점 저물기 시작할 즈음 왜구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다가 낮같이 밝았다. 죽은 사람이 천여 명이 넘었다.(海明如晝 死者千餘人) - 고려사 최영전
고려군의 함선 50여척은 밤의 해안에서 모조리 불타올랐습니다. 제대로 저항조차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전사자는 무려 천여명을 넘어가는 수준이었습니다. 착량에서 압도적인 대승리를 거둔 왜구는 이제 내륙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의 김포 지역인 수안현(守安縣)·통진현(通津縣)·동성현(童城縣) 등이 모두 왜구의 노략질에 처참하게 황폐화 되었습니다.
적은 이에 강화를 버리고 물러나서 수안현(守安縣)·통진현(通津縣)·동성현(童城縣) 등지를 노략질하였으니, 지나가는 곳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 고려사절요 1377년
(왜구들이 떠들어대길)"막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이 땅이야말로 참으로 낙원이 따로 없구나!" (無人呵禁, 誠樂土也)
당시 환갑의 나이였던 최영은 경복흥, 이인임 등과 함께 현장에 나와 본영을 꾸리고 작전을 짜다가, 참담한 상황을 생각하자 슬픔과 분을 참지 못하고 급기야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구가 이토록 잔혹하게 활보하는데, 원수된 자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倭寇肆虐如此, 元帥擧何顔乎)
지난 반세기 동안 고려를 위해 싸워왔고, 바로 직전해에 화살이 입술을 맞혀도 분투했던 무장조차도 쏟아오르는 분노와 풀 수 없는 무력감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각, 같이 왔던 다른 장군 석문성(石文成)은 "노래 잘하는 기생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강화도를 장악하고, 인천 앞바다를 통해 수도권을 바로 코앞에서 위협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조정 최고 대신들이 전장에 나와 있을때, 남쪽에서부터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가히 절망적인 이야기 였습니다.
慶尙道元帥禹仁烈報
경상도 원수 우인열이 보고하기를
"倭賊自對馬島蔽海而來 帆穡相望 已遣兵分守要衝然 賊勢方張 防戍處多 以一道兵分軍而守 勢甚孤弱 請遣助戰元帥 以備要害"
"왜적이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덮어 와서 돛과 돛대가 서로 이어질 정도입니다. 이미 군사를 보내어 요해처를 나누어 지켰으나 적이 형세가 성대하고 방어할 곳이 많아서 한 도의 군사로써 나누어 지키기에는 형세가 심히 위태롭고 약하니 조전원수를 보내어 요해처를 방비하게 하소서." 하였다.
時江華之賊 逼近京都國家備禦不暇 又得此報 罔知所爲
이때에 강화에 있는 왜적이 서울에 아주 가까이 밀어닥쳐서 국가에서 방비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또 이 보고를 받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4월, 경상도 원수 우인열은 절망 그 자체에 가까운 보고를 올렸습니다. 대마도에서부터 바다를 뒤덮는 수준의 왜구 함선이 출동했으며, 곧 경상도 지역에 도착하기 직전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경상도 지역에도 어느정도 병력은 있지만, 이 정도의 대규모 병력을 상대한 전력으론 어림없었습니다. 때문에 지원을 요청하는 보고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강화도의 왜구들이 다름아닌 수도를 노리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본래 현장 지휘는 은퇴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최영을 비롯해 경복흥, 이인임 등의 최고 대신들 마저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와 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남쪽으로 보낼 군사는 없었습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고려의 지도부는 그야말로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결국 아무런 대비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바다를 뒤덮는' 왜구 함선은 현재의 울산인 울주 지역에 상륙했습니다. 병력이 터무니 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우인열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최대한 시간을 끄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우인열은 울산에서 소규모 전투를 치뤘으나 패배했고, 밀양까지 밀려난 뒤에 다시 싸웠지만 또 패배해서 휘하의 최방우(崔方雨) 등이 전사했습니다. 다시 현재의 창녕 부근까지 밀려와서 또 전투를 치뤘으나 여전히 힘겨웠습니다.
