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위키에(정확히 말하면 엔하 위키 시절에) '정형 전투' 라는 해당 항목을 제가 맨 처음 작성한 적이 있기에, 전투 부분의 내용 자체는 거의 대부분 유사하고 약간 보충된 부분만 있을 겁니다.
* PGR 게시판이 일정 수 이상으로 글자가 올라가면 글이 짤리더군요. 그래서 일부분을 이미지로 만들었는데 모바일로 보면 글자가 좀 작게 보이는 부분이 있을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1. 삼진평정
2. 경색 전투
3. 안읍 전투
4. 연여 전투
5. 정형 전투
6. 초나라의 기습을 물리치며 조나라 평정
7. 역하 전투
8. 유수 전투
9. 해하 전투
굳이 따지자면 팽성 전투를 넣을 수도 있고, 이 경우는 패전이 되겠지만 개인적으로 당시 상황을 보면 한신이 따로 뭘 할 수 있는 상황도, 뭘 했다는 정황도 없으니만큼 넣지는 않겠습니다.
여하간 이 모든 전투들이 약간의 비중 차이는 있을지언정 초한쟁패의 향방을 좌우했던 중요한 전투들 입니다. 그리고 이 9번의 전투 중, 가장 불리한 상황이자 가장 극적으로 이긴 전투가 바로 '정형 전투' 입니다. 지금 말하려고 하는 전투가 바로 이 정형 전투가 되겠습니다.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진격하는 한나라와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진격하는 초나라. 이 두 세력이 대치하던 가장 중심지가 형양과 성고 지역 입니다.
그런데 초나라와 한나라의 전쟁은 분명 동서전쟁이었지만, 이 전쟁에는 제 3자 역시 존재 했습니다. 바로 초, 한 외에 아직 남아있던 별개의 국가들이었습니다.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18제후왕을 분봉 할 당시의 상황. 파촉 지역의 한나라와 중원의 한나라는 서로 다른 나라입니다. 서쪽의 한은 우리가 아는 유방의 한나라, 중원의 한나라는 전국시대 한나라를 부활시킨 나라이자 장량의 고향이었더 국가 입니다.
파죽지세로 서진하는 초나라 군대를 막을 만한 세력이 하나라도 아쉬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어머니 팔아서 구라치고 배신한 위표의 행적은 유방으로서는 괘씸할 수 밖에 없었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위표가 버티는 '서위' 의 위치였습니다. 일단 여기서 다시 지도를 보면...
앞서 동서전쟁의 구도에서 초한 양군이 맞붙는 주요 지점이 바로 중원의 형양, 성고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윗 지도에서는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 입니다. 이 형양과 성고가 최전방의 주요 전선이라고 한다면, 후방의 작전기지로 관중 지역의 인적, 물적 자원이 출발하는 곳은 역양(櫟陽)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초한전쟁 당시 유방은 전방의 형양과 성고, 후방의 역양을 끊임없이 오고가며 전투를 치뤘습니다.
헌데 지도를 한번 보십시오. 서위의 위치는 형양-성고와 역양으로 가는 길 정중앙의 약간 북쪽이 아닙니까?
즉 위나라는 마음만 먹으면 역양에서 출발하는 보급을 차단해버릴 수도 있고, 항우의 압력에 짓눌리고 있는 형양과 성고의 뒤를 후려갈길수도 있습니다. 동쪽의 항우와 더불어 가히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룰 만 하니, 유방으로서는 뒤통수가 서늘하여 간담이 오그라들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유방은 휘하의 세객 역이기(酈食其)를 파견하여 위표를 회유하는 동시에, 한신과 조참을 파견해 위표를 치게 했으니, 이것이 바로 '안읍 전투' 입니다.
역양에서 출발하여 북상한 한신군은 위나라의 국경 지대 앞에서 하수(河水) 강가 앞에서 위나라군과 대치했습니다. 위표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자신을 공격하려는 한나라군이 올 것은 예상 했기 때문에, 하수 근처의 포판(蒲坂)의 수비를 강화하여 대치했습니다. 이때가 바로 BC 205년 8월 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당시 한나라는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자치통감' 을 보면, 이 안읍 전투를 다루기 직전의 기록에서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초한전을 말할때 "관중 지역의 엄청난 물량을 쭉쭉 찍어내 현장으로 보급해준 소하" 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정작 유방이 팽성전투 패배 직후 가장 위험한 상태였던 이때는 관중이 엄청난 기근에 시달렸던 겁니다. 더군다나 패전의 여파로 위표를 비롯한 제후들은 도망치거나 편을 갈아 타고 있고, 최전방의 형양과 성고에서는 항우의 압력이 무지막지한 상황...
따라서 항우를 막는 제 1전선도 아닌 제 2전선의 한신에게 유방이 내줄 수 있는 병력은 분명 많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강 너머에서 막강한 수비벽을 다진 위표에게 그대로 들이박는 건 무모한 싸움이었습니다.
이때 한신은 절묘한 계책을 시행합니다. 하수 강가를 사이에 두고 위표의 본대와 대치하고 있는 군대는 '그대로 두는 척' 하고, 실제로는 저 멀리 북쪽의 하양(夏陽)까지 이동했던 겁니다. 그리고 하수 북쪽에서 강을 건넌 후, 전선으로 군대가 나가 있느라 비어있는 위나라의 수도, 안읍을 향해 그대로 진격했습니다.
