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자흥 일족의 몰락과 이로써 비롯된 나비효과는 향후 적잖은 파장을 남길 테지만, 지금 당면해야 할 문제는 이와는 별개의 일이었다. 과연 집경(남경)을 어떻게 공략해야 할까?
앞선 글에선 곽천서 일행의 실패로 주원장이 마냥 큰 이득만 얻은 것처럼 이야기 하긴 했지만, 여기에는 미래 예언적인 요소가 섞여 있다. 지금의 현상을 똑바로 보자면, 집경 공략은 실패했고 진야선의 부대는 다시 독립했다. 아군은 한번 대패했고 원나라 군은 아직도 많은 숫자가 남아 있었다. 즉 여유로운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일단 상황을 정리해 보자. 최종 목표인 집경은 적장 복수가 이끄는 병력이 지키고 있다. 집경 근처에는 적의 수군 사령관 강무재가 주둔해 있었으며, 과거 진야선의 수중에 있던 3만 6천 병력은 따로 독립해 방산(方山)에 머물고 있었다. 사령관은 죽은 야선의 아들인 진조선(陳兆先)이었다.
만자해아의 수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여전히 채석에 뱀처럼 웅크리고 있는 상태였다.
주원장은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꼬일 대로 꼬인 복잡한 실타래를 풀 듯 천천히 문제 해결에 집중했다. 여러 적군과 여기서 야기된 많은 문제들 중에서, 어떤 부분부터 해결해야 하는가? 질문을 바꿔서, 어떤 부분이 가장 시급하고 중차대한 문제인가?
그러자 답이 나왔다. 주원장은 눈앞의 집경은 우선 내버려 두고, 군마의 방향을 돌려 채석을 향해 되돌아갔다. 만자해아를 먼저 상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현재 총대장 주원장을 비롯한 군단의 주축은 모두 장강 이남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장병들의 처자를 비롯한 살림살이는 아직 장강 이북의 화주에 남아 있었다. 군단은 병사고 장군이고 간에 가족들의 얼굴을 못 본지 오래였다. 이는 주원장도 마찬가지다. 마부인이 화주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을 보지 못하더라도, 단지 소식이라도 통하면 걱정을 조금 덜하려만, 만자해아의 수군이 그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때문에 7~8개월가량 주원장 군은 화주에 관한 이야기라고는 풍문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다. 제장들의 사기 문제도 있고, 군수물자에 관한 부분도 걱정이었기에 이 문제는 집경 공략에 앞서 확실하게 해결해야만 했다.
만자해아의 군단은 수군이기에 이 싸움은 배를 이용한 수전(水戰)으로 전개될 예정이었다. 주원장은 언제나처럼 총대장이 되어 직접 싸움에 나섰다. 그런데, 뛰어난 전략가였던 그는 먼저 교묘한 덫을 늘어놓았다.
주원장은 대군을 이끌고 가기에 앞서, 상우춘을 시켜 의병(疑兵)을 이끌고 가게 했다. 의병이란 곧 적의 눈을 속이는 허깨비 부대라는 뜻이다. 하지만 만자해아의 입장에서는 이 부대가 주공(主攻)인지 허깨비 부대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결국 그는 상우춘의 의병에 수동적으로 끌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본시 만자해아군은 한 곳에 똬리를 틀고 견고하게 웅크리고 있었던 참이었다. 흡사 해상의 요새와도 같은 그들을 공격하자면 엄청난 피해가 예상되었지만, 허깨비 부대의 움직임에 적이 반응한 탓에 탄탄한 수비벽은 잘게 쪼개졌고, 허리를 편 뱀처럼 길게 늘어지는 모양이 되고 말았다. 간단한 기동 하나로 적 수비라인을 깨부숴버린 셈이다.