우인열은 전투에서 얻은 말이나 보물이 있으면 이를 사졸들에게 전부 나눠주면서 독려했고 최대한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이쪽이 적군 십여명에서 수십명을 죽일때 아군이 수십여명이 죽어나간다치면, 우리군은 숫자가 빠르게 줄어드는데 적군은 언발에 오줌누기 수준으로 티도 안나는 정도의 압도적인 전력차라 도저히 대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 겨우겨우 전투를 치룰때마다 쭉쭉 내륙으로 밀려나갔고, 왜구는 그 상태에서 다시 병력을 나눠 일부는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 지역으로 가는 한편, 다른 일부는 경주 지역 등 경상도 내부를 휘저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셀수도 없는 지역이 노략질 당했고, 셀수도 없는 사람들이 도륙 당했습니다.
그러나 최영의 주력군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경상도 지역의 왜구가 점점 내륙으로 들어오는 동안, 강화도 지역의 왜구도 점점 더 내륙으로 들어왔기에 서강(西江) 지역에서 전투를 펼쳐 적을 몰아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왜적이 여미현(餘美縣)을 침범하였다.(倭寇餘美縣)
고려의 주력군이 강화도 - 김포 주변에서 왜구와 대치하며 전투를 펼칠 무렵, 자연히 약화된 한반도의 허리쪽으로 다시 한번 왜구들이 들어왔습니다. 현재의 서산 지역으로 왜구가 쳐들어왔던 것입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왕안덕(王安德)을 장수로 파견해 어떻게든 이를 저지해보려 했습니다. 왕안덕은 몇차례 소규모 승리를 거뒀지만, 이번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왜구는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로 돌아가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더 내지로 이동했습니다. 현재의 서산 지역을 거쳐 당진 지역으로, 이후에는 천안 지역으로, 이후에는 경기도 안성까지...
그리고 그럴수록 오히려 더 군세도 늘어났습니다. 분명 처음 서산에서만 해도 왕안덕이 공격해서 안성 부근에까지 이르자 적의 군세가 너무도 강대해져 왕안덕은 도저히 더 진군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수원(水原)에서 양성(陽城)·안성(安城)까지의 고을들은 모두 인적을 볼 수 없는 폐허가 되어버렸다. - 고려사 왕안덕전
이렇게 제대로 전투를 치룰 수 없는 상황 동안, 수원 ~ 안성 지역 등은 왜구에게 모조리 초토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정보도 얻을 수 있었는데, 왜구의 이 공격은 강화도의 왜구와 같이 펼쳐는 양동작전으로, 최영이 이끄는 주력군이 충청도와 경기남부로 남하하면 그 틈에 수도 개경을 함락시키려는 대전략이었다는 것이 포로의 입에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충청도에서 경기남부로 군사를 보내는 것만 해도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니, 저 멀리 경상도 지역에 보낼 군세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굳이 경상도 뿐만이 아니라, 이미 전국토가 불타오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왜적이 강화로부터 양광도 바닷가의 고을들을 쳐서 함락시켰다. 이전에 적선이 겨우 22척이었는데 우리 전함을 빼앗은 것이 많아 50척이나 되었다. (倭自江華攻陷楊廣道濱海州郡 初賊船僅二十二艘 奪我戰艦 多至五十艘)
강화도 부근에서 왜구와 고려군의 대치가 이어지는 동안, 강화도의 왜구들은 일부 병력을 따로 추려 함선에 태워 충청도 - 경기남부 지역의 해안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모조리 초토화 시켰습니다.
비슷한 무렵, 왜선 50여척이 새롭게 나타나 다시 한번 강화도를 불태워버리고 부사 김인귀를 죽였으며, 무려 수졸(戍卒) 천여명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열명이나 백명도 아니고 천명이나 되는 병사를 포로로 잡아갔으니 어마어마한 일이었습니다.