위표는 한신의 군대가 갑자기 자기 나라 수도를 공격해오자 기록 그대로 깜짝 놀라서 한신과 맞서 싸웠습니다. 한신이 후방인 안읍을 쳤으니, 한신과 맞서 싸웠다는건 당연하게도 위표가 군사를 이끌고 전선에서 후방으로 물러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당시 참전한 한나라의 장군들 중에서는 한신 뿐만 아니라 조참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조참의 기록을 담은 '조상국 세가' 의 기록을 보면...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조참은 동쪽으로 진군하며 위나라의 장수 손속이라는 인물을 무찌르고, 이후 안읍을 공격했다고 나옵니다. 우회군을 이끌고 안읍에서 위표와 직접 맞서 싸운 한신이 안읍에 이르기까지 달리 다른 위나라 부장과 싸운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100% 확실하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추측으로는 한신이 우회군을 이끄는 동안 조참이 본래 포판 근처에서 위군과 대치하는 군대를 이끌고 있었고, 위표가 한신에 놀라 부리나케 달려가며 적의 전력이 약해지자 조참이 그대로 동진해 대치하던 부대를 깨부수고, 안읍으로 진격했다는 그림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건 위표는 한신이 펼친 약간의 우회기동만으로 완전히 무너져 제대로 전투 같은 전투를 해보지도 못하고 꼼짝 없이 포로가 되었고, 위나라는 멸망했습니다. 이로써 한군은 당장의 위협을 제거하면서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북벌을 위한 길이 열렸습니다.
안읍 전투 승리 이후 한신은 유방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습니다.
이에 유방은 한신의 제안을 좇아 3만의 병사를 보냈습니다. 비교적 부각이 덜 되는 사실이긴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유방은 항우의 압력을 정면으로 견디고 있는데다, 관중에 든 대기근까지 생각하면 제2 전선에 3만 병력을 내놓은 것은 유방으로서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로써는 상당한 결심을 가지고 용단을 내렸다고 할만 합니다.
한편, 유방은 3만의 병력과 함께 또 다른 선물 하나를 한신에게 전달했습니다. 바로 상산왕 장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상산왕 장이
장이는 당대에 이름 높은 명사이자, 이 무렵에는 나이 역시 상당한 노장이었습니다. 그는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당시 '상산왕' 에 임명된 사람이었지만, 한때 친구로 여겼던 진여에게 배신 당해 내쫒겨 한나라에 의탁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장이는 조나라 지역의 상황을 잘 알고 현지에 아는 사람도 많은데다, 진여에 대한 복수심이 큰 만큼 여러모로 유용한 자원으로 쓰일 수 있는 인재였습니다.
3만의 병사와 이를 데리고 온 장이, 그리고 본래 한신의 부장으로 같이 머물고 있던 조참과 더불어 한신은 드디어 북벌에 나서게 됩니다.
안읍에서부터 고공 비행 하듯 중국의 북방으로 올라가는 한신 일행.
다시 지도를 봅시다.
한신 일행이 북벌을 하면서 처음 만나게 된 나라는 바로 대(代) 나라였습니다. 앞서 북방의 조나라, 제나라를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대나라에 관해서는 거의 이야기 하지 않았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대나라는 사실상 조나라의 위성 국가나 다름 없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당시 본래 조나라의 왕이었던 조헐(趙歇)은 멀쩡한 자기 나라였던 조나라에서 쫒겨나 대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후 조나라 지역에 새롭게 만들어진 '상산'의 왕이었던 장이를 내쫒고 그곳에 조나라를 부활시킨 실권자 진여는, 대나라에서 조헐을 모셔와 다시 조나라의 왕이 되게 하고, 본인은 대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만, 본인은 대왕의 직함만 취하고 실제로는 조나라에 머물며 조헐을 보좌했고, 대신 부하였던 하열(夏說)을 대나라에 보내 통치하게 했습니다.
즉 조나라나 대나라는 같은 나라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당연히 '조나라를 치고 싶으니 길을 비켜 달라' 며 정조가도(征明趙道) 따위를 주장해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겁니다.
한신의 3만 군대와 하열의 대나라 군은 연여(閼與)라는 곳에서 일대 격전을 펼쳤습니다. 이 전투에 대해서는 기록이 극도로 부실하기에 자세한 전황은 알 수 없습니다. 회음후 열전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조상국세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회음후 열전에서는 하열이 '사로잡혔다' 고 나오는데, 조상국세가에서는 '하열을 죽였다' 고 나옵니다. 어쨌거나 전황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좀 뒤의 일이지만, 진여의 참모였던 이좌거(李左車)가 한신의 군대가 온 형세를 설명할때 연여 전투가 한번 더 언급됩니다.
피투성이로 난자되었다는喋血 무시무시한 표현까지 써가며 이 연여 전투를 설명했고, 조상국세가에서 '적을 아주 크게 쳐부셨다大破' 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신 군단과 하열의 대나라군이 펼친 전투는 패전한 대나라 군이 처참할 정도로 도륙된 한신 군단의 완승으로 끝난 듯 합니다. 연여에서 대승리를 거둔 한신 군단은 계속해서 발걸음을 재촉해 조나라로 향했습니다.