준비가 갖추어지자 그제야 주원장은 본대를 이끌고 교전에 나섰다. 아군과 적군 모두 화살을 비처럼 쏘고, 고함을 지르며 창칼을 휘둘러댔다. 여기저기서 함선과 함선이 부딪히고, 눈먼 화살에 맞은 병사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강물에 고꾸라지는 난전이 펼쳐졌다.
이때, 의병을 이끌고 적을 끌어낸 상우춘의 부대가 전장에 합류했다. 병사를 지휘하는 장군이라면 큰 배에 타서 안전을 도모할 법도 하건만, 그는 오히려 작은 배에 옮겨 탔다. 상우춘이 탄 배는 크기는 작은 대신 가볍고 재빠른 움직임이 가능한 함선이었다.
상우춘은 그대로 배를 적진 한가운데로 몰아갔다.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오고 함선이 고슴도치처럼 되어가며 뒤뚱거리는 판이었지만 그는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병사들이 쓰러지는 와중에도 주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렇게 적의 중심부에 도달한 상우춘의 함선 바로 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적장 만자해아의 대장선이었다.
상우춘은 아랑 곧 하지 않고 계속 함선을 앞으로 전진시켰다. 이윽고 함선은 적 대장선의 옆구리를 세차게 들이박았다.
곧 엄청난 굉음과 함께 만자해아의 대장선이 기우뚱하고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충돌의 여파로 완전히 두 동강이 나버렸던 것이다.
자기들의 대장선이 이렇게나 웅장하게 침몰하게 되자, 그 모습을 본 원나라 군사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주원장은 휘하 수군을 양쪽으로 나눠 섬멸전에 나섰다. 만자해아의 수군들은 모조리 대파되었고, 그나마 멀쩡했던 함선들은 전부 주원장군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대장 만자해아는 자신의 목숨만 겨우 건져 도주, 근처의 군웅인 장사성에게 항복했다. (1)
대 만자해아 전의 승리로 주원장 군은 드디어 후방에 대한 압력을 걷어낼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집경을 공략할 시간이 다가왔다.
1356년 3월. 양력으로는 4월 3일, 주원장은 육군과 새로 얻은 수군을 더해 수륙의 대군을 이끌고 집경을 공격해왔다. 집경 성 밖에는 진조선이 3만 6천 대군을 이끌고 주둔해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물려받은 부대라 아비만큼의 통제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일전의 패전과 이로 인한 항복, 그리고 다시 이어진 배신을 거치며 부대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탓인지 이들은 숫자에 비해 별다른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 번의 싸움 끝에 진조선은 어이없이 포로가 되었고, 3만 6천 병력은 또다시 주원장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패잔병이 된 이 부대는 크게 동요하며 안심하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하다. 이미 그들은 한번 주원장에 맞서 싸우다가 패배하여 편을 갈아탄 적이 있던 부대였다. 그러다가 진야선의 배신행위로 다시 관군의 편을 들었는데, 이제 또다시 주원장의 손에 들어온 셈이다. 비록 대장의 행위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녔을 뿐이라고 해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눈앞에 집경이라는 큰 성을 앞에 둔 주원장의 입장에서 보자면, 포로들의 이런 분위기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치열한 전투 와중 만약 그들이 편을 갈아타 배신한다면 굉장히 골치 아파진다. 그렇다고 3만 6천 명이나 되는 포로를 모두 학살한다? 그런 짓을 한다면 훗날 주원장에게 항복하는 병사들은 아무도 없게 될 터였다. 여기서는 어떻게든 포로들의 불안감을 해소해야만 했다.
주원장이라는 인물의 성격에 대해서 일전에 간략하게 묘사한 적이 있는데, 그는 언제나 격정에 휩쓸리지 않고 냉정 침착한 판단력을 견지했다. 그런데 이것이 그가 감정의 희노(喜怒)를 거의 보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주원장은 어떤 사람보다도 강한 격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격정 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좋다. 단지 그 철두철미 함이 늘 최후의 순간에 격정을 꺾고 승리를 거두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철저함을 추구하던 그는, 종종 돌연 발작에 가까운 행동으로 자신이 몇 중으로 쳐놓은 거미줄을 스스로 찢고 나섰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거의 대부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어쩌면 이런 점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시대를 움직이는 걸물로서의 면모일지도 모르겠다.
