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독후감을 한 번 써봤습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4차산업혁명에 관심을 갖게 된 1인인데, 얼마 전 읽은 테드 창의 소설과 엮어서 작성해 보았습니다. 잘못된 사실이 있거나, 혹은 참고할 만한 자료가 있으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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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 테드 창, 「인류과학의 진화」
- 알파고와 인간의 일. 그리고 SF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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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2016년) 봄 충격적인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알파고라는 인공지능이 이세돌 9단을 바둑으로 꺾은 것입니다. 알파고는 구글사가 2014년에 약 4,000억 원을 들여 인수한 영국의 ‘딥마인드’사가 개발한 프로그램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세돌의 압승을 예상했습니다. 바둑은 거의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가 생기기 때문에, 인간의 창의와 직관에 의해서만 가능한 종목이라고 말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알파고의 승리는 인간의 창의와 직관도 결국 경험과 계산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졌습니다.
올해(2017년)는 현 세계 최강의 기사인 커제 9단이 알파고와 대결을 했습니다. 이때의 인공지능은 이세돌과 대결했던 버전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작년의 알파고(1.0ver)는 인간의 바둑 기보 16만판을 통해 지도학습을 진행한 반면, 올해(2.0ver)는 그것 없이 학습된 버전이었습니다. 즉, 인간의 기보 없이 자가 학습과 실전 대국으로 구축된 인공지능이었습니다. 결과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알파고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작년의 충격이 있었기 때문에 올해는 승부의 결과만큼이나 다른 측면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미 인간이 알파고를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고, 오히려 궁금했던 것은 알파고가 어떻게 바둑을 둘지 그 자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바시스 최고경영자(CEO)는 “아직도 바둑에는 사람이 밝혀내지 못한 신비한 영역이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알파고는 사람이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바둑의 신비를 파헤치기 위한 도구”라고 말하기도 했었습니다. 즉 이번 알파고 버전은 인간의 기보 없이 스스로 학습을 한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바둑을 보여줄지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습니다. 대국을 본 전문가들은 알파고의 솜씨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알파고가 인간처럼 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그동안 쌓아올린 바둑이 인공지능이 스스로 학습해온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 확인되었던 것입니다.
구글은 커제 9단과의 대국을 끝으로 알파고가 은퇴한다고 밝혔습니다. 알파고는 은퇴를 하면서 자신의 셀프 기보 50개를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보를 확인한 바둑기사는 충격과 공포에 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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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제와 대국을 하던 알파고는 굉장한 실력을 보여줬지만,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바둑을 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알파고가 스스로 둔 바둑은 우리가 알던 그런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구축해온 정석이 모두 의심을 받게 되었고,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알려진 수들도 그렇지 않다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심지어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바둑의 룰이 과연 공정한 것인가라는 의문도 제기되었습니다. 가령, 중국식룰에 따르면 백에게 덤으로 7집반을 주는 것이 현재 기준인데, 공개된 알파고 대국에서는 백이 거의 80%에 가까운 승률(흑 11:39 백)을 보였습니다.