연여에서 더 북상하여 태행산맥(太行山脈)의 관문인 정형에 이른 한신 일행. 태행산맥 너머로 크고 넒은 허베이 평야가 광활하게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한신 군단의 움직임이 지도로 살펴보면 바로 동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 기묘할 정도로 북쪽으로 쭉 내달린 다음 다시 동쪽으로 가는 모양새가 된 것은 동북으로 바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태행 산맥 때문입니다. 태행 산맥은 남북길이 약 600km, 동서길이 250km에 걸쳐있는 험준한 산맥이며 중국의 그랜드캐년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권중달 자치통감 2권 pp.75의 주석2)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즉 군대의 동진을 막고 있는 태행 산맥의 중간 부분, 갑자기 산맥이 돌연 끊겨 통과가 가능한 지역이 몇몇 곳이 되지 않는데, 정형이 그곳이니만큼 한신 군단은 산맥을 지나가기 위해 이 곳으로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조왕 조헐과 조나라의 성안군(成安君) 진여 역시 한신 군단을 막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정형으로 몰려 왔습니다. 그리고 그 군사의 총 숫자는, 기록되기로는 무려 20만에 육박하는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다만, 이것이 실제 20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에 대한 기록이 호칭(號稱) 20만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사의 전쟁 기록을 살펴볼때 가장 기본적인 개념 중에 하나가 호왈(號曰), 호칭 이라는 식의 표현 입니다. 적의 전력에 대한 첩보가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서, 아군의 전력을 과장하여 적을 겁먹게 하고 아군의 사기를 올리는 행위는 동서양을 통틀어 딱히 드물지 않은, 아니 오히려 그러지 않는게 더 드문 일입니다. 가령 그 유명한 가우가멜라 전투만 해도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페르시아는 백만 대군을 동원한 것이 됩니다.
다만 이런식이라면 모든 기록을 믿을 수가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런 프로파간다적인 과장을 어느정도 거를 수 있게 하는게 역사가가 이를 기록하며 덧붙인 '호왈 백만' 같은 식의 표현입니다. 즉 '백만이었다' 가 아니라, '백만이라고 불렸다' 는 겁니다. 즉 그렇게 과장을 했다는거죠. 당장 멀리 갈것도 없이 초한전쟁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는 '홍문연의 연회' 때만 해도 이런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싸우기에 앞서 일단 최소 두배는 부풀리고 보면서 적을 겁먹게 하려는 술책들 입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호왈 20만이라고 했으니 당시 조나라군의 규모는 대단찮았을 것이다, 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습니다. 그야 뻥을 친다고 해도 뭐가 있어야 뻥을 칠 수가 있으니까.. 한 몇천명 모아놓고 20만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실제로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이후 조나라군 내부에서 군사 회의를 할때 "나에게 별동대 3만명만 주면 적을 뒤에서 치겠다." 는 식의 발언도 나오는데, 이 본대에서 조금 떼서 별동대로 주라는 3만명은 한신 군단의 전체 숫자와 맞먹는 규모입니다.
20만에 근접한 숫자였다라고 하면 말할것도 없고, 최소 두배는 과장했다고 해도 10만 군대면 한신 군단의 세배에 달합니다. 설사 더 확 줄여서 6만, 7만 정도였다고 해도 역시 두배가 넘는 숫자임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차피 대혼란기에 떠도는 농민 보병을 최대한 징집하고 끌어와서 내보내는 식이었던 당대 전투의 흐름에서, 광할한 하베이 대평야 부근에서 바로바로 근처의 정형으로 인적 자원을 밀어넣을 수 있었던 조나라는 먼 곳을 거쳐온 한신 군보다 훨씬 벙력의 우위에 서 있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한신 군단은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데...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이미 병력 숫자에서 지고 들어가는 한신 군단이었지만, 그 병력이 더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유방
한신이 한참 연여에서 하열을 격파하고 정형으로 진군하려는 찰나, 유방은 사람을 파견해 한신의 군단에서 정예병만 따로 추려내 형양의 전선으로 이동시켰습니다.
단순히 한신의 입장만 생각하면 황당한 노릇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전황의 관점에서 보자면 유방을 마냥 비난 할 수는 없긴 할 겁니다. 한신의 북벌은 '성공하면 대박인데 실패하면 어쩔 수 없는' 제 2전선이라면, 유방이 버티고 있는 형양과 성고 부근은 '밀리면 바로 전쟁 끝나는' 제 1전선이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병사 3만을 빼서 양면전선을 만들었다는 것만 해도 유방 입장에서는 배짱 플레이 였습니다.
그렇다곤 하지만 그런 사정은 '모든 전역을 총괄하는 총사령관' 의 입장에서고, 현장을 이끌고 있는 지휘관 입장에서는 속 타는 일이었을 겁니다. 이미 병력 차이가 월등하게 나는 시점인데 여기서 또다른 이탈이 있었고, 그런데 목표는 그대로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신 군단의 출혈은 또 있었습니다.
조참
사기 조상국세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 무렵 한신 군단의 주축이 한신-장이-조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그 주축 중에 한명인 조참은 최대의 결전을 앞둔 이 시점에서 오히려 본대에서 이탈하여, 조나라의 별장인 척장군이라는 사람과 대결하고 있던 도중이었습니다. 조참이 참여했던 앞의 '안읍 전투' 나 훗날 다시 한신의 군대에 합류해 초나라의 용저와 싸운 '유수 전투' 등은 전투 후에 '조참이 이런이런 공을 세웠다' 는 기록이 쭉 남아 있는 반면에 정형 전투에 관해서는 저 기록이 다일 뿐이라, 조참이 정형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건 확실해 보입니다.