포로 문제를 해결한 주원장의 방법이 그런 식이었다. 주원장은 항복한 3만 6천 명 중 체격이 좋고 건장한 500명을 따로 추려냈다. 그리고 이들을 휘하 친군(親軍)으로 삼았다. (2) 친군이라고 하면 가장 지근거리에서 자신을 지키는 병사들이다. 바꿔 말하면 그들이 배신하면 누구도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없는 셈이다. 그런 친군에 분위기가 뒤숭숭한 포로 부대를 배치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이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사기 위해 술잔치를 벌였다. 500여 친군들 만으로 이루어진 술잔치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주원장이 있었다.
주원장은 입고 있던 갑옷마저 내팽개치고는 편한 옷차림으로 그들 사이에 섞여 같이 먹고 마셨다. 밑바닥 출신의 걸쭉한 입담으로 말단 병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며 떠들어댔다. 그런 주원장의 옆에 있던 믿을만한 사람이라곤, 장수도 아니고 모사였던 풍국용 한 사람뿐이었다. 믿음직한 서달도, 키가 큰 탕화도, 맹호 같은 상우춘도, 재기 발랄한 등유나 풍승도 없었다. 오직 주원장과 풍국용 둘 뿐이었다.
그렇게 밤이 가도록 잔치를 즐기다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주원장은 그대로 자리에 뻗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바로 곯아떨어졌다. 똑같이 고주망태가 되어 쓰러진 500명의 친군들 역시 주원장과 더불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일어난 그들은 여전히 잠에 취해 긁적거리며 누워 있는 주원장을 보고는 새삼스레 깜짝 놀랐다. 그리고 동시에 주원장이 얼마나 자신들을 믿고 신뢰하면 이렇게 맨몸을 내놓고 마음껏 잠에 취할 수 있을는지 생각하고 감동하게 되었다. 500여 친군과 이들이 퍼뜨린 소문에 의해 3만 부대의 군심이 순식간에 안정된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3)
내부의 혼란을 객기에 가까운 모험으로 잠재운 주원장은 집경 공격을 재개했다. 그리고 마침내 4월 10일, 거대한 집경 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집경 성을 지키던 복수는 실로 의사(義士)라고 할 수 있었다. 만자해아가 패배해 달아나고, 진조선이 포로가 되고, 강무재 마저도 항복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성의 복귀루(伏龜樓)에 머물며 꿋꿋하게 지휘를 계속하고 성이 무너지는 와중에서도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런 복수를 보고 좌우의 병사들은 모두 일단 몸을 피할 것을 건의했다.
“도망쳐서 후일을 기약해야 합니다!”
하지만 복수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꾸짖었다.
“내가 어디를 간단 말이냐?”
달아나자는 주위의 제안을 일축한 복수는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직접 활을 들고 몰려드는 주원장 군을 상대로 맞서 싸웠다. 그리고 최후까지 버티던 병사들과 함께 죽었다. 복수 외에도 참정 백가노(伯家奴), 다루가치였던 달니달다(達尼達思) 역시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4)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원나라 장수들이 힘이 다해 쓰러지고, 그들의 피로 젂셔진 성벽을 넘어 주원장이 승리자로서 입성했다. 그에게 있어서 이 날은 틀림없이 감회에 잠길만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곽자흥의 부장이었던 그때부터, 주원장은 늘 이날을 꿈꾸고 있었다. 남경을 점령하고, 그 주인으로서 이 성벽을 넘어 입성하는 순간을 말이다.