허바시스 경영자가 이야기 했듯이 알파고는 아직 사람이 밝혀내지 못한 바둑의 신비를 파헤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알파고를 스승으로 삼고 바둑을 배우면 되는 것일까요? 알파고의 기보가 공개되면서 곤경에 빠진 것은 모든 바둑 기사들이겠지만, 특히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대상은 어린 기사들입니다. 이제 바둑을 배워가기 시작하는 이들은 기존의 바둑으로 훈련을 해야 하는지, 알파고의 바둑을 배워야하는지 고민이 될 것입니다. 인공지능의 기보가 공개되면서, 이런 농담이 돌았다고 합니다. ‘알파고 바둑을 이해하고 구사할 수 있다면 무적의 기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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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문제는 인간이 알파고처럼 둘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알파고의 대국을 분석하여 그 수법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바둑을 둘 수 있을까? 인간 프로기사들은 20수를 내다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의 뇌가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신경망을 가지고 있고, 바둑 고수들은 이를 고도로 훈련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신경망은 보통 10층에서 15층 사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번 대국에서 활용된 인공지능의 신경망은 몇 층일까요? 알파고의 바둑판 인식 딥러닝은 48층의 인공 신경망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즉, 인간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추상적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두뇌는 아무리 고도로 훈련된 기사라 하더라도 20수 이상 내다보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인간이 뇌를 바꾸지 않는 한, 알파고의 수를 이해하기가 어렵고, 그렇기에 그처럼 둘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알파고가 인간에게 바둑으로 도전했을 때는 ‘과연 인공지능이 얼마나 인간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했을까’가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뇌의 신경망) 때문에 인공지능의 수준에 도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해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알파고의 인공 신경망은 48층을 채택했지만, 이것은 기술적 한계가 아니라 선택사항이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기계는 152층이라고 합니다.(김대식, 『인간 vs기계』)
인공지능의 발달은 인간의 지능이 무엇인지를 도리어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계에도 선을 긋고 있지요. 유전공학을 비롯해 최근의 인지과학은 인간의 생물학적 기초 자체를 새롭게 세팅할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를 흥미롭게 조망하고 있는 저술 중 하나가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입니다. 그는 이러한 테크놀로지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면서, 이것이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지를 가늠해봅니다.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는 앞으로 호모 데우스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번 알파고 쇼크를 겪으면서 짧은 소설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17년 전에 쓰였던 단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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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이 2000년에 발표한 「인류과학의 진화」가 그것입니다. 이 소설은 근 미래를 다루는 SF 작품으로 인공지능이 발달하게 되면 인간은 무엇을 하게 되는지를 과학 영역에서 묻는 작품입니다. 테드 창의 이러한 설정이 허황되지 않는 이유는 실제로 인공지능을 활용한 인류과학의 진보가 시도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코넬 대학교의 크리에이티브 머신 연구입니다.
코넬 대학교의 크리에이티브 머신 연구를 이끌고 있는 호드 립슨과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마이클 슈미트는 2009년에 독자적으로 자연의 기본 법칙을 발견할 능력이 있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립슨과 슈미트는 이중 진자를 설치해서 작업을 시작했다.(···) 진자가 진동을 시작하면 움직임이 복잡해지면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사람은 센서와 카메라를 이용해서 진자의 움직임을 포착했고, 이로부터 일련의 데이터를 만들어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진자의 시스템을 통제할 능력을 소프트웨어에 부여했다. 달리 말하면 이들은 스스로 실험을 진행할 능력이 있는 인공 과학자를 탄생 시킨 것이다.
이어서 두 사람은 소프트웨어에게 반복적으로 진자를 출발시키도록 한 뒤, 이로부터 얻은 운동 데이터를 분석하여 진자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학 방정식을 찾아내게 했다. 알고리즘은 이 실험을 완벽하게 관리했다. 진자를 매번 잡았다가 놓을 때마다 알고리즘은 어느 지점에서 놓을 지를 결정했는데, 이 지점을 무작위로 선정한 것이 아니라, 먼저 분석을 시행한 후 이 진자의 운동을 이해하는 법칙을 찾는 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특정 지점에서 진자의 운동을 시작하게 했다. 립슨은 이렇게 말했다. “이 알고리즘은 진자의 운동을 구경만 하는 방관자가 아니다. 알고리즘은 ‘의문을 제기’한다. ‘호기심’을 가졌다는 이야기이다.” 두 사람이 나중에 ‘유레카(Eureqa)’라고 명명한 이 프로그램은 겨우 몇 시간 만에 뉴턴의 운동 제2법칙을 비롯한 진자의 운동 관련 물리 법칙 몇 가지를 찾아냈다. 이 과정에서 물리학이나 운동의 법칙을 이 시스템의 프로그램에 넣거나 관련 정보를 입력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마틴 포드, 『로봇의 부상』, 세종서적, 2016, 174~175쪽)
테드 창의 소설은 이 같은 인공지능 과학자가 고도로 발전된 세계를 무대로 합니다. 즉 “과학 탐구의 최전선이 인류의 이해력을 초월해 버린 시대”입니다. “실험 연구 분야에서 메타인류[인공지능]가 우위를 점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점점 연구 결과를 DNT(digital neural transfer; 디지털 신경 전이)를 통해서만 발표하기 시작”했고, 인간은 더 이상 이 첨단의 과학 실험의 장에 들어 갈 수 없게 됩니다. 이 시대의 인류는 인공지능 과학자가 성취한 기술이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다만 더 이상 인류가 과학에 대해 독창적인 공헌을 할 가능성이 없게 된 상황에서,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 지의 문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 때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테드 창은 이렇게 씁니니다.