조나라 척장군의 군대를 가만히 내버려두면, 큰 전투가 될 앞으로의 정형 전투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을까요? 여하간에 한신은 조참에게 일단의 군사를 주어 척장군을 공격하게 했고, 조참은 정형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고 척장군과 싸운 후 남하하여 유방과 다시 합류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한신의 군대는 본래도 3만명으로 호왈 20만을 칭하던 조나라 군대에 비해 턱없이 적은 숫자에 불과하지만, 유방이 정예병을 거느려갔고 조참이 별동대를 꾸려감으로써 실제 전력은 3만명도 되지 않는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바로 이때, 진여의 참모였던 광무군(廣武君) 이좌거는 한신 군단의 상황을 살펴보고 계책을 올렸습니다.
"들리는 바로는 한나라의 장군 한신은 서하(西河)를 건너서 위왕 표를 사로잡고, 하열(夏說)을 사로잡아, 연여를 피로 물들였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장이의 도움을 받아 우리 조나라를 항복시키려고 의논하고 있다니, 승세를 타고 고국을 떠나 멀리서 싸우는 그들의 예봉을 막아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신이 듣기로는 천리 밖에서 군량미를 보내면 운송이 곤란하므로 병사들에게 주린 빛이 돈다고 합니다. 더욱이 땔나무를 하고 풀을 베어야 밥을 지을 수 있게 되므로 군사들이 저녁밥을 배불리 먹어도 아침까지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정형의 길이 좁아서 두 대의 수레가 함께 지나갈 수 없으며, 기병도 줄을 지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야 할 곳이 수백 리나 됩니다. 이렇다면 사세로 보아 군량미는 반드시 그 후방에 있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족하(足下)께서 신에게 기습 병사 3만 명만 빌려주신다면, 지름길로 가서 그들의 군량미 수송대를 끊어놓겠습니다. 군께서는 물길을 깊이 파고 누벽을 높이 쌓고 진영을 굳게 지켜, 한나라 군대와 어울려 싸우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면 적군은 전진해서 싸울 수가 없고, 후퇴하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때 우리 기습 병사가 적의 뒤를 끊고 들판에서 적이 약탈할 만한 식량을 치워버리면, 열흘도 못 되어서 적의 두 장군인 한신과 장이의 머리를 휘하에 바칠 수 있습니다. 군께서는 신의 계책에 유의해주십시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적의 두 장군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즉 정형구의 험준함만 믿고 지키면서 결코 적과 맞상대하지 않고, 이좌거가 이끄는 3만 별동대가 지름길을 타고 적의 후방에 이르러 보급을 끊어버린 후, 들판에서는 청야 작전을 전개하며 적을 지치게 하고, 적이 지칠대로 지쳐 버리면 그때 가서 적을 없애버리는 된다는 작전이었습니다.
만약 이 작전대로 시행할 경우, 한신 군단은 아군보다 숫자가 훨씬 많은데다 심지어 험지에 머물고 있기까지 한 정형구를 돌파하는 것은 대단히 힘들고 설사 가능하다고 한들 몇날 며칠을 싸워야 할지 모르는데, 역양은 말할것도 없고 안읍에서만 해도 수백킬로미터를 올라온 만큼 보급로는 한없이 길어진 상태에서 이를 노리는 적을 막을 방법도 없고, 현지의 물자도 청야작전으로 소개된 만큼 구할 방법이 없기 떄문에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 정형구 돌파는 둘째치고, 도망가는것조차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후방에서 움직일 3만 별동대만 해도 한신 군단의 전체 규모와 막상막하 수준이었을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진여는 이좌거의 이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성안군 진여
사기 회음후 열전에서는 진여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해 황당한 이유가 적혀 있습니다. 진여가 유학자라 비겁한 싸움은 하기 싫어했다는 겁니다.
'성안군은 유자(儒者)였다. 그래서 언제나 의로운 군대라고 일컬으면서 속이는 꾀나 기이한 계책을 쓰지 않았다.' (成安君, 儒者也, 常稱義兵不用詐謀奇計)
반고의 한서 한신전에서도 유학자인 진여가 비겁한 싸움은 하기 싫어해서 정당하게 맞서 싸우길 원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정말로 재미있는 것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는 이렇게 쓰여 있다는 것입니다.
'성안군은 일찍이 스스로 의로운 군대라고 하여서 속이는 꾀나 기습하는 계책을 쓰지 않았다.' (成安君嘗自稱義兵,不用詐謀奇計)
사마광이 부분을 쓰면서 참조한 기록이 바로 사기와 한서였을텐데, 원문에서 진여가 '유학자였다' 라고 하는 부분은 지워버렸습니다. 사마광은 말할것도 없이 유학자였기 때문에, 아마도 진여가 유학자를 들먹이며 정당한 싸움을 하겠다고 설치다가 대패하는 것이 유학자 망신 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는 어떻게 보면 진여에게 너무한 일일 수 있습니다. 정면 대결을 원하는 진여의 말이 정말 그렇게도 어이 없고 엉터리인 생각이었나? 싶은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여 본인은 전투에 나서려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들으니 병법에 아군이 적군의 열 배가 되면 포위하고, 두 배가 되면 싸우라고 했소. 지금 한신의 병력이 수만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수천에 지나지 않소. 게다가 천리 먼 곳에 와서 우리를 치는 것이니, 역시 벌써 아주 지쳤을 것이오. 지금 이런 적을 피하고 치지 않는다면 나중에 대군이 쳐들어올 때에는 어떻게 싸우겠소? 그렇게 되면 제후들이 우리를 비겁하게 여기고 함부로 쳐들어올 것이오."