왜적이 신주(信州)ㆍ옹진(甕津)ㆍ문화(文化) 등 현을 침범하니 원수 조인벽ㆍ나세ㆍ심덕부가 적과 싸워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더 보내 주기를 청하였다. (倭寇信州甕津文化等縣元帥趙仁璧羅世沈德符與戰不克 請濟師)
그 해 6월, 왜구는 좀 더 북상하더니 황해도로 쳐들어왔습니다. 왜구는 옹진, 신천 등을 공격했고 이에 조인벽, 나세 심덕부 등이 적과 맞서싸웠으나 패배, 조정에 지원병을 요청했습니다.
같은 시기, 남해안에서 왜구들이 전라남도 순천지역으로 침입, 낙안까지 침공했습니다. 이에 장군 정지가 나서 적과 교전을 펼쳐, 겨우 적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황해남도를 거친 왜구들은 9월 경 현 황해북도 지역까지 이동해, 평산 지역을 공격합니다.
왜적 2백여 척이 제주를 침범하고 또 영강(永康)ㆍ장연(長淵)ㆍ풍주(豐州)ㆍ안악(安岳)ㆍ함종(咸從)ㆍ삼화(三和)ㆍ강서(江西) 등 현을 침범하였다. (倭賊二百餘艘 寇濟州 又寇永康長淵豐州安岳咸從三和江西等縣)
또한 이 무렵 200여척의 왜구 함선이 제주를 침범했고, 수 많은 지역을 유린했습니다.
1377년 3월 ~ 9월 경까지의 상황을 아주 대략적으로 간략하게 표시한 그림. 실제로는 훨씬 많은 지역이 왜구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강화도도, 경기도도, 경상도도, 충청도도, 황해도도, 제주도에도 왜구의 발길에 유린되었습니다. 막으려고 해도 어디를 막아야 할지 모릅니다. 지원군을 보내려고 해도 어디를 먼저 보내야 할지 모릅니다. 그야말로 재앙이었습니다. 이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진지하게 '수도 천도 논의' 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수도 천도가 가당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분위기에 말려들어 감히 반대를 못하는 것을, 오직 최영 한 사람만이 적극적으로 나서 간신히 저지시켰을 뿐입니다.
그래도 이 상태에서 가장 위급한 지역을 꼽자면, 바로 경상도 지역이었습니다. 충청도 등을 치는 왜구등은 강화도의 왜구와 한패라고 보면 될테니, 여기를 막아서 쫒아낼 수 있다면 일단 물러나게 할 수 있습니다. 전라도에선 정지가 제법 성공적인 저항을 펼쳤습니다. 황해도에서는 패전을 하는등 전황이 어두웠지만 나세 등이 군사를 이끌고 어떻게든 대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상도에서는 압도적인 적의 전력에 우인열 등이 계속해서 밀리고만 있었을 뿐입니다.
경상도 지역의 왜구 침공은 3월에 시작되었는데, 우인연을 달이 넘도록 필사의 저항을 펼치며 적의 발목을 잡으면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고려 조정에선 무려 두달이 걸린 끝에 겨우 경상도로 보낼 군사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군사를 이끄는 장군은 바로 이성계 였습니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이성계 개인의 '친병' 이 다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를 다룬 '고려사 우인열전' 을 보면,
'우리 태조가 평소 인심을 얻었고 군사들도 정예병이었으므로 싸울 때마다 승리하니 각 고을에서 가뭄에 비구름을 바라보듯 태조를 앙망했다.'
인심을 얻었다는 부분 등은 조선 태조를 추켜세우는 묘사라고 쳐도, '태조의 군사들이 정예병이어서' 같은 이야기는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서 병사를 받아서 거느리고 갔다면, 굳이 나올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뒤이어 나오지만 이때 불과 20세였던 훗날의 정종 이방과가 이성계와 같이 이 전투에 같이 참전하기도 했던 것을 보면, 당시 조정에서 병력을 따로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성계의 친병 위주로 구성된 병사를 이 전투에 투입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성계가 출전하는 무렵에는 그때까지 끈덕지게 버티던 우인열도 완전히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라, 쉴새없이 끊임없이 비보(飛報)를 올렸고 이에 이성계도 밤낮으로 말을 달려 남부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이성계가 현장에 도착했을 무렵, 대마도에서 울산을 거쳐 움직였던 왜구들은 이제 지리산까지 도달한 상태였습니다.