연구자들 일부는 완전히 과학에서 손을 뗐지만, 뒤에 남은 사람들은 원래의 연구 분야에서 해석학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메타인류의 과학적 업적을 해석하는 학문 쪽으로.(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행복한책읽기, 2004, 292쪽)
이제 창의적인 학문적 업적은 인공지능이 수행합니다. 인간 연구자들은 인공지능이 낸 결과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해석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알파고를 예로 들면, 더 이상 바둑은 인간이 두지 않고 알파고들끼리 둡니다. 인간은 알파고가 수행한 수에 대한 해석자로 남습니다. 물론 알파고는 은퇴를 했고 적어도 바둑에서만큼은 앞으로도 당분간 인간 기사들끼리의 장이 유지될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인간이 알파고보다 더 나은 바둑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는 점입니다. CF를 만드는 인공지능, 소설을 쓰는 인공지능, 암을 진단하고 치료책을 제안하는 인공지능, 주식을 관리하는 인공지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 새로운 메타인류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인공지능들을 알파고처럼 은퇴시킬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럴 수 없게 된다면 인간은 무엇을 하게 될까요? 테드 창은 「인류과학의 미래」에서 “과학 탐구의 최전선이 인류의 이해력을 초월해 버린 시대에서 인류 과학자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이 질문은 현재의 우리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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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은 “메타인류 과학의 성과에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즉, “메타인류의 존재를 가능케 한 여러 과학기술은 본래 인류에 의해 발명된 것이며, 그들은 우리보다 더 똑똑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알파고를 비롯해 현재 운영되고 있는 인공지능도 특정 분야에서 놀라운 기능을 보여줄 뿐, 총체적으로 볼 때 우리보다 똑똑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뇌과학자 김대식도 “우주에서 가장 뛰어난 학습능력을 가진 기계는 여전히 우리 머리 안에 있는 1.5킬로그램짜리 뇌다.”라고 말합니다. 알파고는 컴퓨터 1,200대의 엄청난 전력을 소비하지만, 이세돌 9단의 뇌는 하루 20와트 정도의 에너지만 소비했습니다.
물론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는 정확히 예측하기기 어렵습니다. 전문가들도 큰 이견을 갖고 있는 것이 이 분야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공지능이 앞으로 인류와 함께 할 영역이 더 많아질 것이고, 그에 따라 과거와는 전혀 다른 국면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이 때 도리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분야가 문학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때의 문학은 흔히 말하는 본격문학이 아니라 장르문학일 지 모릅니다. 4차 산업혁명이 선언되었고,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신세계가 도래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이 때 말하는 상상을 적극 개진했던 분야가 SF 장르입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문학이 다시 도래한다면 그것은 SF적 상상력이 포함된 문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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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알파고의 승리는 인간의 창의와 직관도 결국 경험과 계산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졌습니다.'
이해 같은 작품 보면 이게 음악이나 미술, 문학도 그런 것처럼 묘사되고 있죠. 그래서 저는 변기 하나 설치 해놓고 샘이라고 하는 미술품이나 점 하나 찍어놓고 예술이라고 하는 것, 4:33처럼 침묵으로만 이루어진 연주행위 같은 게 정말로 경이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것들은 계산을 초월한 미적 감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직관만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미감에도 어떤 합리성이나 계산이 존재할까요? 물론 이것들도 작가적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선 어떤 계산이 있기야 있겠지만 기술적인 계산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합리성을 기성 예술과 같은 차원으로 파악하기엔 무리 같은데 밀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