하지만 주원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거들먹거리며 위세를 뽐내거나 잔치를 치르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집경의 관리와 지주, 여타 유력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여타 사람들이 두려움 반, 의혹 반이 담긴 시선을 보내며 몰려들자,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원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 사방에서 칼과 창을 들고 난리를 일으켰소. 백성들의 삶 역시 매우 곤궁해졌고, 때문에 난리를 멈추게 하기 위해 내가 왔소." (元政賣擾,干戈蜂起,我來為民除亂耳)
주원장이 자신이 혼란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이 모든 혼란을 종식 시키기 위해 왔다는 점을 그들 모두에게 강조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모두는 불편함 없이,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내시오. 어진 선비가 있다면 내 마땅히 예를 갖추어 뽑아서 쓰겠소. 잘못된 옛 제도가 있다면 고치겠소이다. 관리들은 탐욕에 찌들어 내 백성을 함부로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其各安堵如故。賢士吾禮用之,舊政不便者除之,吏毋貪暴殃吾民) (5)
주원장의 이 연설은 그가 롤모델로 삼았던 한고조 유방을 흉내 낸 것이었다.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입성한 유방이 약법삼장(約法三章)을 내세우며 했던 연설과 약간은 다르지만 그 뜻은 거의 동일했다. 예전처럼 지내라(如故)는 말 역시 유방의 연설에서 나오던 내용과 똑같다. 당시 유방은 “관리와 백성들은 모두 전처럼 편안하게 지내라.” (諸吏人皆案堵如故) (6) 라고 말했다.
주원장의 ‘유방 따라 하기’ 는 성공적이었다. 걱정하던 백성들이나 현지 유력자들은 불안감을 떨쳤고, 되려 “어떻게 하나 보자.” 는 태도로 이 새로운 정복자에 기대감을 가졌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주원장은 집경로의 이름을 고쳐 응천부(應天府)로 바꾸었고, 하욱(夏煜), 손담(孫炎), 양헌(楊憲) 등 명망 있는 인물들을 불러 등용했다. 그리고 죽은 복수를 장사지내 그 충의를 기렸다.
그런데 앞서 말한 주원장의 연설 중에서는 유독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바로 연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의 백성을 괴롭히지 말라.” 는 부분 말이다. 주원장은 남경의 백성들을 ‘나의 백성’ (吾民)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왕의 표현법이다.
과거 주원장은 왕위에 오르려는 곽자흥을 만류하며, “저주는 왕이 되기에 좋지 않은 곳이다.” 라는 것을 그 이유로 삼았다. 그와는 반대로, 남경은 왕을 위한 도시였다. 일개 군벌이었던 주원장은 남경 점령을 기점으로 제왕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행보의 첫 번째 길은 바로 오국공(吳國公) 선언이었다. 1356년 7월, 주원장은 문무 신료들에게 오국공으로 추대되었으며, 강남행중서성(江南行中書省)을 두고, 관료 제도를 정비, 실시했다. 이선장이 주축이 되었고, 장수들은 각각 공적에 따라 원수로 승진하게 되었다.
호주의 거지 주원장이 오국공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은, 아직 이 이야기의 1막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1) 명사 태조본기, 명사 권 125 상우춘 열전
(2) 명사 권 129 풍국용, 풍승 열전
(3) 명사 태조본기
(4) 명사 권 124
(5) 명사 태조본기
(6) 사기 고조본기
덧-
구상하고 있는 내용을 부분별로 나누자고 한다면 5장 정도 되는 분량 중에서 여기까지가 1장 쯤 됩니다.
2장이 '주원장, 장사성, 진우량의 강남삼국지 중심의 군웅쟁패 이야기'
3장이 '명나라의 북벌, 원나라 멸망과 북원과의 전투, 조선 및 일본, 티무르 제국과의 마찰 이야기'
4장이 '황제로서 주원장의 치적 및 신하들과의 갈등, 숙청'
5장이 '주원장 사후 정치적 갈등, 정난의 변. 영락제의 황제 등극으로 마무리.'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다 쓸 수 있을지는 둘째치고....