양군은 지리산 아래쪽에서 2백여 보(步) 거리를 두고 대치했습니다. 이때, 왜구 중에 한 명이 도발을 하려는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궁뎅이를 내밀고 두들기면서 욕설을 해대자, 격분한 이성계는 그 자리에서 편전을 꺼내 화살을 쏘아 도발하던 왜구의 엉덩이에 적중시켰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왜구가 당황할때, 이성계군은 공격을 시작했고 적을 한번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초반에 밀렸다곤 해도 적의 숫자는 여전히 많았는데, 적군은 기세를 내주자 지리산 쪽으로 몸을 피해 높은 산쪽에 진을 차렸습니다.
'적의 무리가 낭패를 당하여 산에 올라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 임(臨)하여 칼과 창을 고슴도치털처럼 드리우고 있으니, 관군(官軍)이 올라갈 수가 없었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
이때 이성계는 먼저 자신은 산아래에 머물고 휘하의 비장을 시켜 적을 물리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상황을 보고 온 비장은 "바위가 높고 가팔라서 도저히 말이 올라갈 수가 없다." 며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전했습니다. 이성계 휘하의 친병이라면 주로 기병 전력으로 구성되어 있을테니, 산악전은 여러모로 껄끄러웠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성계는 비장을 한번 꾸짖고는, 이번에는 자신을 따라온 아들 이방과에게 부하들 중에서도 특별히 용맹한 부하를 붙여서 적을 살펴보게 했는데, 이방과 역시 돌아와서는 비장과 마찬가지로 "어려워 보인다" 는 의사를 전했습니다.
화가난 이성계는 "그렇다면 내가 직접 가겠다" 며 자기가 대장으로 나서서, 산악지대고 뭐고 앞뒤 가리지 않고 적의 방진에 그야말로 탱크처럼 기병을 이끌고 막무가내로 돌진하니 적 왜구 중에 절반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절벽에서 떨어져서 죽어나갔다고 합니다. 작전이고 뭐고 할것도 없이 휘하 친병들의 전투력으로 막무가내로 왜구를 문자 그대로 갈아버린 셈입니다.
이렇게 장장 2개월 간 경상도 전지역을 초토화시킨 왜구를 한방에 전멸시키고 귀환한 이성계는, 곧이어 또다시 출동 명령을 받았습니다. 지난 6월 무렵부터 계속해서 조정이 원군을 청하는 황해도의 나세, 심덕부 등이 또다시 지원 요청을 절실히 조정에 바라자 조정에서 이성계를 이 지역에 원군으로 파견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최남부 즘에서 전투를 펼친뒤 몇달 되지도 않아 다시 한반도 북부로 북상한 이성계는 해주(海州)에서 펼쳐진 일대 회전에서 왜구를 크게 쳐부수는데 성공합니다. 살아남은 왜구들은 험한 산세도 들어가 바리케이트를 치고 버텼는데, 이에 이성계는 화공을 퍼붓어 적을 산채로 불태워버리고,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고기를 뜯고 술을 마시는 패기를 부리며 적을 전멸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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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의 전투를 일전에 다룬글.
이렇게 되어 역시 6월부터 8월경까지 황해남도-북도 지역을 초토화 시키고 조인벽, 나세, 심덕부, 임견미, 변안열, 유만수 등 6명 이상의 장수를 투입하고도 해결이 안되던 황해도 지역의 왜구 역시 한번에 때려부수는 성과를 이뤄냅니다.
물론 이런 활약에도 왜구는 한번에 소탕되지 않았고, 바로 9월 경에 전남 영광, 함평, 전북 고창, 황해북도, 경상남도 등을 계속해서 공격해왔고 11월 경에는 130여척의 함선이 김해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380년 진포-황산전투, 1383년의 관음포 전투 이전까지는 계속해서 이런 위기일발의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왜구의 대병력이 수도 개경을 직접적으로 노리고 진군했던 1278년의 왜구라던지, 보병 2천, 기병 700명 총합 2,700명의 병력이 한반도 내부를 휩쓸고 다닌 1379년의 왜구라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