유학자라서 정당하게 싸우려 했다고 하는 진여였지만, 정작 말하는 것을 보면 병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진여가 말한 '아군이 적군의 열 배가 되면 포위하고, 두 배가 되면 싸우라' 는 것은 실제로 '손자병법' 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故로 用兵之法은 十則圍之하고
五則攻之하고 倍則分之하고
敵則能戰之하고 少則能逃之하고
不若則能避之니라故로
小敵之堅은 大敵之擒也니라.
"그러므로 전쟁을 하는 방법은 병력이 10배면 포위하고,5배면 공격하고, 2배면 분산시키고, 대적할 만하면 능히 싸우고,병력이 적으면 능히 도피하고, 승산이 없으면 능히 싸움을 피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작은 적이 굳게 싸움은 큰 적의 포로가 된다." - 손자병법 모공편
즉 진여는 손자병법을 보면서 병법의 기초 정도는 확실히 체득한 사람이고, 자신의 행동 원리 역시 병법서에서 찾았습니다. 한신의 군대는 수만이라고 하지만 수천에 불과하며(수천까지는 아니었지만, 3만명에서 어느정도 줄어든 것은 사실입니다), 반대로 이쪽은 병력에서 압도적인 우위가 있고, 더구나 적은 먼 곳을 거쳐 오느라 지칠대로 지친 만큼 정면 대결을 펼쳐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금의 형세가 제후들의 기세 싸움이 치열한 만큼,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결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일 경우 '국가의 위신' 에도 큰 흠집이 날 수 있습니다. 이 위신이라는 것은 단순히 자존심 문제가 아닙니다. 초한쟁패기 제후들의 흥망을 보면 한때의 기세에 따라 우수수 세력이 늘어났다가 무너질때는 모래같이 스르륵 무너지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아직 체계적인 국가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고, 그때그때의 입소문과 세력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이쪽 편을 탔다가 저쪽 편을 타던 시대이니만큼, 이러한 위신은 결코 단순한 자존심 및 허세로 볼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정치적 문제도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한군과 조나라의 전력 차이가 월등한 상황이니만큼, 비록 실권자라고 한들 조나라의 왕이 아니었던 진여가 한신의 군대를 질질 끌면서 상대할 경우 그의 정치적 입지에 타격이 갈 수도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청야 작전은 말은 쉽지만, 실제로 이런 작전을 시행할 경우 그 지역의 그 해 농사는 틀림없이 끝장나게 될 것이므로 그 원망은 모두 진여가 받아야 할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리하여 양군의 결전, '정형 전투' 가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현 시짐에서 양군에게 유, 불리한 요소를 따져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병력
한신 군단 : 3만 이하
조나라 : 호왈 20만. 절반으로 잡아도 10만.
2. 지형
이좌거 : "정형의 길은 좁아서 두 대의 수레가 함께 지나갈 수 없으며, 기병도 줄을 지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야 할 곳이 수백 리나 됩니다."
3. 홈 원정 어드밴티치
진여 : "천리 먼 곳에 와서 우리를 치는 것이니, 벌써 아주 지쳤을 것이다."
이좌거 : " 군량미는 반드시 그 후방에 있을 것입니다."
4. 오합지졸
사기 회음후 열전 : '한신이 위를 항복시키고 대를 격파하자 한왕이 사자를 보내 그의 정예병을 거두어 형양으로 가서 초를 막게 했다.'
한신 : "내가 평소부터 훈련받은 사대부들을 이끌 수 없었으니, 이른바 ‘시장 바닥의 사람들을 몰아다가 싸우게 한 것’ 이오."
즉 한신 군단은 조나라 군단에 비해 병력 숫자에서 열세, 정형구의 험난한 지리적 여건에서 열세, 자국의 문턱을 지키는 조나라군에 비해 먼 곳을 달려온 원정군이라는 상황에서 열세였고, 심지어 병력의 질 마저도 열세였습니다. 물론 조나라 군이라고 해도 엄청난 정예병은 물론 아니었겠지만, 한신의 군단은 '정예병만' 쏙 빠진 상태에다, 대장인 한신 본인 마저 "이들은 시정잡배들이다." 라고 대놓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즉 모든 상황을 통틀어 봐도 단 하나도 유리한 점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든 어쩌든 간에 이제 싸움은 벌어졌습니다. 한신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모든 점에서 불리하지만 첩보만큼은 제대로 들어왔습니다. 한신은 미리 첩자를 파견해 진여가 취하려는 전략을 파악했고, 이에 더해 이좌거가 올린 제안이 묵살 되었다는 사실 역시 전해졌습니다.
'한신이 첩자를 시켜 염탐하게 했다. 첩자가 광무군의 계책이 채택되지 않은 것을 알고 돌아와 한신에게 보고했다. 한신이 매우 기뻐하며 군대를 이끌고 드디어 정형을 향해 갔다.'
이 기록을 보면 아마도 이좌거의 제안이 실제로 받아들여졌다면, 한신은 정형 부근에서 다시 회군해 싸우지도 않고 대나라 부근으로 물러났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거나 한신은 이좌거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대해 크게 기뻐했습니다. 훗날 전투가 끝난 후 이좌거를 만난 한신은 "만약 진여가 그대의 계책을 따랐다면, 나는 틀림없이 포로가 되었을 것이오." 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어느정도 이좌거를 띄어주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실제로 이좌거의 제안이 체택되었다면 한신은 정말 갑갑한 상황이 되어버렸을 겁니다.
최소한의 승리 가능성이 생기자 한신은 군사를 이끌고 정형 근처까지 진군했습니다. 정형에서 30리 거리, 즉 10km 안팎까지 다가오자 한신은 일단 이동을 멈추고 그곳에 진영을 꾸렸습니다. 잠시 병사들을 쉬게한 한신은 경기병 2,000명을 밤중에 추려내선 그 2,000명 모두에게 한나라를 상징하는 붉은 색 깃발을 들게 한 후, 샛길로 몰래 산으로 들어가 조나라 군의 진영을 주시하라는 아리송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신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조나라 군사는 내가 싸우다 달아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성벽을 비우고 나를 쫓을 것이다. 너희들은 그때 재빨리 조의 성벽에 들어가서 조나라의 깃발을 뽑고, 우리 한의 붉은 깃발을 세우라."
그러면서 수하의 비장(裨將)을 시켜 출발하는 병사들이 가벼운 식사를 먹는 와중에 이런 말을 전했습니다.
"이 다음의 식사는 오늘 조나라를 깨트리고 나서 할 것이다!" (今日破趙會食!)
지금의 상황이 대단히 어렵다는 건 굳이 병법에 밝을 필요도 없이 누가 보더라도 명백했기에, 병사들은 한신의 이런 자신만만한 말을 어이없어하며 믿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묘사가 쓸데없이(...) 조밀한 덕분에 당시 한군 병사들의 심리가 잘 느껴져서 개인적으로는 좀 웃기더군요.
제장들은 모두 (한신의 말을) 믿지 않고, 그저 건성으로 대답하였다. 諸將皆莫信, 詳應曰:
"예!" 「諾.」
이렇게 부족한 병력에서 2,000명이나 되는 병사를 따로 분리한 한신은, 이제와서 또다시 남은 병력 중에서 1만명을 따로 분리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병력을 현재 진을 치고 있는 군영에서 좀 더 앞으로 보내, 정형구 앞의 면만수(綿曼水)를 등 뒤로 하고 배수진(背水陣)을 치게 했습니다.
대군을 앞에 두고 남은 힘을 집중시켜도 모자랄 판에 병력을 수차례나 잘개 쪼개는 묘한 운용에다, 병법에서 금기시 되는 행위인 '강을 등뒤로 하는' 배수진을 치는 작전 등 한신의 작전은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1만 군대가 강을 건너 면만수 앞에까지 오자 그 모습은 정형의 조나라 군에 눈에도 띄었는데, 그 황당한 모습을 본 조나라 병사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조의 군대가 바라보고서 크게 웃었다(趙軍望見而大笑)
진여가 보고 웃었다거나 조나라 제장들이 보고 웃었다는 말도 아니고, 그냥 병사들 눈으로 봐도 웃긴 수준이었던듯...
그 속내야 둘쨰치고, 만약 따로 1만 명만 먼저 강 너머로 보낸 시점에서 조나라군이 몰려와서 공격해오면 그 1만명은 끝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조나라 군은 공격해오지 않았고, 이는 한신의 예상대로였습니다. 한신은 이를 걱정하는 한 군리(軍吏)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조는 유리한 땅을 차지해 누벽을 구축했다. 또 저들은 우리 대장의 깃발과 북을 보기 전에는 우리의 선봉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좁고 험한 곳에 부딪쳐 돌아가 버릴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趙已先拠便地為壁, 且彼未見吾大將旗鼓, 未肯撃前行, 恐吾至阻険而還)
즉 지금 조나라 군은 한나라 군 따위야 언제라도 격파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1만명 정도가 움직여도 자기들이 먼저 치면 적이 놀라서 도망가버릴까봐 한신 자신의 대장기가 눈에 보이기 전에는 공격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장기를 앞세운 한신의 군대가 눈 앞까지 왔을때 쳐야 한신을 잡아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조나라군은 한나라군을 비웃었지만, 실제로는 한신의 예상대로 그림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튿날 날이 밝아 왔습니다.
후방에 남아있던 한신은 장이와 함께 남은 병력을 모아 대장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며 진격해 왔습니다. 예상대로 한신이 직접 나타나자 그제야 조나라군은 정형구에서 누벽을 떨치고 나와 맞서 싸움을 벌였습니다.
앞서 수차례 말했듯 한신의 군대는 이미 전투에 나서기 전에도 병력이 분할되었었고, 전투에 나선 시점에서도 또 병력이 분할된 상태였으니, 이때 한신이 이끌고 있던 병력의 숫자는 대단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신의 군대는 오랫동안 크게 싸우며(大戦良久) 대항했습니다.
그렇게 잘 싸우던 한신과 장이는 슬슬 부대가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에 몰리자, 가지고 온 북과 깃발을 모두 버리고 달아났고, 조군은 그런 한군을 추격했습니다.
급하게 퇴각해 온 한신과 장이를 보고 물가에 진지를 친 병사들은 서둘러 진의 문을 열어 그들을 들어오게 했습니다. 한편 승세를 탔다고 생각한 조나라군은 누벽을 비워놓고 주력군이 한신을 추격했는데, 일단 한신과 장이가 진에 들어서게 되자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던 기세가 크게 둔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한군의 패색이 짙었으나 도망칠 곳도 없는 만큼, 필사적으로 싸웠으므로 조군은 이를 깨트릴 수 없었습니다.(軍皆殊死戦, 不可敗) 바로 이것이야말로 한신이 배수진을 선택한 이유였는데, 잘 훈련된 군사들이 아니고, 그나마 있던 정예병도 사라진 한신으로서는 시장바닥에 있던 사람들을 쓸어모아 전쟁터로 내모는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엉망인 부대는 조금만 전투가 어려워도 정신없이 달아날 것이 틀림없었고, 이런 상태에서 만약 도망칠 구멍이 있다면 너나 할 것없이 개미처럼 빠져나갔을 것이 자명했습니다. 그렇게 일부라도 흩어져 부대의 전열에 균열이 생기게 되면 그후에 짓이겨지는 것은 금방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신은 완전히 이들을 사지로 몰아버림으로써 치열하게 버틸 수 있게 된 겁니다. 한신은 이 이치에 대해서도 전투 후에 부하들에게 "병법서에 '죽을 곳에 빠진 뒤에야 살게 할 수 있고, 망할 곳에 있어야 생존하게 할 수 있다.' (陥之死地而後生, 置之亡地而後存) 라고 다 나와있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며 모든 것이 자신의 의도대로였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또한 만약 한신의 군이 조나라군과 정신없이 교전하다가 후퇴하던 와중 강을 만나 도주하지 못하고 싸웠다면, 앞서의 패배에 더해 완전히 규율이 무너지고 대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다소 무리해서라도 1만명을 따로 보내 진지를 구축해두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수비력이 준비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어쩃거나 배수진으로 버틸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배수진만으로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바로 이때, 한신이 미리 준비해둔 안배가 빛을 발했습니다.
바로 이 무렵, 한신이 미리 준비해두었던 2천여 경기병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병력 수에서 워낙에 한신 군이 밀렸던데다, '어차피 이긴 승부다' 라고 생각한 조나라군은 모두 몰려가 배수진을 친 한나라군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이 틈을 타 산을 넘어온 2천여 경기병은, 폭풍 같이 정형구 안으로 내달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조나라의 깃발들을 모조리 뽑아 버리고, 가져온 2천여개의 한나라 깃발을 세웠습니다.
조나라군은 이미 거의 전병력이 전장에 나가버렸기 때문에 정형구 안에는 예비대도 부족했고, 설사 약간의 예비대가 있었다고 한들 한없이 유리하기만 했던 상황에서 갑자기 기습을 당한데다, 2천여 경기병이 재빠른 움직임으로 특공(特攻) 작전을 시행하자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무렵, 생각보다 거센 저항에 직면해 쉽게 배수진을 깨지 못한 조나라 군은 물러나기 시작했다가, 정형구 쪽에서 한나라의 붉은 색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무조건 이겼다고 생각한 전투가, 생각보다 쉽지 않게 흘러가기 시작하다가, 멀쩡하던 아군의 진지에서 갑자기 적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니?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멘붕에 빠진 조나라군 병사들의 심리 상황.
누벽에 모두 한의 붉은 깃발만 세워져 있자 매우 놀랐고 한이 이미 조왕의 장군들을 모두 사로잡았다고 생각하여 어지럽게 달아났다. 조의 장군들이 달아나는 군사를 베어 죽이면서 막으려고 했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이에 한의 군대가 협공해 조의 군대를 크게 깨뜨리고 병사를 사로잡았다. - 사기 회음후 열전
결국 조나라 군은 그 순간 대탈주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조나라 군은 여전히 한나라 군보다 압도적인 숫자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설사 2천여 병력이 정형구를 장악하고 있다고 한들 재차 전력을 수습해 다시 공격한다면 언제라도 승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놓인 병사들은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모두 도주하기 시작했고, 조나라 장수들은 어떻게든 병사들을 수습하려 자신들이 직접 달아는 병사를 죽이면서 막으려고 했지만, 대군이 한번 무너지자 일개 장수들 몇명이 아무리 악을 써봐야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때, 한신의 군대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움직였습니다. 여기서 '협공' 했다는 기록이 인상적입니다. 조나라군 병력이 수습되기 이전 한신은 장이와 함께 몰려나와 이를 쳤고, 정형관 안에 있던 경기병들 역시 움직여 조나라군을 공격했습니다. 결국 조나라군은 압도적인 숫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몇배나 숫자가 적었던 한신 군단에게 '포위섬멸전'을 당하고 말았던 겁니다.
포위 당한 조나라 군사들은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어나갔으며, 성안군 진여는 결국 난전 중에 목이 달아났습니다. 적의 실질적인 총대장이 도망조차 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셈입니다.
그리고 이 전투의 성과는 여기서 끝난게 아닙니다.
리델 하트는 저서에서 '승리를 이용하고 완성하는' 추격전을 강조했습니다. 사기 장이진여열전에 따르면, 한나라 군은 도망간 조나라 왕 조헐을 저 멀리 양국(襄國)까지 추격했고, 결국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이로써 조나라는 호왈 20만에 일컫던 대군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실권자였던 진여, 명분적 중심이었던 조헐까지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고, 단 한번의 전투 패배로 조나라는 한신의 손아귀에 떨어졌습니다.
조나라를 정복한 한신은 포로로 잡혀온 이좌거의 결박을 풀어주고 그를 귀빈으로 대접하며 앞으로의 대책을 물었습니다. 여기서 이좌거는 당시 한신의 기세를 느낄 수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今將軍渉西河, 虜魏王, 禽夏説閼與, 一挙而下井陘, 不終朝破趙二十萬衆, 誅成安君. 名聞海內, 威震天下, 農夫莫不輟耕釈耒, 褕衣甘食, 傾耳以待命者.
"지금 장군께서는 서하를 건너 위왕을 사로잡았고, 하열을 연여에서 사로잡았습니다. 단번에 정형을 내려와 하루아침에 조군 20만을 깨뜨리고, 성안군을 베어 죽였습니다.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들리고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습니다. 농부들도 나라의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농사를 그치고 쟁기를 내버린 채 아름다운 옷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귀를 기울여 명령을 기다리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
그러나 동시에 덧붙이기를, "한군이 지금 대단한 기세긴 하지만, 바로 움직이기에는 너무 지쳤다. 만일 함부로 움직여서 성과를 못 낸다면 오히려 기세가 떨어질테니, 차라리 지금의 기세를 살려 다른 나라에 겁을 주면 복속할 터이니 군사는 쉬게 하는 편이 좋다." 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이 말을 옳게 여긴 한신은 무리하게 군사를 운용하기보단 조나라 쪽을 향한 초나라의 공세를 막으면서, 사신을 파견해 연나라 왕 장도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대-조-연 3나라가 모두 무너져 내렸고, 초한전쟁의 향방은 크게 뒤흔들리게 됩니다.
삼국지 11의 한신.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이 전투가 시작될 당시 한신은 적에 비해 단 한가지도 우위를 점한 것이 없었습니다. 병력에서도 압도적으로 밀렸으며, 질적인 측면에서도 정예병을 잃어버려 전혀 우위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정형구라는 요지를 장악한 진여에게 지리적인 여건 역시 밀렸고, 자신의 국가에서 수비하던 조나라군에 비해 위나라, 대나라와 계속 전투를 치루면서 북상한 한군은 지칠대로 지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신은 이 전투에서 당시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전투의 기본' 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불리한 전력으로 강대한 적에게 싸움을 걸었고, 등 뒤로 배수진을 쳤으며, 병력을 집중시키지 않고 오히려 분할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한신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 모든 작전들이 "될 대로 되라" 고 내지른 작전이 아니라, 적의 생각을 완전히 파악하고 계산하여 움직인 작전이라는 점이 놀라운 점입니다. 병법을 무시한듯한 한신이지만, 한 군리에게 '어째서 적이 우리를 지금 공격하지 않을 것인가' 라고 설명하는 부분은 한신이 적의 행동을 모조리 예측하고 있었다는 부분을 보여주는 부분으로, 이 전쟁은 사실상 한신의 손에 짜여진 각본으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패전한 진여는 무언가 엄청난 실책을 했던 것일까. '정당한 승부를 즐기는 유학자라서 비겁한 술책을 쓰지 않으려 했다' 거나, '이좌거의 말을 듣지 않았다' 라는 식의 사서에서의 묘사가 진여를 굉장히 저열한 인물처럼 묘사하고 있긴 하지만, 실제 진여가 취한 행동을 보면 그가 엄청난 실책을 했다고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좌거의 필승책을 듣지 않았다곤 해도 전력에서 압도적 우위를 가진건 분명했고, 딱히 전투에서도 엄청난 실책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나마 실책이라고 한다면 '예비대를 많이 남겨두지 않았다' 라는 점인데, '한신의 군영을 깨면 무조건 이기는 상황' 이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그마저도 진여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실수를 했다고 보기 힘들어 보입니다. 정석인 이유로 싸웠고, 전형적으로 싸웠습니다. 그리고 패전했습니다.
진여의 문제라고 한다면 한신과 싸웠다는 자체보다는 한신과 싸우게 했던 자만심이 문제였을 것입니다. 한신의 병력이 형편없고 원정군이라 지쳤을 것이라고만 여기며 싸움에 나섰고, 1만 부대가 따로 움직일 때도 대장인 한신이 달아날까만을 염려하며 한번에 적의 대장을 물리치기 위해 싸움을 걸지 않았습니다. 또한 적의 기상천외한 배수진에 대해서도 조나라군은 경계는 커녕 비웃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적을 과소평가하고 방심만 하고 있었으니 한군의 경기병들이 정형관을 급습할때 이를 방비할 마땅한 수비병이 안 보였다는 점도 이해가 갈만 합니다.
이 전투이 뛰어난 점은 적의 이러한 방심, 그리고 그 방심을 불러일으킨 자신의 열세를 오히려 무기로 사용해서 대역전을 일구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만일 한신의 군대가 더 강력했다면 일부러 수비작전 대신 정면승부를 하러 나오지도 않았을테고, 배수진을 꾸리기 위해 1만명의 부대가 움직였을 때 조군이 그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도 않았을 테고, 적을 섬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며 정형관을 그렇게 비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한신은 오히려 병력이 열세하고 약하기 때문에 그렇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니, 생각해보면 실로 기막힌 전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마지막 국면에서는 열세한 병력으로도 포위 작전을 벌이며 적을 섬멸했고, 심지어 저수 강가에서 진여를 죽이고 조헐을 양국까지 추격해서 죽임으로써 승리를 이용하고 완성하는 추격전까지 벌이며 할 수 있는 모든것을 다 했습니다. 말 그대로 전투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국면을 전부 북치고 장구치며 실현하고 완벽하게 성공시킨, 명장으로 이름 높은 한신의 전투 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전투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